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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을 향한 여정

자한의 일상사

by 자한형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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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의 일상사

 

 

어린시절. 대학시절. 입영생활. 직장생활 1,2,3,4,5,6

(1959-78) (78-83) (83-86) (86-91)(91-95)(96-00)(00-05)(06-10)(11- 13)

 

어린시절(1959-1978)

제법 오랜 예전시절의 얘기를 하자니 참 쑥스럽고 감회가 새로워진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해서 지난 19년간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얘기가 있지만 부모님을 중심으로 태어나던 때의 상황을 얘기해 볼까한다. 아버지 쪽은 32녀 중 막내셨고 모친도 33녀 형제자매 중 막내셨다 부친은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에 사셨고 모친은 의령군 용덕면 가락리에 사셨다. 두 분이 맺어지게 된 사연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모친의 큰 오빠였던 분이 갑을에 문상을 가게 되었다. 그곳은 부인의 친정이었고 서로간의 속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는 두 집안 간 약조가 되었고 결혼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20살의 떠꺼머리총각과 18세 시골처녀로서 말이다. 부친은 8살의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상황에서 많은 형제들 속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어머니에겐 5년간의 동서시집살이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고생스러워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때는 음력으로 1959122117:00경이었다고 한다. 겨울철의 맑은 날씨에 오후 늦은 시각에 경남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256번지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한집에 살던 종갓집에서도 아들을 바랐으나 그렇게 고대하고 희망하던 애가 3개월이 지나면 곧 태어날 예정이었다. 군대에 간 아버지도 없는 상황에서 집에서 태어났다. 대가족의 식구가 힘들게 삶을 살아가던 때였다. 모친은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가족의 식구는 12명이었다. 할아버지, 백부, 백모 둘, 딸 넷, 모친 등이었다. 곧이어 3월에는 장손이 태어났다. 모두의 관심은 장손에게 쏠렸고 모친은 백모의 모자라는 젖을 보충해주기 위해 유모의 노릇도 할 수 밖에 없었다. 네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은 그야말로 두 분만 서로 의지한 채 부산행을 감행하였다. 버스로 함안 군복까지 오셔서는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왔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생전처음 타는 열차에서 심하게 멀미를 하였다. 부산에는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고모 두 분이 살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조그만 슈퍼 같은 가게라 할 수 있지만 그 시절로 보면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작은 고모네 집 부근에 사글세 집을 얻었다. 처음에는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작업을 해서는 납품하는 일을 하였다 부산에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런 속에서도 단칸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객식구가 또 있었다. 사돈네의 고학생이었다. 몇 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정착을 하게 되었고 2년여가 지나자 고모네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멍가게 같은 것을 하였다. 부친은 고모처럼 중앙시장이란 곳에 나가 포목장사를 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남동생이 태어났다. 식구는 계속 늘어났음에도 생활은 고만고만했다. 집 위쪽에 산등성이 등에는 밭을 일구어 고구마, 감자 등을 심어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집터를 만들고 직접 블로크를 찍어 만들어서 집을 지었다. 방 두칸 자리였고 다락방도 부엌위에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 지도 5년이 지났다. 막내 녀석이 태어났고 아주 튼튼해서 우량아선발대회를 나가니 어쩌니 할 정도로 우량했다. 드디어 큰아들이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66년이었다. 한참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고 요원의 불길처럼 경제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학교는 제법 먼 곳에 있었다. 입학식에 부모님이 같이 가고 하는 것은 사치였다. 학교가 불타는 바람에 군용 텐트 속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은 여선생님으로 1학년 1반이었다. 옥수수식빵을 배급으로 주었다. 하나만 먹어도 요기가 될 만하였다. 150원이 월사금이었다. 월사금을 내면 빵을 하나씩 배급받을 수 있었다. 유리병에 든 우유도 있었다. 월사금 1년 치를 한꺼번에 다 낸 녀석은 12개의 빵을 한꺼번에 받아갔다. 이것은 동급생간에 커다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급장은 김oo 이란 녀석이었다. 2학년 때에도 1반이었고 계속 같은 담임선생님이었다. 한번은 책값을 잃어버려 혼찌검이 나기도 했다. 2학년이 지나자 반장은 사립학교로 전학을 갔다. 다른 사립학교는 배정초등학교였다. 학교까지는 10리 정도 되었던 것 같다. 3학년이 되자 6반이 되었고 담임선생님도 조선규란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좀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는 듯하였다. 4학년이 되자 또 6반이 되었다. 담임은 이수인이라는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체육부도 맡고 있었고 엄청 무서웠다. 처음으로 손oo이라는 녀석을 알게 되었고 같이 과외를 받기도 했다. 6개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부산공전에 다니다 군대 가기 위해 잠깐 쉬고 있던 학생이 과외를 맡아주었다. 공부에 취미를 붙였고 신나게 공부하였다. 음악과 체육을 제외하고 전부 였다. 2학기가 되어 그분이 군대로 가고 나자 성적은 예전 같지 않았다. 5학년 때에는 5반이었고 허경영 선생님이었다. 계속 과외를 받았지만 예전과 같은 성적은 기대할 수 없었다. 6학년 때에는 5반이었고 김석원 선생님이었다. 장티푸스를 앓아 머리가 벗겨진 분이었다. 그 시절에 6학년 1반 담임선생님이 항상 볶음밥을 시켜 먹었는데 그게 참 맛있어보였다. 좀 커서 그것을 비빔밥인줄 알고 시켰는데 엉뚱하게 다른 것이 나와 그래서 그것이 비빔밥이 아니고 볶음밥 인줄을 알았다. 3학년 때는 교내에서 그린 그림이 호평을 받아 소방차 등을 그리는 불조심관련 사생대회에 나가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며 축구, 야구 등 운동장에서 뛰어 놀면서 지냈다. 한번은 어린 시절에 시골고향을 갔다. 83번 버스를 타는데 멋모르고 홀로 탔다가 종점까지 가게 되었다. 종점부근에는 버스터미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쪽을 지나가다 얼마 전에 방세를 떼어먹고 도망친 사람 비슷한 사람을 보고는 쫒아가기도 했다. 결국은 파출소로 가서 앉아 있었는데 다행히 부모님이 찾아왔다. 1학년 때쯤 해서는 다섯 살 많은 형님이 내려왔다. 부산에 있는 중학교에 시험을 치기 위해서였다. 부산중학을 쳤다가 떨어지고는 K중학에 입학하였고 같이 지내게 되었다. 다락방에서 생활하였다. 한번은 부모님이 모두 고향을 가시고 둘이 남게 된 때가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화투를 배웠다. 여러 가지 종류로 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여름철에는 인근 바닷가로 놀러가기도 했고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다. 주인공으로 남진이 나온 영화였던 것 같았다. 입으로 안개를 내뿜는 장면이 있었는데 밥에 나오는 김으로 흉내를 내기도 했다. 대연국민학교를 25회로 졸업하였다. 4학년부터 6학년까지 개근상을 탔다. 그 당시 학교에는 야구부가 만들어졌다. 한해 후배인 양OO 이라는 얘가 있었는데 대단한 투수로 성장하였고 프로야구코치까지 되었다. 항도병설국민학교가 있었는데 대단한 라이벌이었다. 대부분의 야구부원은 부산중학교로 진학했고 양00은 동성중학으로 진학하였다. 6학년 때에는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다. 불국사, 첨성대, 석굴암, 포석정, 등을 둘러보았고 흥겨운 한때를 보냈다. 봄가을마다 소풍을 갔으며 기쁜 마음에 밤잠을 설쳤다. 용돈으로 받는 것은 겨우 하루 10원 정도였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있는 리어카 호떡집에서 호떡을 사먹는 것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낙이었고 추억이었다. 나폴레옹과 사과 장수 얘기가 생각난다. 나폴레옹이 청년장교 후보생인 시절 사과 장수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돈이 없는 나폴레옹은 항상 할머니를 물끄러미 보았고 할머니는 사과를 하나씩 줘 먹게 하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훌륭하게 성장이후 할머니 앞에 나타났다. “할머니 예전에 매일 공짜로 사과를 얻어먹던 사람을 기억하십니까.”그러니까 나폴레옹황제는 결코 사과를 거저먹지 않았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황제는 자기 모습이 담긴 금화를 한 움큼 사과 장수에게 전해주었다는 보은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시제도가 없어지고 번호를 받아 학교를 배정받았다 3번을 뽑았다 아주 공교롭게도 부산중학교로 배정받았다 학교이름은 초량중학교로 바뀌었다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가야했다 버스비는 입석은 10원이었고 좌석은 20원이었다.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 짐짝이었고 파김치가 된 상태로 등교하였다. 학교를 걸어만 다니다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차를 타야하니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사촌형은 가족전체가 이주하는 바람에 자기네 집으로 가게 되었고 이종사촌 누님이 내려오게 되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00군은 수영중학으로 배정받았다 명문중학이라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았다. 바로 옆에 부산고가 있었고 드물게 강당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야구부도 명문이었고 전통을 자랑하였다. 1학년 때는 10반이었고, 2학년 때는 5, 3학년 때에는 8반이었다. 일학년 담임은 국어였고 박순도 선생님이었으며 2학년 때는 이행남 선생으로 국사 선생님이었고 3학년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학년 때에는 수학을 2번연속해서 만점을 받기도 하였다. 1학년 때에는 미술을 연속2번 만점을 받기도 했다. 2학년 때에는 전국체전이 부산에서 열렸다. 본 개막식전 리허설에 가서 관람하는 것에 초청이 되었다. 한반에 한명씩 제일 모범되는 이가 초청되었는데 선발이 되었다. 마스게임 카드섹션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했고 감개무량했다. 2학년 때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충남의 아산 현충사도 들렀다. 처음으로 서울을 갔고 지하철도 구경을 했다. 창경원,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2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옆집 친구의 소개로 여름 성경학교라는 곳에 가게 되어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기독교침례회였고 노세백이라는 목사분이었다. 평화봉사단으로 온 원어민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기도 했고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2까지 3년 정도를 다녔다. 일요일뿐만 아니라 수요일에 가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공작반이란 곳에 가입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톱질 망치질을 배웠고 나중에는 목각을 하게 되었다. 왼쪽손가락을 베기도 했다. 경연 대회에 나가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졸업할 때는 공로상을 받았다. 공작반의 후계자 문제로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 얼마 전 고향에 갔는데 예술마을이라는 곳이 있었다. 문을 닫은 폐교를 개량해 만든 것이었는데 그곳에 그 때 미술부장을 했던 김00군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항상 누구로 내 뒤를 잇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고민되어 중3때에는 성적이 상당히 떨어졌다. 중학시절에는 집에 외사촌 형이 숙식을 하며 공장에 다녔다. 중학 2학년시절에는 처음으로 바둑을 접하게 되었다. 동네 초입에 이발소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평상을 하나 놓아두었는데 그곳이 바둑을 두는 곳이었다. 바둑은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항상 방당 100원의 내기가 벌어졌다. 만방이면 1000원이 날아갔다. 처음 바둑을 접해 제대로 바둑을 모르던 초보자가 20만원을 잃고 나서 5급이 됐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일수불퇴였고 훈수도 할 수 없었다. 학교만 파하면 한동안 그곳에 들러 관전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급수로 13급쯤 되었을까 제법 둔다고 오만방자해져 있을 때였다. 상당한 고수라고 여겨지는 2급이라고 하는 분이 왔다. 바둑급수로 고수였고 하늘같은 분과의 대국기회가 잡혀졌다. 접바둑 13점이었다. 승패는 정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었다. 만방패였다. 나중에 보니 반상의 대부분이 다 죽어있었다. 정말 창피해 얼굴을 둘 수가 없었다. 바둑에서 막상 시합을 하면 웬만해서 지지 않았다. 동네 2~3년 연배의 형들에게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상대해 왔었고 그들과 대등하게 겨루었는데 이렇게 무참하게 패하고 만 것이었다. 여름 내내 주야장천(晝夜長川) 바둑에 몰두하였다. 거의 5급 정도 수준까지 간 것 같았다. 간혹 가다 이모부가 일본에서 오셔서 바둑을 두었는데 초장에는 몇 판 이겼으나 뒤로 갈수록 뒷심이 부족했다. 어르신하고 앉아두니 맛있는 것들을 많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1978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다. 00이라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바둑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바로 기원으로 갔다. 그래서 한판 겨루었는데 결과는 빅이 나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또 한 번은 선배 한 사람과 바둑을 두게 되었다. 3판을 연속해서 졌다. 계속 두자고 해서는 4판을 이겨버렸다. 끝나고 나니 밤을 꼬박 새운 뒤였다. 예전의 중학교 때 맞수였던 사람을 5-6년 후 만났더니 이미 1급 수준이었다. 당할 재간이 없었다. 군대를 가서는 중대장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어서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었다. 이길 때까지 계속 둘 수밖에 없었다. 막판에는 결국 패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말았다. 직장생활을 하는 중에도 한번 바둑을 둘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인품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요즘은 대부분 인터넷바둑을 즐기는 모양인데 직접 대면해서 즐기는 만큼은 안 되는 것 같았다. 오로바둑에 2단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다. 개중에는 양심 불량인 이들이 많아 불쾌감이 치밀어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분명히 패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랑 접속을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떤 분들은 주말이면 한번씩 5000원씩을 걸고 바둑을 두다보면 하루가 금방 가버린다고도 한다. 바둑에 있어서는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지만 다른 한 분야인 장기는 그렇게 잘되지 않는 것 같았다.

