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향을 향한 여정

옹골찬 아내

by 자한형 2023. 3. 22.
728x90

옹골찬 아내

 

 

 

다음해인 199148일에 광주에서 또 다시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한 달여가 지난 4월 하순에 나는 서울 OO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림동으로 이사를 갔다. 방 두 칸에 12평 정도였다. 신축된 빌라로 4층 중 2층이었다. 바로 밑 처제가 OO대 대학원을 다니느라 2년간을 같이 기거(寄居)하기도 했다. 1년여를 아이들을 키우고 나자 일상적인 가사에서 보다 활동적인 일거리를 찾으러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있었는데 OOO방송국 리포트가 되었다. 그래서 간혹 유명인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김창숙의 OO찾기란 프로가 있었는데 영호남 부부편에 출연해서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92년이 되자 내가 본부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93년도에는 과에서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다. 정릉 우이동 계곡에서 일차를 하고는 강남 노래방으로 가서 술자리를 가졌다. 아내가 남편을 대신해서 술을 다 받아마셨다. 대단한 여걸로 명성(名聲)을 날렸다. 그해 9월에 다시 J여중에 복직을 하였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되었다. 2년여가 지난 후에는 OO APT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중고차였지만 차도 한 대 장만을 하였다. 프라이드 베타였는데 5만 킬로를 뛴 것이었다. 가족끼리 설악산을 가기도 했고 강화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98년경에는 둘째 처제네가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처제네는 5층이었다. 같은 과목을 전공했던 남매간이라 사이좋게 잘지냈다. 아내도 J여중에서 거주지 주변의 N여중으로 전근(轉勤)이 되었다.

 

어느 가을날 내 고등학교 동창회가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있었다. 노래경연대회가 벌어졌다. 예선을 통과하고는 최종결승까지 갔다. 단 두 명이 있었다. 한참 선배 되는 분의 아내와의 대결이었다. 그 선배는 부부가 동반해서 나란히 사이좋게 나와 노래를 불렀다. 그럼에도 아내는 홀로 굳세게 혼신의 열창으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불렀다. 결과는 아내의 승리였다. 아내의 당찬 모습을 보여준 한 토막이었다. 수학교사들의 사설단체 수학OO이란 모임에 가입하고 활동을 하였다. 매월 잡지를 발간했었다. 월간잡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중추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OO대학에서 방학기간 동안 대학원을 다녔다. 6학기를 다녔고 3년 정도가 걸렸다. 친정집인 광주에서 순천까지 70킬로를 매일 차를 몰고 왔다갔다 했다. 99년이 되자 큰녀석 승환이가 녹색소년단에 가입을 해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승환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대원은 20여명 정도 되었다. 승용차를 프라이드에서 신형 아반테로 바꾸었다. 5년 만에 바꾼 것이었다. 4월 정도에 입단테스트를 받고는 정식 단원이 되었다 아침마다 6시에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초등학교 교정에서 관악산입구까지 매일 같이 자전거로 왔다 갔다를 계속하면서 체력을 키우고 자전거 타는 요령과 기술을 연마했다. 첫 야외행사로 강화도가 결정되었다. 출발에서 가는 것만 70킬로 정도의 거리였다. 처음으로 먼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갔다 와야 하는 야외 행사여서 무진장 힘들어 했고 날씨도 무척이나 더웠다. L군은 팔을 다쳐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차로 태우고 다녔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었는데 자전거를 타던 녀석들이 무척이나 핀잔을 주었다. 매월마다 휴일에 행사가 있었다. 정신문화연구원, 천진암, 임진각, 지구의 날 행사 등이었다. 여름방학 때에는 전국일주 행사가 있었다. 600여 키로미터를 일주일에 걸쳐 자전거로 주파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 어려운 전국일주를 해낼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있었지만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다. 아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참여를 하였고 막판에는 광주부근에서 제주도까지의 행사에는 친정아버지까지 동참하기도 했었다. 서울에서 일번 국도를 따라 땅끝 마을까지 가고 또 그곳에서 제주로 배를 타고 가서 제주도를 일주하고 비행기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김포공항에 돌아왔을 때에는 모두의 얼굴이 무척이나 새까맣게 타 있었고 아프리카 토인을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자전거 이외에 산행을 하기도 했었는데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기도 하였다. 둘째인 상학이도 3학년인 상태에서 형들과 같이 등반하기도 했다. 다음해인 2000년도에는 상학이가 형을 이어 녹색소년단에 입단을 했다. 3년을 계속해서 했다. 집사람이 1호차에서 선도하며 아이들을 지휘하고 통솔했다. 나는 1호차를 운전했다. 사실상의 모임과 행사를 주도하다시피 했다. 끝나고서는 방송인터뷰도 많았고 여러 신문에 대서특필(大書特筆)되기도 하였다.

