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여경의 홍역관
한국사에 한창 이름을 날리던 역관(譯官)이 한사람 있었다. 조선 중기쯤에 중국의 연경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연경으로 가는 중에 중간 기착지인 통주에 하루 머무르게 되었다. 저녁 무렵에 청루(靑樓)에 들러 여자를 불렀다. 그런데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300금이라고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200금은 현금이고 100금은 인삼이다. 인삼은 이것을 팔아야 현금화가 된다. 아무튼 그것으로 대금을 치르고 여자를 불렀다. 술자리에 나온 이는 기이하게도 소복(素服)차림에 가냘픈 소녀였다. 이팔청춘 16세라고 한다. 아비가 남경의 호부시랑을 지낸 유개하란 이로 이곳으로 전근이 되었는데 공금횡령으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옥사(獄死)하게 되었단다. 그로인해 모친마저 병사하게 되어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장사(葬事)치를 비용도 없는 처지라서 이렇게 몸을 팔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외국인 신분으로 고위직의 딸을 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만 물러가겠다고 했단다. 굳이 이름을 묻는 터여서 하는 수없이 홍역관이라고만 알려주었다. 본래 이름 홍순언이라고 했다. 평소에도 의(義)로운 이로 이름이 높았다. 비록 중인 출신의 역관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애를 쓴 것이 제대로 공을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통역관의 신분으로 공금을 횡령해서 여자 몸값을 치러 주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홍역관은 귀국해서 공금을 횡령한 죄로 인해 옥고(獄苦)를 치렀다. 그런데 그 여자는 유개하의 딸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석성(石星)이라는 이에게 하직인사를 하러갔는데 가서 보니 부인이 병마를 앓고 있었다. 그래서 병수발을 들게 되었다. 유처자의 지극한 정성도 소용이 없었는지 부인은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친구의 딸이 정성스럽게 병 수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석성은 그녀를 계비(繼妃)로 삼았다. 그녀는 매일매일 비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에 보은단(報恩緞)이라는 글자를 수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사연이 있다는 것이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다. 홍역관이 다시 복권이 되어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1584년에 종계변무사 지천 황정욱을 따라서 통역관으로 가게 된 사연은 이런 사정이 얽혀 있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200여 년 동안 종계변무(宗系辨誣)라는 것이 있어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대명회전, 실록 등에 등재되어 있어 이를 제대로 이자춘의 아들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 사신의 임무였고 최후통첩(最後通牒)인 셈으로 이번에 그것을 해결해오지 못하면 목숨을 버려야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임무를 띠고 홍역관이 중국에 당도했다. 드디어 석성 내외의 입장에서는 은인이었던 이였고 기다리고 기다리며 학수고대(鶴首苦待)했던 홍역관이 온 것이었다. 석성의 부인은 내외간에 나와 홍역관에게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제야 결초보은(結草報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종계변무건도 하필 석성이 예부 시랑(외무부 차관)이어서 어렵지 않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비단 100필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목숨이 달아날 뻔한 건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고 종계변무를 해결한 그는 공훈을 인정받아 광국공신 2등 당릉군으로 봉해지게 되었다. 공금횡령으로 옥고까지 치룬 적선의 공이 이제야 보답을 받은 것이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이번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국은 전쟁으로 인해 전장화 되고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해전에서는 이순신장군이 있어 나라를 구해 내고 있었지만 육지에서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려나게 되고 있었다. 긴급히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홍역관이 가게 되었다. 이제 석성은 병부상서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명나라의 원군은 쉽사리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홍역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휘날리게 된 셈이 되었다. 이런 것을 일러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선을 쌓고 덕을 쌓은 집에는 언제나 기쁨이 넘친다는 뜻이다. 한사람의 적선이 두고두고 나라의 큰일을 해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되게 되었던 것이다. 임란이 끝나던 해인 1592년에 홍역관도 세상을 뜨게 된다. 이러한 홍역관의 얘기는 소설로도 각색되어 이장백전의 근간(根幹)이 되기도 한다. 이후 석성은 명의 국력이 쇠퇴하게 되자 조선 원군이 국력쇠약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유 즉 막대한 군비소모의 책임으로 인해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렇게 곤욕을 치루는 가운데서도 조선에서는 제대로의 변호(辯護)도 하지 않은 부분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조선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는데 위기에 처해지고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게 되는 상황이 되자 다들 나 몰라라 하고 내팽개쳐진 꼴이 되었다. 결국 석성은 옥사를 하게 되고 부인과 아들은 조선으로 떠나게 된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황해도 해주였다. 그리고 그 아들이 해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외 둘째아들은 아래쪽으로 뱃길로 이주해서 경북 성주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성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홍역관은 본래는 서자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어를 공부해서 역관으로 이름을 드높이 날리는 훌륭한 업적을 이뤄낸 것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삼백금을 날린 이로 호도될 수 있었던 어려움도 있었으나 그것이 나중에는 더 큰 보은과 화답으로 길이길이 빛나는 공훈(功勳)을 세울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남양 홍씨로 가문을 빛낸 이였으나 1920년대에 이르러 겨우 그의 공적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인보선생께서 백방으로 노력해서 그의 행적 등이 소상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선여경(積善餘慶)은 항상 명심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에서 기쁨을 가져오게 된는 부분일 것이다. 3대의 적선은 남향집을 얻게 해준다고도 한다. 언제나 인간사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하고 선을 쌓은 이에게 복락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준 멋진 전설 같은 얘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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