부친의 장기실력은 대단했다.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번번이 지고 나서 화장실가서 어린마음에 눈물을 훔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잘 두진 않았지만 두기만 하면 패했던 기억밖에 없는 듯하다. 고스톱 등 화투를 잘하진 않았지만 장기에는 세월의 연륜이 아주 깊이 묻어났던 것 같다. 중학교를 마치고 졸업식을 할 때에는 부모님이 오셨다. 생활도 얼마만큼 안정된 탓도 있었지만 그런대로 그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찾으신 것 같았다. 식이 끝나고 맛있는 식사도 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겨울 방학 때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영어 등을 배우느라 손00군과 같이 부산대공대 조선공학과 재학생에게서 과외를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부산 제일의 명문으로 갔다. 10번을 뽑았는데 행운이었다. 중학교 친구였던 이00군은 혜광고로 배정받았다. 집과는 더 멀어졌다. 한 시간여를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학교로 올라가는 길도 장난이 아닐 정도였다. 3학년은 저승사자였다. 얼마나 혹독하게 교육을 받았는지 치가 떨릴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운동장 스탠드에서 응원을 배웠다. 몸동작 노래 구호 등 점심시간마다 목이 터져라 응원연습을 했다. 입학하자마자 시험에 공부에 힘에 부쳤다 새로운 것에의 적응이 쉽지 않는 터라 어떻게 3년을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늘같은 선배들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삼자 뱃지를 달고 다니는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사람들은 별종으로 보일만했다. 야구장에서의 기합 등은 명문고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2학년 때에는 불세출의 영웅 최선배 덕에 청룡기 야구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학년1학기까지 학교 적응 기간이었다. 1학년은 5반이었고 강창구라는 영어선생님이 담임이었다. 당신께서 직접 과외를 시켜주었지만 하루가 지나자 정부에서의 과외금지 조치로 더 이상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선생님들은 쟁쟁하신 분들이 많았다. 와세다대를 나오신 분도 있었고 전국제일의 선생님들이었다. 2학년 때에는 10반이었고 박지선 선생님이었다. 또다시 영어선생님이었다. 3학년 때에는 홍성천 선생님이었고 3반이었다. 3년 내 영어선생님만 담임으로 만났다. 3학년 때에는 특별반이랍시고 한 개 반을 선발해서 만들었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다시 똑같은 반으로 편성되었다. 2학년 2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입시준비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심취해 있던 교회도 끊었다. 학교 교실에 늦게까지 남아 밤늦게까지 공부에 열중하였다. 2학년을 마치고 나니 그런대로 성적이 향상되어 있었다. 2학년을 마칠 때쯤에는 탄력이 붙어있었고 자신감도 생겼다. 거의 막차를 타고 다녔는데 어떤 때는 시간이 늦어 학교에서 조방앞까지 밖에 못가서 그곳에서 걸어서 집에까지 가는 바람에 새벽녘에 들어가기도 했다. 자습실에서 공부하는 녀석들을 무지 부러워하였다. 3학년만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2학년 때에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사춘기를 지나 수염도 났고 조숙한 녀석들은 흡연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설악산의 울산바위, 흔들바위 등을 보고 내려왔다. 경포대에도 들렀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놀기도 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제대로 된 방을 하나 배정받았다. 불을 때지 않아 차가웠지만 독자 공간을 갖는 것이 무척 기뻤다. 친구들이 한 번씩 놀러오기도 했다. 공부할 때는 초저녁에는 자고 주로 야심한 시간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잠든 시간에 했다. 3학년이 되자 월요일마다 시험을 치렀다. 학원시험도 있었고 시시각각으로 시험이 있었다. 방학은 일주일이 주어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학교를 나갔다. 강행군이었고 힘든 나날들이었다. 방학이 끝나자 또다시 시험이 치러졌다. 문과에서 10등 이내의 성적이 나왔다. 문과 10명 이과 10명을 뽑아서 장학금을 3만원씩 주었다. 학교를 하루도 안 나온 녀석이 있었는데 성적이 더 좋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때 쯤 해서 사촌동생이 부산으로 내려왔다. 하숙을 하겠다고 했는데 고집을 피워 같이 지내게 되었다. 늦게 돌아오는 수험생활이었기에 큰 지장은 없었으나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예비고사를 치루고 본고사를 치렀다. 졸업을 하고서는 해운대 바닷가로 가서 끝나는 청소년시절에 작별을 고하고 앞으로 전개될 성인시대에 대한 결심을 굳건히 했다. 힘들었고 어려웠었지만 그런대로 순탄하였고 별무리 없었다고 볼 수 있는 인생의 전반기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대학시절 (1978 1983)