 

2001년도에는 내가 교육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두 번째로 주말부부가 된 것이다. 2002년도에는 아반테에서 카니발로 차를 바꾸었다. 큰녀석은 중학생이 되었고 작은 녀석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녹색소년단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요건이 되었다. 차량이 커서 녹색소년단 행사에 아주 유용하게 1호 선두차로 사용되었다. 아내의 근무 학교도 S중학으로 옮겨져 집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2002년도에는 S아파트에서 좀 더 평수가 넓어진 26평형의 D아파트로 옮아갔다. 방이 3칸짜리였다. 그리고 얼마 후 동서가 G시의 교육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는 바람에 처제네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몹시도 아쉬웠고 섭섭하였다. 상학은 막판에 신녹사 대장을 하였고 아내는 후원회 회장이 되었다. 녀석은 5학년 시절에 전교 부회장을 하기도 하였다. 6학년이던 2003년에는 매일아침 커피를 타서 학교로 갖고 갔고 아이들을 지휘하고 독려하였다. 녹색소년단 후원회 회장이 끝나고서 학교장으로부터 학교 명예를 떨친 공로로 감사패를 받기도 하였다. 녹색소년단 2년차 전국행사는 서울에서 홍천을 거쳐 인제로 해서 한계령을 넘어 동해안 해안가를 따라 부산 해운대까지 가는 코스였다. 3년차에는 부산 을숙도에서 출발해서 남해안으로 해서 목포를 경유해서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2004년도에 둘째인 상학은 S중학교로 진학하였고 큰녀석은 Y고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도 2여년의 지방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아내는 S중학에서는 생활지도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상학은 중학3학년 시절에 초청을 받아 백두산투어에 도우미로서 참가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계령을 넘어 속초까지 가는 여정이었고 배로 블라디보스톡을 가서 그곳에서 백두산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미국동부를 보름정도씩 두어 차례 다녀오기도 하였다. 여름방학 때에는 OO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고 연수원에 선생님들의 일정연수에 강사로 불려다니기도 하였다. 2005년이 되자 두 녀석의 보다 나은 공부환경을 위해 서초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작은 녀석은 OO중학에 배정을 받았다. 아내도 S중학교에서 D중학교로 전근되었다. 교무기획을 맡아 엄청 고생스러운 일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전문직을 응시하겠다고 시험 준비를 하게 되었다. 2006년도에는 한번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각종 자격증을 획득하느라 여기저기 자격시험을 응시하고 부수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해결해 놓았다. 그룹을 지어 공부를 했었는데 낙방의 고배(苦杯)를 마셔 몹시도 서운해했다.

 

