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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을 향한 여정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by 자한형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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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백화난만(百花爛漫)한 봄날에 멀리 광주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봄이었고 상춘객(賞春客)들로 도로는 몸살을 앓는 듯 보였다. 자동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신록의 푸르름이 사방에 펼쳐지고 있었다. 봄꽃들은 이미 한차례 전성기를 지냈고 새로운 잎들이 서로 시샘하듯 그 자태를 뽐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어제 전화로 연락을 하니 흔쾌히 시간을 할애(割愛)하면서 그 친구에게서 문자가 유붕자원방래면 불역락호(有朋自願訪來 不易樂好)라고 왔다. 이 말은 논어의 학이편(學而編)에 나오는 글로 너무나 유명한 경귀(驚句)였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어찌 즐겁지 않을 것인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랫동안 기대했던 바였었고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달려간 것이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오후 일정도 골프를 하는 것으로 잡혀있었다. 오후 6시경에 한적한 음식점인 섬진강에서 해후(邂逅)했다. 28년만의 만남이었다. 초급장교로서 군 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였고 나는 말년을 맞이하고 있던 때였다. 친구는 결혼을 한 상태였고 바쁘게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했었다. 부인되는 이가 교직에 종사하고 있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것 같았다. 얼마 후에는 신접살림을 차렸던 터였다. 87년도에 후방으로 전출되었고 88년에 전역을 하고 여수에서 의사로서의 필수코스였던 인턴, 레지던트를 받은 후에 개업을 했다고 한다. ‘98년쯤에 광주로 올라와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 당시의 대대장 그리고 그 다음번 대대장까지 모시다가 전출이 되었고 전역 후에도 서로 간에 연락을 주고받았단다. 같이 근무했던 이들간에 모임을 가끔 하기도 했다고 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추억담을 나누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시내의 한 장소로 옮겼다. 그곳에는 모임의 집결지 같아 보였다.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이용료 내지 회비를 내는 것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2층에 차나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되어져 있었고 3층은 회원의 작품들이 전시되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친구는 딸 둘을 두었고 막내로 아들이 있는데 고2라고 했다. 큰딸은 서울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광주에서 인턴을 밟고 있는 모양이었다. 작은 딸은 26세로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직접 운영하고 있는 아동병원은 규모가 상당한 듯했다. 종업원 전체를 합하면 100여명이 되는 대규모였다. 친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손아래 동서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여서 동서도 같이 합석을 하게 되었다. 차도 최고급으로 외제차를 몰고 다녔고 지역 내의 의사협회 부회장이라는 직함도 있었으며 골프회원권도 가지고 있을 정도였으니 큰 성공을 이룬 듯했다. 이렇게 해서 28년만의 해후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끝이 나고 말았다. 밤새워 토론하고 젊은 열정을 불태웠던 옛 생각이 아련해졌다. 그 시절에도 대대장과 가끔씩 바둑을 두기도 했다. 급수가 한 수위여서 신경을 좀 쓰면 이기고 그냥 막 두게 되면 지는 편이었다고 했다. 연대 군의관의 의술에 감동을 받은 눈치를 보이기도 했었다. 한 중대장은 갓 결혼해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부인에게 하소연하는 전화를 자주하기도 했었다고 했다. 한번은 행군을 하는 부대에 앰뷸런스 차량이 지원되지 않은 적이 있었다. 먼 거리의 행군이었는데 군의관 혼자서 그 먼 길을 꿋꿋이 걸어오기도 하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 당시 논쟁의 이슈는 그런 것이었다. 한 친구가 명문대학 법대를 나오고 고시를 패스해서 명문가의 부인을 맞이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라는 것이었다. 군의관의 주장은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속물적이라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는 논지였다. 반면에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서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다면 향후의 앞날의 출세를 위해서 재벌가든 명망가든 그렇게 조건에 맞는 결혼을 하는 것도 현실적일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사랑도 없고 애정도 없는 상태에서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파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가 주장했던 바는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해서 성취를 이루었다면 그렇게 조건 좋은 여자를 맞이하는 게 향후의 생에 있어서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좀 더 나은 상황에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면 제대로 된 더 높은 성취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더 좋은 방향으로 도움이 된다면 보다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떤 명목이었던 간에 별로 설득력을 가지긴 힘든 논리였다. 아무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게 자신의 논리를 목청껏 주장하며 젊은 혈기를 발산하기도 했었다. 임상 경험이 없는 상태였기에 여러 가지 애로도 많았고 많은 경험을 축적해 향후의 의사생활에 밑거름이 되는 진료경험을 쌓는 기회가 되기도 했으며 조직생활을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와 처세를 익히는 데도 군 생활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충분히 공부를 하고 전문의로서 입대를 하는 것도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는 자책도 있었다. 햇병아리 시절의 의사였으니 전문의가 하늘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리라. 이제는 흰머리도 희끗희끗했고 중년 티가 나고 있었다. 조만간에 사위를 보게 된다면 할아버지가 곧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항상 환자에 대해 친절하고 따뜻한 응대를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 시절에는 의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터였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귀경길도 길이 막혀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해후(邂逅)였기에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성현 공자가 논어의 첫마디에서 때때로 익히고 배우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로 어느 학자는 정말 평범한 말인데 그것이 첫 말씀으로는 지나치게 평범하다 생각했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딱 들어맞는 말이 없었고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경구였다는 회한을 토로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거인의 말씀이고 오래된 얘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고 여겨진다. 앞으로도 그 친구가 계속 승승장구(乘勝長驅)하고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훌륭한 의사로 모든 이 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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