대망의 78년 새해가 밝았다. 13일인가에 원서를 썼다. 상당히 무리하니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언질도 있었지만 떨어져도 무방하다는 확답 하에 원서를 넣었다. 17일경에 졸업식이 있었고 13일 경인가에 본고사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특차합격으로 인해 유유자적하게 보내던 이도 있었다. 본고사날에는 택시운전을 했었던 사촌형이 차를 태워주었다. 수험표를 받던 전날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경쟁률은 2:1정도였다. 160명 모집이었다. 법행계열로 계열별 모집이었다. 법학과, 행정학과 정치외교학과 사회복지학과로 나누어지는 형국이었다. 비장한 각오를 안고 시험응시를 했고 끝나고 스티브맥킨 주연의 타워링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제는 발표만 기다리면 되었다. 발표 전날에 연락을 받았다. 교수진 중에 집안사람으로 아는 분이 있어 연락을 해주었다. 다음날 본관벽보에 붙어있는 합격자명단에 수험번호가 있었다. 4613번이었는데 상위권이었다. 입학금이 면제되었다. 그야말로 이제는 목표를 이루었고 성취해낸 것이었다. 부친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00은 인문사회계열에 입학하였다. 이군은 서강대를 쳤는데 떨어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대학생이 된 것이었다. 대학생이라는 것은 엄청난 영예였다. 성인으로서 할 수 있는 금지되었던 모든 것, 술과 담배 다방 기타 모든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했고 자유라고 외칠 만큼 개방에 무제한의 속박에서의 벗어남이 있었다. 입학금은 19만원이었다. 입학식 전에 술과 담배를 처음으로 배웠다. 다방에 앉아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어른이 되었음에 도취되어 있었다. 밤에는 나이트클럽, 고고장 등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었다. 입학도 하기 전에 밀양 영남루에도 놀러가기도 했고 삼랑진 등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유흥지로 알려졌던 을숙도, 에덴공원 등 공부에 시달리느라 해보지 못한 것을 다해볼 요량으로 신나게 노는 것에 빠져 있었다. 입학식이 있었고 신입생환영회도 있었다. 서클에의 가입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갈수 있는 곳이 4군데 정도였다. 라멜(바다), 스왈로우(제비), 슬기정, 등나무 라는 곳이었다. 라멜이란 곳에 가입을 했다. 15명이 가입되었다. 동창들 끼리 모여 다니면서 호방하게 돌아다녔다. 튀김집이나 통술집 등이 주무대였다. 음주 후 과음으로 오바이트도 하면서 술의 위력을 서서히 체득해 갔고 학교 앞 남포동, 서면 등이 주 무대였다. 초기에는 보름정도를 외유하기도 했다. 선배, 동료 등의 집을 찾아다니며 기숙하며 삶의 의미를 대학생활의 진면목을 느껴보고자 치기를 발휘하기도 했다.‘불교학생회라는 서클에도 들어 토요일에는 인근의 절에 가서 예불에 참석하기도 했다. 금정산 밑의 범어사에 놀러가기도 했고 동래산성에 올라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였다. 시대 상황으로는 한참 경제개발계획이 진행 중인 때였고 군부정권의 막바지 시기였으며 아직도 교련과목이 남아있었고 대학생 입영훈련이 있었다. 창원의 39사단에서 군사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서클행사도 많았다. 봄에는 딸기잔치도 있었고 오륜체전도 있었다. 야유회도 있었고 MT도 있었다. 미팅도 했고 여자들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고주망태가 되어 귀가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몰려가기도 했다. 카드등도 배우기도 하였다. 수업이 없는 때에는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기루다라는 게임을 했다. 인생을 논했고 철학을 설파했고 인생의 목표 인간존재의 의미 등에 대하여 개똥철학을 설파했다. 포항 보경사, 언양 내원사, 등 부근의 절에 놀러가기도 했다. 불교학생회에서는 법정스님의 강연을 듣기도 했었다. 경북 청도 운문사에 MT갔던 때에는 산을 올라가는 중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한 여학생이 졸도를 하기도 했다. 야외의 숙영지에서는 꽁치찌개를 끓여먹기도 하였다. 포항 보경사를 놀러가서는 밤새도록 얘기를 하기도 했다. 버스로 내려오는 내내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적도 있었다. 보경사는 세 번 정도 간 듯했다. 세 군데의 폭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수영을 잘못했지만 물속에서 가라앉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입학동기 중에 최고령자는 29세 된 사람도 있었다. 대학을 서너 군데 다니다 군대까지 갔다 온 예비역이었다. 고등학교 8년 선배도 있었다. 여학생도 한명 있었다. 입학한 모두가 다들 대단해 보였다. 학봉정이라는 고시 공부하는 곳이 있었다. 3학년부터 입소가 가능하다고 했다. 법의 개념을 배웠고 정치학, 행정학 등에 대한 기초개념들을 배웠다. 교실을 이동하면서 수업을 하는 것도 생소했고 신입생으로 배워야할 것들이 무척 많았지만 가슴 뿌듯함이 있었다. 서클에는 스타피쉬라는 보컬 밴드까지 있었다. 불가사리의 별칭이었다. 77년도 대학가요제에서 샌드 페이블즈라는 보컬이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떻게라는 노래를 불러 대상을 받았다. 그 다음에는 밀물과 썰물이라는 BNU그룹이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그 이후에는 강변가요제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서클의 14기 멤버가 각각 역할을 분담해서는 드럼도 배우고 기타도 배우고 노래도 해서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1학년기간동안의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간 듯하였다. 술도 많이 먹었던 듯하고 하루해가 너무 짧게 느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포크댄스도 배우고 자유와 젊음을 만끽한 시기였다. 여름 방학기간 중에는 농촌봉사활동으로 통영 앞 섬지역으로 갔다. 이틀인가를 보냈는데 집합시간에 엉뚱한 짓거리를 하다 적발되어 축출되었다. 다른 일이 있었던 마군 등과 같이 중도에 빠져나왔다. 그리고 불교학생회가 주최하는 수련회를 갔다. 40여명 갔었다. 45일 정도였는데 그것이 처음해보는 것이었지만 대단히 유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호남땅을 밟았다. 순천 송광사에서 수련회를 하였다. 1-2학년보다 3-4학년이 더 많았다. 요즘으로 치면 홈스테이라는 것이고 스님생활을 일반인이 체험해 보는 것이었다. 스님용 식기인 바루에 식사를 받아 설거지 해먹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닌 듯했는데 모두들 순조롭게 먹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수련회를 참여한 남자1명 여자1명이 스님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이는 색다르게 삭발을 하고 참여하기도 했다. 효봉스님의 제자라고 했었던 구산스님이라는 노스님이 설법을 하셨고 법정스님과 시인 고은이라는 분이 강연을 해주었다. 외국에서 온 스님들도 일부 보였다. 새벽 330분에 기상하는 그것은 정말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틀을 꼬박 좌선을 하고나니 온 뼈마디가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막판에는 수계를 주었고 법명도 주었다. 철주라고 명명해주었다 호남은 지는 해를 보게 되고 영남은 뜨는 해를 보게 된다. 호남은 문화 예술 쪽으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 나고 영남은 정치 경제 쪽으로 인물이 많다는 얘기도 들었다 고은스님은 일단 승적에 있다가 파계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님들에게는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인이 책을 읽고 계셨는데 그것은 말콤엑스라는 책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아침에 산사를 벗어나 산행을 하였다. 중간에 연못이 있어 그곳에서 완전 자유 상태로 원시그대로 목욕을 했다. 그리고는 조계산을 올라갔다. 그곳에는 쌍향수가 있었다. 정말 멋있게 자란 나무였다. 향나무가 쌍둥이처럼 그렇게 멋있게 나란히 자라고 있었다. 좌선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근본 우주 종교 깨달음 등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이렇게 한해가 가고는 79년이 되었다. 가정적으로는 집을 대연동에서 온천장쪽으로 옮겼다. 완벽하게 가꾸어진 단독주택 2층집이었다. 에어컨도 장착을 할 정도로 경제사정은 나아졌다. 2층 방에서 지냈다. 할아버지께서 얼마간 머물다가 가셨는데 화장실에서 넘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고령이셨던 관계로 회복에 어려움이 있었다. 시골로 옮기셨는데 곧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렀다. 가을에는 고조되는 민주화 열기로 인해 군부의 막바지 모습을 표출시키고 있었다. 10월 부마사태이후 10.26사건이 터졌다. 권부의 핵심이 서거하고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고 학원가는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탱크가 교정을 점령하였고 제대로 강의도 듣지 못한 채 학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12월에는 12.12사태가 일어났고 어수선한 정국은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80년이 되자 10.26이후 찾아왔던 민주화의 호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또다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만 신군부에 의한 정권의 찬탈을 막지는 못했다. 시중에는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그렇게 수순을 밟아가는 신군부정권의 서슬 퍼런 정권 창출에 그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질 못했다. 체육관 선거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창출되었고 세상은 다시 한 번 군부정권에 휘둘리게 되었다. 정치에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는 명분하에 3S 라는 것이 필요했다. 스포츠, 스크린, 섹스였다. 국풍이라는 것으로 해서 바람을 일으켰고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아웅산에서의 사고가 있었고 아까운 인물을 엄청 잃어야 했다. 이후 새로운 기운이 돌기까지는 7년이 필요로 했다. 2학년이후에는 모두들 군을 가는 상황이 되었고 서클 부분도 시들해졌다 2학년 때에는 부전공을 해야 했는데 부전공 대신에 교직과목을 들었다. 전공은 법학으로 했다. 행정학, 정치학 등으로의 유혹이 있었지만 법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제는 노는 쪽도 시들해졌고 복학생들이 열심히 정신 차려 공부하는 모습에 경도되어 도서관 출입도 하게 되었다. 군대 간 녀석들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으며 논산이나 전곡 등으로의 면회를 가기도 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런지 1-2학년 때보다는 그런대로 학점이 좀 나아졌다. 3년쯤을 살다가 부산에 지하철이 생기는 바람에 집이 수용이 되었다. 그리하여 보상금을 받고 다시 또 대연동으로 다시 이사를 갔다. 방이 5개정도 되었다. 정원도 꽤 넓었다. 여동생도 부산대 가정관리학과에 들어왔다. 교직과목이수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차츰 제대로 성적이 나왔다. 사촌여동생이 동아대를 다녔는데 친구를 하나 소개해 줘 교대생을 한 명 알게 되어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고 데이트를 즐겼는데 얼마 후 헤어지고 말았다. 00은 논산에 있었고 박00은 광탄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00은 전방철책에서 민정경찰을 했다. 경계를 서는 철책근무였다. 막판에 단기하사로 차출되어서는 삼청교육대까지 가서 교관내지 조교로 생활하기도 했다. 방학기간동안에는 용궁사라는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사촌동생과 함께 공부했다 혼자 하는 것이라 쉽지 않았다. 공부해야할 분량자체가 엄청났다. 4학년 졸업에 임박해서는 교생실습을 갔다. 사대부속고등학교로 가서 한달간 실습을 했다. 10월경부터는 취업시험 등을 치러 다녔다. 그리고 학사장교에 응시했다. 체력시험을 치르고 와서는 몸살을 앓기도 했다. 다행히 합격이 되어 학사장교로 입영을 하게 되었다. 사립학교였던 D고교에서 선생님으로 오라는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말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집을 읽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접고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입영했다.