그리고 2007년이 되었다. 큰아들은 서울OO대 경제학과에 합격하여 대학생이 되었다. 둘째 녀석은 B고등학교로 2007년에 진학을 하였다.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아내는 2월부터 3개월여를 집 앞의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퇴근 후 새벽2시까지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아이들은 내가 다 챙길 수밖에 없었다. 경쟁률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34명이 응시해서 2명을 뽑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노력한 만큼 성과도 있었다. 어려운 경쟁률에서 당당히 전문직시험 합격을 하였다. 방학기간동안 사당동 연수원에서 전문직에 필요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20083월에는 정식발령이 나지 않았다. 교사직을 유지한 채 교육청 파견으로 6개월을 근무하다. 9월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본청 OO과로 발령을 받았다.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매일 퇴근이 11, 12시였다.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다. 나와 같이 서대문으로 출근을 하였다. 퇴근은 각자 해결하였다. 귀가하는 시간이 늦다보니 제대로 고3인 둘째를 제대로 챙길 여지가 없었다. 근무하는 지역이 비슷한 곳이다보니 가끔씩 길거리에 우연찮게 만나기도 하였다. 토요일, 일요일도 하루는 꼭 출근을 해야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전력으로 인한 공과가 인정되어 국가유공자로 정식 인정이 되었다. 의료보험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손가락을 다쳐 입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치료비는 면제되었고 숙박료 등만 내면 되었다. 자식까지 혜택을 볼 수 있었다. 큰 아들은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20089월에 군에 입대를 하였다. 파주 문산쪽 법원리 부근에 포병으로 근무를 하였다. 2010718일에 무사히 2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하였다. 한 서너 차례에 걸쳐서 면회를 갔고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2010년이 되었다. 아내는 J교육청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나도 교육원의 부원장으로 또다시 발령을 받았다 작은 녀석은 K대학교 지방캠퍼스에 입학을 하였다. 네 가족이 모두 다른 곳에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한 녀석은 군복무 중이었고 작은 녀석도 지방에 나도 또 다 른 지방에 있는 형편이었다. 한 가족이 다 모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하반기에는 큰녀석이 전역을 해서 둘이만 생활하는 상황이 되었다. 세 번째 주말부부의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방에서의 생활의 불편함 등으로 인해 자신이 원했던 대로 6개월간의 기숙학원 생활을 거쳤다. 기숙학원에 있는 기간 동안 한 번씩 면회를 가보기도 했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진으로 안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매월 2백만 원씩의 학원비가 소요되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후 수능을 새롭게 쳐서는 2011년에 서울 소재 K대학에 입학을 해서 열심히 다니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세 가족이 합쳐지게 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집은 2007년 말에 일반 분양되던 것이 당첨되어 계약금을 불입하고 중도금을 납부하였다. 3여년에 걸친 아파트입주금 납부가 끝나고 드디어 20109월에 보라매공원 부근의 E-편한세상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서초동 아파트의 계약기간이 남아 입주를 6개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20111월에 입주를 하게 되었다. 이제 결혼생활도 26년이 지났다. 큰아들도 이제는 제대이후 복학하여 철이 들었는지 열심히 공부하려는 의지를 갖고 다니고 있고 집도 입주하여 6개월여가 지나 얼마만큼 안정을 찾게 되었다. 세 식구는 한울타리에서 같이 살고 있고 나만 지방에 있다. 이제는 좀 편안하고 안락한 가운데 여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살림살이도 다 바꿨다. 소파, 세탁기 김치냉장고, 냉장고, 식탁 장식장 등 여러 가지가 이제는 내용 연수가 다 되었다할 만큼 낡아져 있었다. 아직도 아내는 매일 자정 경에 들어오는 고강도의 직장생활을 묵묵히 해나고 있고 매주 토요일에는 초과근무를 해나가고 있다. 2012년이 되어 둘째아들이 군에 입대를 했다. 10월 중순이었다. 본래는 연말에 입대를 하려했는데 일찍 앞당겨졌다. 춘천102보충대로 입영을 해서 훈련을 받고 15사단 수색대에 배치를 받았다. 이제는 8개월정도를 남기고 있고 상병으로 진급도 했다. 휴가도 두어 차례 나왔다. 얼마전 휴일에는 부부가 작은아들 면회도 다녀왔다. 제법 어른이 되어가는 듯 여겨졌다. 큰아들은 보험계리사 시험에 응시를 해서 1차에 합격을 했다. 2013년도에 2차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한 학기를 완전히 휴학을 해서 학교 앞에 방을 얻어놓고 숙식을 하며 공부에 매달렸다. 8월말에 시험이 있었다. 10월말 발표가 되었다. 141명만이 합격하는 시험에 합격이 되었다. 집사람은 이제 다시 본청으로 근무지가 옮겨오게 되었다. 20125월에 연수원에서 교감연수도 수료해서 자격은 다 갖추어 놓은 상황이 되었다. 내후년 정도면 교감으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다.

 

이제는 얼마만큼 궤도에 오른 삶이기 때문에 웬 만큼의 고난이 와도 합심해서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을 쌓아놓은 것이 아닌가 자조해본다. 오랫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생활해온 아내와 가족에게 깊은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면서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번 해본다. 옹골찬 아내 덕에 우리가족 네식구는 모두 편안하게 잘 생활하고 있고 활력넘치게 생활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항상 옹골찬 아내의 매혹적 향기가 집안 가득 퍼지기를 기대한다. 우리가족 네 식구가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그리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벅차오르는 희망과 꿈을 안고서 바쁘게 살아간다.

 

 

 

 

'심향을 향한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0) 2023.03.22
위장병 다스리기  (2) 2023.03.22
여자  (0) 2023.03.22
암의 해법  (0) 2023.03.22
정봉길에서의 단면과 이면  (0) 202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