아메리칸 시저 1
우리에게 있어 맥아더라는 인물에 대한 인상은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리게 한다. 시저라는 인물은 로마시대 인물이었고 대단한 영웅(英雄)이었다. 최근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세계 제국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이로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세계4대 성인 다음가는 인물쯤으로 인정되는 것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3권 5권까지가 시저라는 인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천년의 로마를 얘기하는 15권 중에 3권을 시저에 할애한 것만으로도 그 중요성이 실감날 정도이다. 그런 시저에 버금갈만한 인물로 맥아더를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시저는 윌리엄 맨체스터의 전기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글라스 맥아더에 관한 것이다. 12백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했던 미국의 최고 영웅이라 할 만한 맥아더에 관한 것을 세밀하고 정밀하게 세심한 고증을 거쳐 만든 것 같아 보인다. 맨 먼저 시작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미 스페인전쟁에 참전하였고 남북전쟁에도 참전하였으며 필리핀에서의 생활도 경험한 아버지는 중장으로 예편한 군인이었다. 미 스페인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 등을 갖게 된 것이다. 파나마 쪽의 폐색작전을 수행하게 되기도 한다. 그것을 러 일전쟁 때 여순의 폐색작전을 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었다. 맥아더는 젊은 초급장교시절 일본과 필리핀 등 아시아 제국들을 두루 둘러보며 그 국가와 지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되었다. 집에는 4,000권의 도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읽으며 견문과 식견을 넓혀갔고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모친은 지독하게도 아들에 대해 헌신적이었고 애정을 쏟아 부었다.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미국생활에 더 익숙해 했고 그리워했다. 그런데 그는 필리핀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이혼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유럽전선에 배치되게 된다. 그는 2014-17년까지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장군진급까지 이루게 된다. 최연소로 38세쯤에 장군이 되었다. 그것에는 어머니의 노력과 헌신도 일조를 한 셈이 되었다. 특이한 복장으로 전선을 누볐던 그는 엄청난 공훈을 세우게 되고 훈장도 여러 개 받게 된다. 50세의 나이에 참모총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런 후 다시 소장으로 좌천되기도 한다. 그러다 1937년에 현역에서 퇴역을 하게 된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勃發)하게 되었다. 그러자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게 된다. 필리핀에 사령관으로 있게 되었는데 전력의 열세로 인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마닐라를 빼앗긴다. 그런 후 마닐라 반대편 지역에 있다가 상부의 지시에 의해 불가피하게 필리핀에서의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상당히 먼 거리였고 적들이 호시탐탐(虎視耽耽)노리는 속에서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은 후에 겨우 필리핀 남쪽으로 갔다가 결국 호주로 탈출(脫出)한다. 얼마 후에 다시금 남태평양사령관이라는 보직(補職)을 받게 되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상상을 초월하는 상륙작전을 감행해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시 재혼해서 아들을 얻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위한 기도문을 작성하기도 한다. 늘그막에 얻었던 아들은 무척이나 애지중지(愛之重之)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한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가 차를 몰고 가던 중에 무장 강도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강도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를 때려눕히고 40달러가 든 지갑을 빼앗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결코 내 지갑에는 손을 못 댄다.” 그가 어떤 부대에서 얘기를 하는데 그곳은 자신이 유럽에서 전쟁을 치를 때의 그 부대였다. 그러고 얘기를 하다 보니 그 강도는 그때 그 부대의 부대원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마자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그는 가끔씩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었는데 그러면 참모 등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는 것이다. 거의 철모 등은 쓰지 않았으며 캡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국민적 인기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도 그가 참모로 데리고 있있던 부하였고 필리핀에서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꾸준히 그를 라이벌로 알고 상당히 경계를 했었던 듯하다. 그는 군사적으로 훌륭한 전략가였으며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장군의 전형이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담배에 있어서는 상당한 애호가였다. 우스갯소리에 이런 것이 있다. 인천 상륙작전을 하고 인천앞바다에 내렸을 때 장군의 첫마디는 무엇이었을까. ‘돌격 앞으로’라는 등의 명령이 아니라 파이프를 입에 물고서 부관에게 ‘담뱃불을 붙여라’ 라는 것이었다는 후문이 있다. 일본군의 속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장단점도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부친이 젊은 날에 동남아 일대를 섭렵(涉獵)하게 한 것도 전투를 수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자신을 운명의 인간이라고 여겼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결코 자신은 어떤 상황 어떤 전투에서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신념으로 확고했다.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면 능히 대통령이 되고도 남을 만한 능력과 경륜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대통령께 경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악수를 했던 특이한 이력(履歷)도 소개되고 있었다. 두 번째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정부를 데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그것을 엄마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와 관련되어 있던 나라는 한국, 일본, 필리핀, 호주 등 여러 나라가 있었다. 일본군은 점령군 사령관으로 군정을 실시하였고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기도 했었다. 한국은 한국전쟁에서 공적이 있었고 필리핀은 제2의 고향이라 할 정도로 애정이 깊었던 곳이었다. 호주는 필리핀에서 후퇴해서 새롭게 필리핀을 탈환할 때까지 머무른 곳이었다. 52년간 군 생활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군인의 전형(典型)이 아니었을까싶다.
그는 의무, 명예, 국가라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이였다. 그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는 무한정이었지만 정적들이나 여타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불호(好不好)가 갈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일대기는 영화로도 77년에 제작되기도 했다. 필리핀에서의 철수에서부터 마지막 한국전의 참전 그리고 마지막 의회에서의 연설 그리고 끝과 시작은 웨스트포인트에서의 연설이었다. 2시간여의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담대(膽大)한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켜나간 오늘날의 미국을 일등국가로 만든 공신에 해당되지 않을까. 미국보다도 필리핀 등 아시아 제국에 더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곳에서도 그는 그를 싫어하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듯하다. 처칠은 항상 그를 최고의 군인으로 치켜세웠고 일생동안 22개의 훈장이라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던 것 같았다.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통해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해낸 최고의 영웅이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의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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