 

입영생활

1983. 3.19()에 입대를 했다. 당년 25세 대학을 졸업한지 20여일이 지난 후였다. 그전에 사회 생활을 한 것이라고는 유일무이하게 일주일간 감천 화력발전소에서 엄청난 추위 속에서 일주일간 일해서 49천원을 벌은 것이 전부였다. 전역은 1986630일 월요일이었다. 당년 28세였다. 3년 동안이 아니라 4년 정확하게 39개월 20일 너무 늙어버린 나이만 들어 있었다. 호적상 나이로는 25세밖에 안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28세이니 새로이 학문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와 있었다. 그러면 만 40개월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하며 지내 왔는가. 입대 시 각오는 그랬었다. 모든 이들이 군복무를 마치면 180도 변해있는 사상에 놀랐고 결코 그렇듯 돌변하지는 않으리라. 그 꿈과 이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는 현실감만으로 돌아와 그렇게 맞닥뜨려지는 현실에 아주 밀착되어버리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이다. 어떤 선배는 자기혁명을 위해 삭발을 한 채로 자기각오를 다지는 이도 그는 결국 범부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다. 숱한 경험을 겪고 많은 것을 느끼고 사회에 나갈 수 있는 준비를 완전히 해나갈 수 있으리라 여겼고 얼마만큼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입대할 때의 상황을 회상해보면 이러했다. 부모님의 전송을 받으며 서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천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친은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마음이 짠해왔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3사관학교가 있었던 영천에 도착해서 새롭게 신체검사를 받고 본격적인 군 생활에 들어갔다. 1983. 6.11일까지 아니 그보다 임관하는 순간까지 걱정스러웠다. 과거 전력이 문제였다. 고향 경찰서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집으로부터 떠나올 때의 어머니의 눈물은 아주 가슴 아픈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가족사진을 한 장 가지고 갔다. 그 당시로서는 오로지 부모형제뿐이었다. 어렵고 힘든 상태에서 휴식시간마다 수첩에서 부모형제의 가족사진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고 편지를 읽으며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다. 모든 가혹함과 얼차려를 모두 겪고 경험해보고 싶었다. 역시 군인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가 보았다. 종교는 천주교를 택했다. 성모마리아는 또 다르게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고 고통과 아픔을 감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구대장과 중대장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식당에서 군화 끈이 풀려 뺨을 얻어맞기도 했으며 분열연습 중에 뒤에서 손을 잘 올리지 않다가 중대장에게 적발되어 어떻게 장교가 되려하느냐는 등의 질책과 함께 한참동안 얻어맞기도 했다. 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4주와 8주차에 퇴교자의 탈락이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에 마음을 졸였다. 유격과 행군은 아주 귀중한 군인정신을 심어 주었다. 특박과 파티로 이어지는 임관은 환희에 가득 찬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족들이 자가용을 몰고 왔었다. 그것은 정말 신혼여행을 떠나는 기분 이상의 것이었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 그 자체였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었다. 임관이란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 줄은 몰랐다. 조상님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잠깐 동안의 휴식이 끝난 연후에는 정말 세월 가는 줄 모른 채 지나가버리고 광주 보병학교로 갔다. OBC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영천에서의 교육이 민간인에서 군인으로의 교육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군인으로서 또 다른 교육의 시작이었다. 모든 짐을 꾸려 넣은 더블백을 들고 한참 뛰면서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어느 정도 정상을 되찾았다. 교육장으로의 이동은 항상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꿈같은 생활이었다.(OBC광주보병학교 4개월 교육) 4주후 외출을 나가면서 집사람을 만났고 목포 출신 여자도 만났다. 외박이 되면서 뻔질나게 부산을 들락거린 후에 4개월간의 교육을 끝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유격1주였다. 특수전에 관한 내용으로 도피탈출 때에는 길을 잘못 들어 홍역을 치렀다. 자대배치는 2군단으로 명령을 받았다. 전입동기생은 6명가량이었다. 1대대22대대23대대14대대1명이었다. 서울 청량리에 집결해서 춘천에서 오음리로 가는 고개 배후령을 넘었다. 1014일 목요일이었다. 군목이랑 같이 전입되었다. 한밤에 곧바로 대대로 갔다. 대대 인사과장을 만났다. 이미 정해 놓은 대로 보직을 받았다. 16중대 4소대장이었다. 중대장은 육사33기생이었고 전주고출신이었다. 중대에 들어가 대충 소개를 받은 후에 다음날 신고를 하고 회식을 한다고 화천으로 나갔다. 화천읍내 중심가의 길손식당에서 소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코스모스란 주점에 가서 맥주를 마셨는데 사건이 터졌다. 대대내의 하중사(인사과 경리담당)가 보병 중사에게(7사단) 맞고 있어서 이중위(2소대장)가 손을 좀 봐주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어 코뼈가 내려앉았다고 했다. 헌병을 피해 도망치다가 하수구에 빠져서 눈가가 찢어졌다. 적당한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어제 맥주집으로 가니 모자가 하나 있어 그것을 찾아서 부대로 들어오니 중대는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대부분의 간부들이 헌병대로 끌려간 모양이었다. 곧 육본의 측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난리가 난듯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돌아왔다. 곧 닥칠 측정 때문에 조용히 지나갔다. 24킬로 4시간 속보 행군, 특공훈련 화악산의 34일 측정준비, 준비태세 그런 중에 조중위가 왔다. 구세주를 만난 듯 같이 행동했다. 조중위는 연락장교로 파견 나가 있는 분이었는데 측정에 관련해서 기 보고된 상태였다. 나의 전임으로 군단사령부에 연대의 연락장교로 나가있는 상황이었다. 측정은 특공무술이 걸렸다. 중대원 전원이 벽돌을 깨는데 많은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71명 가운데 20여명이 다쳤다. 측정이 끝나고 허탈해졌다. 일주일 후에 미대통령의 방한으로 전방을 들어갔다. 84129일쯤이었다. 다음날이 명절인 구정이었다. 승암고개를 넘을 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펄펄 넘치는 정열로 다 극복할 수 있었다. 56킬로 정도였는데 고개가 두개나 있어 무척이나 힘든 코스였다. 전방작전이 끝난 연후에는 대부분이 휴가를 갔다. 그것이 끝나자 인근 5대대부대 훈련장에서 용호교육이 있었다. 부교관으로 되어 교관을 보좌하면서 2-3주를 보낸 다음 연대장이 바뀌었다.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기본자세가 강조되고 간부교육이 실시되었고 다시 전방작전을 나갔다. 비무장지대 내에 매복 작전을 들어가니 제법 실감이 났다. ‘내일은 설날입니다.’라고 하는 대남 방송소리가 들렸다. 매복 작전을 끝나고 와서는 스케이트 대회를 하고는 3월에는 대대장이 T.S통제관으로 나가고 제대별 책임제 교육훈련의 일환으로 교관연구실이 만들어지고 한참 임무카드를 정리하였다. 41일에 다시 전방작전을 들어가 1주일간 매복 작전을 하고 나왔다. 5월이 되어서 특공3단계 훈련에 들어갔다. 최초의 체계화된 훈련이었고 제대로 된 전술개념이 도입되었다. 다음의 문제는 천리행군이었다. 과연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그래서 병사들을 한참동안을 맨발로 생활하도록 하였다. 행군코스는 화천 쪽의 구만리를 지나 풍산리에 도착해서 해산을 올랐다. 숙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대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되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대열을 가다듬어 내려왔다. 아침을 해서 먹고 다시 출발했다. 수리봉과 대성산 능선을 넘었다. 복주산을 넘고 화악산을 넘고, 춘천 천마산을 넘어 배후령에 도착해서 아침을 해먹고 산 능선을 탔다. 정중위(1소대장)가 비틀거리며 부축을 받으면서 걸었다. 부대에 도착하니 장병들에게 막걸리가 한 사발씩 주어졌다. 오후 한 시가 다되어서야 도착했다. 천리행군을 마친 것이었다. 해낸 것이었다. 이병장은 진통제를 20알이나 먹으며 고통을 견뎠다고 했다. 6월에는 유격훈련이 있었다. 이중위, 김중위, 이성광이 잘해나갔다. ROTC 20기들이 제대를 코앞에 두고 말년이라 어영부영하다가 대대장으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대대장이 바뀌었다. 연대 작전주임이 왔다. 음어집체며 매복이다 해서 한참 신고를 한다며 연대 , 군단사령부 등을 들락거렸다. 연대에서 집체교육을 했다. 8471일자로 중위진급을 했다. 한층 의젓해졌다. 동기생들 중에 누가 가장 먼저 빠져 나가는가 하는 것이 초점이었다. 만사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8월에는 경기도 가평군 신포리(남이섬)로 수영훈련을 갔다. 김일병이 쓰러지는 바람에 오전 내내 전부대원이 얼차려를 받고 훈련에 들어갔다. 다른 중대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데 말이다. 밤새도록 행군하고 숙영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중대전체에 대하여 중대장이 엄벌을 내린 것이었다. 낙오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일주일간의 수영훈련이 끝나고 난 후에는 을지 포커스가 있었다. 신포리에서 전방철책선까지 행군해 가는 것이었다. 행군막판에 거의 탈수상태가 된 이중위가 혼수상태였으나 좀 쉬고 나자 괜찮아졌다. 낮 동안 자고 다시 부대로 내려왔다. 9월에는 전술기지화라 해서 방호벽 작업이 있었다. 야지에서 잔디를 파와서 방호벽을 쌓아 만드는 작업이었다. 3일 동안의 작업이 장맛비로 무너지자 어이가 없었다. 허탈해졌다. 양구로 가는 길목으로 들락날락 거리며 제법 돈을 썼다. 12월에는 휴가를 출발했다. 첫 휴가는 꿈같이 흘러갔다. 그런 다음은 201특공여단 창설에 따른 인원 차출이 있었고 후속인사로 이중위가 빠져나갈 차례가 왔다. 춘천에 술 마시러 갔다가 감당 못할 사태가 일어났다. 토요일 오후에 나가서는 밤새도록 술을 마신 후에 귀대하니 병사들이 축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바로 좀 쉬어야 하는데 제2소대장이었던 이중위가 축구를 하다가 혼절하는 사태가 있었다. 그리고 병원으로 후송을 갔다. 그것이 끝난 다음 타중대 아이들이 16중대로 왔다. 10월에는 위관장교 전투력 측정이 있었다. 별 탈 없이 준비에 열중하고 있던 차에 공수특전단에 특수전 교육파견명령이 났다. 2대대에 있던 동기생 이중위랑 같이 출발했다. 그때 상황은 잘 풀린 것이었다. 동기생으로 같은 학교출신 백중위를 특전사령부에서 만났다. 만사가 순조로웠다. 독도법과 FDX가 조금 문제였지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사격도 18발을 맞추었다. 외출, 외박은 꼬박 꼬박 7주 동안 주말마다 나갔다. 자주 비행기를 이용했다. 그때는 고공공포감 같은 것은 일지 않았다. 소선배를 한번 찾아갔다가 설선배을 만나기도 했다. 결혼식장이었고 박모라는 국문과 출신과 결혼해 있었다. 책을 제법 읽었다. 발군(일본대하소설)을 읽었고 특전사에서의 점프실력을 겨루는 고공 점프경연 대회를 보았다. 훈련이 거의 끝나고 공백이 있는 날에 밖으로 나가 백중위와 술을 마신 것이 말썽이 되었다. 무단이탈이 되어 문제가 되었다. 중대장에게 늘씬하게 얻어맞았다. 정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크게 대수로울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침에 수료식이 있었다. 진술서를 쓰다가 수료식에 참석했다. 교육 성적이 2등에서 4등으로 하락했다. 집에 주말에 갔다가 부대로 복귀했다. 대대장에게 신고를 하면서 사실대로 얘기했다. 완전군장을 메고 1주일간 보행의 처벌이 내려졌다. 그러던 중에 두 번째 서러움이 북받쳤다. 여자와의 인연을 끊기로 하고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었다. 병사들은 소대측정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고 특공무술 시범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중대장의 이·취임식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를 했다. 1215일에 특공무술 시범을 보이고 20일에 중대장이 바뀌었다. 육사35기였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 얼굴이었다. 인상이 상당히 좋았다. 중대 간부들과 회식을 했다. 전임 중대장은 연대 정보주임으로 발탁되었다. 신년이 되어 성불령을 올라갔고 시무식 행군이 있었다. 작년에는 중대장이 열을 받아 한참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휴가를 일찍 가게 됐다. T/S훈련으로 인한 조기실시였다. 가는 날 부대 스케이트 대회가 있었다. 여자에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삼백만원정도가 문제였으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은 그 후속문제였다. 어찌 보면 충분히 원조할 수 있음에도 너무 괴로워했으며 마지막 올라오는 순간에도 심하게 난감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휴가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날이었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었다. 친구인 권00과 다른 사람 간에 실랑이가 문제였다. 졸지에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파출소까지 가게 되었다. 다음날이 복귀하는 날이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친구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휴가에서 돌아와 간부교육을 들어갔다. 3대대 병사의 사망소식이 있었다. 동계혹한기 훈련중 산 정상에서 동사(凍死)한 모양이었다. 온 연대가 침울해졌다. 교육파견에서 복귀했다. 혹한기 훈련을 나갔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연초에 인사이동이 있었다. 인사참모로 발탁되었다. 여자 친구가 면회를 왔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을 각오하고 그만 끊어야할 그런 것을 느꼈다. 여자의 불행을 얼마만큼 탕감시켜주고 그 우울함을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함에도 아무런 손도 써주지 못하는 것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자학이었고 속수무책에 대한 자신의 무력감, 무능력을 감당해야만 했다. 어떻게 그런 상태에서 실마리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한참동안을 헤맸다. T/S훈련을 나갔다. 군단예비대여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본부중대장을 겸임하고 있어서 중대원들과 같이 지냈다. 16중대를 격려하고 인솔하는 문제로 잠깐 나갔다 왔다. 보름동안을 여자문제와 씨름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끊을 수는 없었지만 멀리 해야만 했다. 그것이 어떠한 불행을 자초하고 어떠한 고통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감내할 것은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아무리 숙고를 거듭해도 어떤 해결 실마리는 없었다. 단지 연락을 두절시키는 것만으로 소극적이나마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 5월이 되자 작전이랑 정보 그리고 교육장교가 발탁되었다. 월말에는 작전이 왔고 취약사병 전투력 측정이 25일에 있었다.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91% 야간 78%였다. 구보가 문제를 발생시켜서 대대장으로부터 기합을 받았다. 박병장은 전역을 일주일 남기고 받았으니 그 고통이야 오죽하랴 싶었다. 포복 앞으로 선착순을 시켰다. 전연대가 형편없었다. 연대장이 전 장교를 집합시켜서 대갈일성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맥주파티가 있었다. 6월에는 육본 전투지휘 검열이 있었다. 그것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상관의 질타는 끊임없었다. 부대대장에게 원복을 간청했다. 그러나 측정은 별 무리 없이 끝났다. 그 중간에 공수훈련을 갔다 왔다. 경기도 마석에서 광주 오포읍 매산리까지는 그렇게 귀가 따갑게 들은 탓인지 별로 그렇게 큰 고통은 없었다. 낙하장에는 학사동기가 있었다. 낙하가 없는 날에는 작업을 했다. 천소위, 유소위, 조중사가 낙하를 위해 나갔다가 왔다. 부대로 복귀할 때는 정말 참으로 힘든 길이었다. 빗속의 행군이었고 힘든 여정이었다. 낙하가 끝난 후에는 권이병이란 녀석이 다리가 부러져 육군병원으로 후송을 갔다. 면목이 없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7월에 특공무술 경연대회를 하고 군단 시범을 보이고는 수영훈련을 출발했다. 6.24일에는 본부중대장을 정보참모에게 넘겼다. 중대장과 같이 걸었다. 사실은 별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으나 홀로 생각하고자 했다. 훈련기간 중에 회식을 한번 하고는 병사들 안전에 유의했다. 특별한 사고는 없었다. 705특공연대와 배구시합도 하고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남이섬에서 부대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 힘이 들었다. 8월에는 위관장교 측정이 있었다. 심과 김이 병기 병참학교로 가버렸다. 홍중위와 김중위도 가고 말았다. 주간 93% 야간 68%가 나왔다. 구보는 그런대로 해냈다. 측정을 끝나고 나서는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을 가서는 10일 동안 은둔지 구축을 하고는 내려왔다. 병사들과 같이 걷고 차를 타지 않았다. 9월이 되어서는 어느만큼 평정을 되찾았다. 유격훈련이 있었고 공수훈련, 체육대회가 실시되었다. 그런다음 연대 체육대회가 실시되었다. 대대별로의 대항전이었다. 결과는 우승이었다. 저력이 있었다. 위대한 승리였다. 추첨은 엉망이었지만 그 단결력과 전투력은 대단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든 녀석들을 안아주고 싶을 만큼 기뻤다. 곧바로 ATT(대대훈련)를 떠났고 또한번 천리행군(千里行軍)을 떠났다. 리더용지프를 탔다. 박카스나 사주면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그것이 끝나자 전투력 측정이니 은거지 구축이니 지휘관 교체로 인한 감찰 등 부대가 바쁘게 돌아갔다. 야간적응 훈련을 하고 하사관 측정을 하고난 다음에는 이취임식, 전역식 등이 있었다. 대대장 생일선물을 해주고 종점집에서 한잔 했다. 야간 적응 훈련때에는 1대대에서 홍병장과 양구고개 정상을 기어올라갔다. 85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연말엔 빙고게임을 주관해서 치렀다. 상품을 준비하였고 병사들 회식, 간부회식, 종무식 등이 모두 순조롭게 끝났다. 대대장의 연대회식 참석을 위해 마패양주를 꺼내느라 PX측과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영위하게 되었다. 연말인 31일에는 이중사랑 화천을 한푼없이 나갔다가 술집 대운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고는 아마존에서 술을 마신다음 연예인에 들렀다 부대로 돌아가기위해 차를 탔는데 차속에는 이중사가 앉아 있었다 참으로 놀랄일이었다. 같은 여관에서 잤음에도 만나질 못한 것이다. S-3(작전참모)를 만나 신년인사를 위한 준비로 화천을 다시 나가서는 갈비와 양념을 사고는 한하사를 데리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 용호리 당구장에서 신나게 당구를 치고는 밤을 새웠다. 대대장집에서 갈비를 먹고는 환담을 나눈 다음 오후에는 13중대장 집에서 놀다가 당구장에서 밤을 새웠다. 그런 다음날 하수도용 밸브 때문에 춘천에 여중사랑 함께 나갔다. 제대로 이틀을 못잔 것이었다. 신병이 전입해 왔다. 7일에는 대대스케이트 대회를 하고는 17일에 연대대회가 있었고 간부교육이 있어서 두 번째로 AOP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두환이랑 같이 받았던 것은 아니고 양중위와 같이 받았다. 간부교육이 끝나고 연대 스케이트 대회는 엉망이었다. 성적이 형편없이 저조했다. 대회가 끝난 연후에는 혹한기 훈련에 들어갔다. 별반의 사고없이 끝이 났다. 전투력 측정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 준비에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측정은 연기되었고 1월말에는 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지는 바람에 앞니가 부러졌다. 101야전병원을 갔다왔다 대대장이 영관 간부교육을 갔다왔다. 그리고 T/S통제관을 나갔다. 별반 특별히 큰 사건은 없었으나 자질구레한 사고가 있었다. 참모들은 구심점이 없었다. 야간적응훈련이 있었고 13중대장의 교체가 있었다. 연대 인사장교로 유중위가 발탁되어 갔고 새로운 주임상사가 왔다. 대대장이 돌아오고 구보를 실시했는데 집합이 엉망이 되어 한방 먹었다. 재물조사 기간에 체육대회를 실시하고(13중대가 우승) 비호훈련을 떠났다. 부대내에 잔류했다.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 사시와 군법무관 시험 응시가 엉망으로 됐기 때문이었다. 319일에 강중사가 사망했고 4.28일에는 영결식이 있었다. 대대 통신하사관이었다. 복막염이 사인이었다. 깡소주를 많이 마셨는데 30세 전후였다. 45일에는 식목행사가 있었고 평정표의 작성이 있었다. 그후에 성금전달식이 있었고 16중대장이 교체됐다. 취약사병 측정이 있었다. 21일에는 집엘 다녀왔고 25일에는 대대를 갔다왔다. 대우에 1차를 합격했다 행시 원서를 접수시켰는데 제대로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과목을 확인했다. 편지를 띄웠는데 수험표가 올지 의문이다. 615일까지 이곳에 있을 작정이다. 그 후 복귀해서 20일부터 29일까지 위로휴가를 면접과 시험 응시를 위해 상신하고는 군생활을 마감할 작정이다. 이제 남은 것은 취직이다. 또한 여러 가지 부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PX 9만원만 해결하면 될 것이다. 별다른 문제는 없다. 치아치료가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시 생각해야할 문제라기보다는 처분만 기다리면 족하리라 생각된다. 가장 큰 실수는 너무 방만하게 처신했고 호인으로만 생활한 것이다. 보다 더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성실하게 한것에 회한이 남는 것이 아니다. 효과음이 제대로 내지 못한 것이다. 또한 자기표현을 못했으며 그냥 속으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속만 태운 것이다. 마지막 2개월을 보복하듯 배신감을 극도로 보상 받을 듯이 하려하질 말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혁신의 계기로 삼도록 해야할 것이다. 배짱좋고 대담하게 노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분히 자기 최선을 다하는 삶 가운데서 보람과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군에서 철저하게 배워간다고 여겨지며 삶의 지혜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해부를 해 볼 수 있었다는 것에 위로를 찾고 웅대하고 담대하게 확신속에서 굳건하게 생활해 나갈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2년반 88년까지 직장생활을 하고 89년과 902년간에 끝을 내야한다. 다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속적으로 해야할 것은 영어라고 할 수 있으며 교양과 지성을 닦아야 한다. 91년 여름에야 모든 것이 결론 지워지고 제대로 사회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그 많은 경비는 얼마나 될 것이며 어떻게 충당될 것인가. 생활비며 학비같은 것이 문제될 것이다. 회사를 휴직할 수는 없을 것이며 계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심과 의지의 작용과 함께 돌진할 수 있는 추진력과 노력이 문제의 초점이다. 결혼은 그 후까지 지연될 수도 있고 그 중간에 치뤄질 수도 있지만 아무튼 2년간 만은 혼자여야한다. 이상으로 앞으로 전개될 모든 것과 당면하고 있는 여러 과제들을 어느만큼은 주관적이고 또한 냉철하게 평가하고 마무리 지었다. 중심을 흔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위치를 올바르게 찾아서 자기생을 가꾸어 가야할 것이다. 고초와 어려움을 감내하고 이겨가는 가운데서 성취와 호연지기를 발휘하고 완성된 인간으로의 질주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결코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형극의 길이고 난감한 목표일지 모르지만 기어코 완수하고 말겠다는 신념아래 열심히 최선을 경주해서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앞날의 전개에 대하여 구상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615일까지 이곳에서 열심히 시험을 준비해야할 것이다. 그 후 복귀해서 20일부터 29일까지 휴가를 갈 생각이다. 면접시험과 시험 응시를 위한 이유를 달고서 말이다. 제대로 가능할 지는 모르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다음 전역을 하고는 얼마간 쉬었다가 장마가 끝난 후에 910일 정도의 여행을 갔다올 예정이다.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를 집중적으로 가볼 계획이다. 이십만원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이 끝나면 연수가 이어지고 직장생활에 입문하게될 것이다. 615일과 20일 사이의 부대정리가 문제가 된다. 첫 번째는 소대원 그리고 본부요원들 그리고 하사관과 그리고 특별하게 이중위와 함께 아파트 신교대장과 술을 한잔하고 싶다. 그런 다음 후배녀석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촉박하게 많은 일을 처리해야할 입장에 놓이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처리를 하고 일요일 쯤에는 춘천을 나가서 짐처리를 해야 한다. 그리고 면세품을 구입해서 보내는 작업도 있어야하고 원서를 써서 보내는 작업도 해야하고 사진과 신분증제출도 있어야할 것이다. 40개월의 변화에 대하여 논평해 보기로 한다. 첫째 신체적 변화다. 영천에서 종아리 내지 장단지에 상처가 생긴 적이 있고 그 후 831015일에 눈가에 상처가 난적이 있었다. 그 후 84923일 경에 대민지원을 나갔다. 벼베기였는데 낫으로 왼쪽 발등을 찍어 5바늘을 꿰메는 상처를 입어 101일에 연대장 표창을 수상할 때까지도 절뚝거린 적이 있었다 86129일 스케이트를 타다가 앞으로 넘어져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춘천병원 외진을 통해 6주간 기브스를 한 후 풀었다. 앞니어서 보기가 아주 흉했다. 510일인가 배앓이를 해서 포도당을 맞았다. 군생활이 마무리되었다.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새롭게 남자로서 생활할 수 있는 자신감과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직장생활 1 (1986-1991)

 

1986630일로 전역을 하였다. 이리저리 직장을 알아보고 시도 하다 최종 결정된 곳은 농협중앙회였다. 필기시험 면접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 한전을 간녀석도 있었고 국민은행을 간 친구도 있었다. 00LG에 있었고 김00는 동서증권에 있었다. 101일 입사였다. 3개월을 쉬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금방 지나가 버렸다. 3백만원의 적금을 탔다. 부모님께 드렸다 이리저리 취업시험을 치러 서울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중간에 광주를 들러 주양을 만났다. 입사하기 전에 1주일은 친절봉사 점검을 하면서 보냈다. 그때 처음으로 H대리 만났는데 온화해 보였다. 한일은행과 농협의 친절도를 비교해서는 점검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입사를 하였고 발령을 받았다. 발령지는 정말 생소한 곳이었다. 통영군지부였다. 충무시와 통영군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미항이었다. 서울에서 임용장을 받고 발령지로 내려갔다. 일단 하숙을 하기로 하고 먼저와 근무하고 있던 Y주임과 같이 기거하게 되었다. 처음 3개월간은 수습기간이었고 회원농협에서 일단 근무를 해야 하였고 수습일지를 써내야 했다. 일주일 정도를 충무농협에서 출납도 해보고 공과금 수납도 해보면서 보냈다. 주산도 놓아야 했는데 어설펐다. 현금을 세는 것도 익숙해져야 했다. 모출납을 여직원이 봤는데 집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끔씩 식사를 하러가기도 하였다. 군지부로 와서는 본격적인 수습업무에 들어갔다. 맨 먼저 맡은 것은 상호금융 업무를 봤다. 시금고와 군 금고를 같이 갖고 있던 관계로 두 명의 직원이 시청 군청으로 갔다가 퇴근시간에 사무실로 와서 마감했다. 여러 가지로 업무에 숙달된 여직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익년도 3월이 되자 업무가 분장되어서 모출납을 맡게 되었다. 입출금을 맞추고 시재를 맞추는 부분이 쉬운 게 아니었다. 과로로 인해 코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매일 매일이 새로웠고 급여일이 지나면 월말이 가까워올수록 퇴근이 늦어졌다. 숙직도 많았다. 주말에는 부산으로 갔다. 충무까지 2시간 내지 3시간정도가 소요되었다. 4월에는 3주간의 초임직원으로서의 소양을 갖추기 위한 교육을 경기도 원당에 소재한 중앙교육원에서 받았다. 교육이 끝난 후에 4.19일에 결혼했다. 신혼여행 후 곧바로 주말부부였다. 어느 경우에는 부산으로 갔고 한 번씩은 고흥으로 갔다. 뱃길로 가는 쾌속선으로 2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육로로는 만만치가 않았다. 충무에서 진주로 일단 가야했고 다음은 진주에서 순천으로 가고 마지막으로 순천에서 다시 고흥으로 들어가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순천에서 또는 진주에서 만나기도 했다. 선임이었던 Y주임의 도움이 절실했고 많은 지도를 받았다. 거제 연초가 고향이었는데 통영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바둑도 상당한 실력이었다. D대학 통계학과 출신이어서 상당히 수리에 밝았다. 전임 모출납을 했던 이는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농협을 퇴직하고 나가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인근이었던 거제에서 어음수표의 교환을 위해 직원들이 매일 왕래했다. 군지부내에 소관 조합이 8개에 달했다. 3개는 도서지역이었다. 조합의 사업계획 승인, 인사 등이 군지부에 맡겨져 있었다. 지부장은 J모씨로 인자하시고 합리적인 분이었다. 차장은 N모씨라는 분이었는데 다음번에는 A모씨, Y모씨라는 분이 전입해왔다. A차장님은 충남예산 출신이었는데 매우 예리했다. 군지부에서1년여의 출납생활이 지나고 판매계로 이동되었다. 조합의 판매사업 실적을 보고해야 했고 부진한 실적을 만회하기 위한 대책보고를 하기도 했다. 해안지방이 되다보니 농산물의 판매실적이 저조했다. 반농반어 조합원들이 많이 있었다. 도서지역인 사량, 욕지, 한산은 판매사업 실적을 올릴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판매사업 실적이 부진하다 보니 지역본부에 주기적으로 대책보고를 해야 했다. 양곡인환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해서 정기 감사시 폐기처분하기도 했다. 만여 장이 되었는데 일련번호 순서대로 정리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2층에서 판매계를 보게 되니 매사가 순조로웠고 여유로웠다. 조합의 지도부장이 한 번씩 방문해서 식사도 같이했고 저녁자리도 있었다. K과장이란분이 계셨는데 대단한 강단을 갖고 있었다. 최근에는 농협을 관두시고는 합천 삼가 쪽에서 한우를 키우면서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주말에는 손님이 넘쳐나서 대만원이었다. 감사기간 중에는 퇴근도 하지 않고 근무하기도 했다. 허리디스크가 있었는데 사주(蛇酒)를 먹고 나았다고 했다. 따님이 경기도 쪽에서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라고도 했다. 한번은 보고 자료를 만들어서 밤늦게 창원의 도지역본부에 직접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88년이 되자 인사이동을 하게 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다. 본부 쪽으로 가려는 희망이 있었으나 수포로 돌아가고 서울지역본부 총무과로 발령이 났다. 입사 이후 6개월 뒤에 C씨가 발령받아왔다. 군대는 동기였고 대학교는 선배였다. 군지부에 같이 근무했던 K모씨 집에 하숙을 하면서 지냈다. 그는 행정학과 출신이었고 행시도 1차까지 합격한 전력이 있었으며 대학원도 수료했다. 부산 남고출신이었다 처음에는 판매계를 맡았다가 임무교대를 했다. 출납과 판매계로 서로 교체했다. 처음 얼마동안 계속 도와주었다. 사회과학을 전공했던 관계로 수리에 밝지 못했다. 업무는 여직원들의 도움이 있었다. 전입고참이었던 Y주임은 전산소로 발령이 나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1~2년 후면 승진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실무교재를 복사한 것을 가지고 올라갔다. 서울 숙대입구에 하숙집을 구했다. 반 지하에 방을 구하고 초창기에는 하숙생활을 했다. 서울지역본부는 종로3가에서 용산한강로로 이전을 앞두고 있었다. 총무과에서 비상계획업무를 맡게 되었다. 6월경에 올라왔는데 8월경에 을지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형 상황판들도 새롭게 만들어야 했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과장님은 학군장교출신이었다. 진도가 고향이었는데 오랫동안 비상계획업무만 맡아 오셨다. 전임직원은 기획부 분회장이었는데 노조에서 동의도 받지 않고 발령을 냈다고 해서는 한동안 농성을 하기도 했다. 한참 나중에는 노조위원장이 되었고 지점장까지도 하셨는데 병이 나서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고 했다. 예비군업무와 을지연습 관련내용이어서 아주 생소한 내용이었다. 시험에 대비해야한다는 핑계로 시골로 내려가는 것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하숙생활을 하다가 친구였던 김00와 의기투합하여 대림동에 방을 한 칸 얻어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이삿짐을 장인어른이 옮겨주었다. 부엌은 좁았다. 보증금이 5백만 원 정도였다. 887월에 큰아들이 태어났다. 며칠이 지난 후에 고흥으로 내려가 산후조리를 도왔다. 출산 1주일 후에는 부산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병원에 있는 기간 중에는 처남댁 될 사람이 간호했다. 처음에 이름을 이상일이라고 지었다. 교직생활을 하는 관계로 아이는 부산의 부모님이 키웠다. 세 명의 가족이 각각 따로 살았다. 고흥으로 한번 내려가면 거의 6-8시간이 소요되었다. 8월이 되어서는 1주일동안 을지연습을 했다. 각과별로 주제발표를 하게 했고 1주일이었지만 그건 최고 바쁜 나날이었다. 야간까지 계속되는 관계로 보통일이 아니었다. 88올림픽이 서울에서 있었다. 엄청나게 국운이 상승되는 듯했다. 서울로 온지 1년여가 지나고 나서 담당과장이 일선으로 나갔다. 서울지역본부의 인원이 줄어들어 예비군 편성이 중대에서 소대로 격하되었다. 무기고도 있었고 카빈 소총도 비치되어 있었다. 비밀 문건도 있었다. 직장예비군을 운영하는 것이었고 직장예비군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군부대를 방문해야 했고 직장예비군 모임에도 참석해야했다. 담당 대리로 김00라는 분이 오셨다. 전주상고 출신이었는데 술을 못 마셨다. 일은 무척이나 꼼꼼하고 치밀하게 하셨다. 89년에는 내내 승진시험 공부에 매달렸다. 실무책자 등 차분히 숙독하면서 실력을 연마해 갔다. 숙직, 당직, 보안 등 업무를 같이 보았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시험을 치르겠다고 시간을 할애해 달라고 하여 교대로 주간, 오후시간이 각각 주어졌다. 연도 말 쯤 해서는 기획부장의 부친상이 있었다. 상가에 가서 23일간을 봉사했다. 충청도 아우내장터 부근이었다. 조문객이 무척이나 많았다. 조화도 많았고 색다른 장례문화를 보았다. 돼지를 6마리 잡았다. 겨울철이라 연탄을 마당에 만들어 훈기를 조성하였다. 뜨끈뜨끈하였다. 음식상을 날라야했고 부조금도 챙겨야 했으며 보통일이 아니었다. 몸살이 날 것 같았다. 서너 명이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상례가 끝나고서는 독립기념관을 들러보고 귀경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모친상을 당했다. 그때 그 멤버가 또다시 가서 두 번째로 장례일을 거들었다. 이번에는 지난번만큼 문상객이 오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코앞에 승진시험이었는데 귀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을 승진 시험은 3월경에 치러졌다. 3월에는 드디어 주말부부에서 해방되는 기회를 맞았다. 집사람이 서울시교육청 소속으로 전근이 된 것이다. 중구에 소재한 장충여중으로 발령을 받았다. 야간 수업담당으로 배정을 받았다. 6시경부터 10시정도까지 수업을 했다. 집을 용산 쪽으로 얻었다. 방이 두 칸짜리였다. 아들도 데리고 왔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겨 키웠다. 승진 시험을 치르고 얼마 있다가 발표가 났는데 다행히 합격했다. 원체 인원을 많이 뽑은 덕이었던 것 같았다. 무척이나 기뻤다. 발령은 6월경에 났다. 주말부부 3년 이후 새롭게 결합된 상황이 3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구한 운명이었던가. 오랫동안 고민 고민 하다가 인사담당 임원을 찾아갔다. 사정을 설명하고 발령취소를 원한다고 했는데 발령취소는 안된다고 해서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인사발령이 나고 1주일 동안 내내 집사람은 눈물바람이었다. 발령지가 제주도였다. 일단은 간단히 짐을 꾸렸다. 남제주군지부 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처음으로 발령받아 제주도에 가니 낯선 이국땅 같았다. 다행히 출납과장은 다른 사람이 맡았다. 책임자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의 출납대리가 예비군 훈련을 갔다. 대직을 하는 기간 중에 중앙회 감사를 받았다. 남제주에는 두 사람이 같이 갔다. 충청도 괴산출신이라고 했다. 맨 처음에는 방을 두개 얻어 같이 생활을 했다. 그는 건국대 출신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이었다. 증평에 근무를 했다고도 했다. 여름방학동안에는 집사람이랑 한 달 동안 같이 생활할 수 있었다. 집사람을 엄청난 설득 끝에 휴직을 하는 것으로 타협안을 찾았다. 얼마 후 방학이 지나고 24평가량의 아파트를 하나 얻었다. 3개 딸린 아담한 2층이었다. 여러 가지 잡무 등을 정리해서 10월에 집사람이 내려왔다.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였고 제대로 된 결혼생활의 시작이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정의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다. 세 명의 식구가 보통 가정의 모습으로 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주말마다 제주의 곳곳을 놀러 다녔다. 유명관광지 등을 돌아다녔고 신혼여행 때 둘러보았던 곳들을 다시 한 번 감상하였다. 제주도로 내려온 20명 가까운 전입동기들은 매월별로 제주와 남제주를 왔다 갔다 하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정담을 나누었다. 휴일이면 승진동기들 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좋은 곳들을 찾아다녔다. 여미지식물원, 용암동굴 등도 다시 탐사하였다. 차량이 없어 불편했지만 대중교통으로 해결하였다. 섬이다 보니 꽉 막혀있고 닫혀있다는 것에 답답함이 있었지만 한정된 공간으로 유수한 관광자원을 가진 곳이어서 남다른 장점도 갖고 있었고 특색도 있었다. 지부장님은 내부적인 부분에만 신경을 쓰라고 말씀해주었다. 2개의 지점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배치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군지부내에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차장님이 있었는데 매일 1시간여를 일찍 나와 낚시를 하고 출근을 하였다. 관광지가 많다보니 먹고 노는 유희문화가 잘 발달이 되어있었고 소비풍조가 강했다. 여자들도 자의식이 강했으며 강단이 있었다. 지역의 특수성으로 사투리가 심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도 있었고 풍속도 육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연도 말에는 남제주 안덕 등지로 회수출장을 나가기도 하였다. 체육행사를 위한 야유회는 밤섬이라는 섬으로 가서 낚시를 했는데 정말 잘 낚였다. 매양 올라오는 것이 노래미였는데 가끔씩 우럭이 낚이기도 하였다. 소주에 바로 회를 쳐서 안주로 먹었는데 바닷가에서의 흥취가 그저 그만이었다. 업적이나 실적은 좋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꾸려져나가고 있었다. 일부직원은 제주시에서 출퇴근을 하였고 대부분은 남제주지역에서 출퇴근하였다. 신년에는 전 직원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였다. 익년도 3월에는 집사람을 친정으로 보냈다. 둘째의 해산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삿짐을 꾸려놓은 채 간명하게 지냈다. 4월말 경에 발령이 났다. 서울지역본부 원효로지점으로 배치되었다. 지점장은 청와대경호실 출신으로 80년에 농협으로 오신 분이었다. 농협생활의 정년을 마지막 1년 남기고 있었다. 처음에 출납 대리를 담당했다. 기능직에서 환직한 직원이 꽤 있었다. 사무업무에 서투르다보니 시재장을 전부 써주어야 했다. 처음 접해보는 사무일이라 힘들어했다. 단순하고 간단한 일만을 처리토록 했다. 신림동에 집을 하나 구했다. 2칸이었지만 새집이었다. 청경으로 근무했던 이가 시골에 갔다가 졸지에 돌아가셨다. 좋지 않은 일들이 꼬리를 물었다. 다음해에는 새로운 지점장이 왔는데 본부로 전근을 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지점에서 같이 근무했던 2층의 총무담당 대리가 집에서 돌연사를 했다는 부고를 받았다. 경고농협모임을 타워호텔에서 했다. 감사를 받기도 했다. 지점에서 생활할 때 체육행사로 치악산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남영동일대에서 많은 곳을 돌아 다녔다. 김정구선생이 나오는 야간업소 황금마차를 가기도 했고 통기타 가수 김00이 기타를 치며 나오는 곳에 가보기도 했다. 점심시간에는 주로 대구탕을 먹기도 했고 용산경찰서 옆의 삼겹살집에서 먹기도 하였다. 한번은 용산역부근의 나이트클럽을 갔다가 사단이 벌어지기도 했다. 용역 기사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만 시비가 붙어 한 놈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 잘못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새로운 지점장님은 만리성이라는 중국집에서 책임자들과 한잔하기도 했다. 한번은 지역본부에서 출제를 담당하라고 해서는 1주일간 꼼짝없이 갇혀 지내기도 하였다.

직장생활 2 (1992-1996)

오랫동안 희망하던 본부근무를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자재부 자재과였다. 부서 내에는 비료과, 농약과, 농기계과, 사료과, 사후봉사과, 유류과 등이 있었는데 그렇게 배치가 되었다. 10명이 전입되었다. 북한산 자락에 가서 신고식을 하였다. 과장은 경북대 농화학과 출신의 K모씨였고 무척이나 강직하였다. 5명의 대리가 있었다. 직원도 한명 있었다. 전년도에 필름과 관련하여 민원이 제기된 적이 있어서 무척이나 어려운 시간을 보낸 이후였다. 대리급으로 3명이 신입으로 전입된 직원이었다. 농업인이 필요로 하는 자재를 구매 공급하는 역할이었다. 농과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법학전공은 희귀하였다. 담당임원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S이사님이었다. 일반자재 중 PE필름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 PC가 보급되는 시절이었다. 하나프로그램과 스프레드 쉬트라는 계산프로그램을 주로 사용하였다. 타이핑만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여직원이 있었으나 PC가 보급되면서 소용이 없어졌다. 차장은 L모씨였다. 정통 자재부출신이 아니어서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 새롭게 각오를 다져야 했고 기안이라든가 기획이 라든가를 배워야 했다. 또한 새로운 분야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는 특수필름 업체들과의 계속적인 협의를 해야 했다. 작은 녀석이 작년에 태어난 관계로 집사람은 집에 있었다. 3년간의 육아휴직기간이었다. 9월이면 끝나는 상태였다. 평안한 생활이었고 의욕이 넘쳤다.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의 술자리가 있었다. 과장이 무척이나 애주가였다. 한번은 12일로 해서는 철원을 갔다 왔다.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밤새도록 놀고 귀가했다. K모대리가 상을 당해 전남 함편을 다녀오기도 했다. 세 사람이나 상을 당한 것 같다. 과장 집에서 한잔하기도 했으며 서무대리였던 K모씨의 집은 매일이다시피 드나들었다. 사모님이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가락공판장에 현장교육이 있었을 때에는 K모 대리집에서 한잔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술을 먹어도 지각 같은 일은 없었다. 다음날 얼굴이 좀 푸석푸석하기는 했다. 팀 내에는 술을 못하는 분도 있었는데 항상 술자리에는 빠지는 형국이 되었다. 본부의 분위기가 직원중심에서 대리로 바뀌어가고 있는 과도기에 있었다. 부장님은 H부장이었다. 이제는 정년을 하였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의욕과 패기가 넘쳤다. 부내에는 사료사업단, 농기계사업단 등이 있었다. 특수필름업무가 준비 중이었는데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 여러 가지 민원과 하자 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검토 자료를 만들라고 했었고 그에 따른 협의를 계속해야 했지만 업계대표들은 상당히 난색을 표하는 상황이었다. 담당과장은 다음해에 비료과장으로 영전해 가셨다. 93년이 되자 새로운 부장과 과장이 오셨다. S과장님이라는 분으로 양곡부에 근무를 하신 분이었다. 충북 괴산 분이었고 상당히 예뻐해 주셨다. 집이 분당이었다. 대형평수의 아파트에 사셨다. 여름철에 전 직원을 이끌고 부부 동반하여 정릉밑의 우이동에서 한정식을 먹으면서 모임을 가졌다. 강남으로 와 노래방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제 다시 업무분장이 되어 종자업무를 맡게 되었다. 정부 보급종자와 맥주맥종자, 옥수수종자 등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경남 사천 등에 맥주맥종자의 생육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출장을 가기도 했다. 경기도안양에 있는 국립종자공급소와 관계가 있었다. 농림부와 관계가 있어 맥주맥종자 기금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관리액이 7억 가량 되었다. 종자 공급제비를 정산받기도 하였다. 필름업무는 K모대리가 맡았다. 제대로 자리를 잡아 가는 것 같았다. 과장은 예전 과장만큼 술을 잘하시지는 않았으나 즐기시는 분이었다. 부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셨다. 부장은 일본사무소장을 하신분이라 일본에 정통했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잡지 등을 구독하였다. 과장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셨기 때문에 분위기는 순조로웠다. 조사부 쪽으로 근무를 해보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것이란 충고도 있었다. 다음해에 과장님이 유류 팀으로 가시고 새로운 과장님이 오셨다. A모과장이셨다. 아주 다혈질 같았고 의욕이 넘쳤다. 부장도 새로운 분이 왔다. 업무를 가공공장 등 다른 업무를 맡았다. 자재가공공장에 관한 것이었다. P.E필름공장, 골판지공장, 공동퇴비공장 등에 관한 사항이었다. 가공공장회의를 전국을 돌며 실시하였다. 퇴비관련내용은 평창에서 필름관련은 광주에서 골판지 관련사항은 창녕에서 이루어졌다. 일주일간 회의만 하면서 보냈다. 다행히 그것으로 인해 승진시험의 출제 차출에서는 빠졌다. 그렇게 빠져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평창의 회의에는 담당상무까지 참석을 하셨고 강원도 부본부장님까지 오셨다. 회의 주재를 위해 달렸던 주행거리가 1,500여 킬로를 넘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삼성그룹의 사장단 회의 같은 것이었다. 공장의 내부적이고 어려운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고 논의하는 자리였다. 쌀포장용으로 사용하는 지대라는 것이 있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자료를 모으고 방침 안을 만들었다. 미곡종합처리장(RPC)이 활성화될 것으로 예측해서 이러한 수요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지대공장을 건립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지대공장을 지어 그런 수요를 충분히 커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대원료를 생산하는 공장 등을 방문하여 조사하였고 의향조사도 추진하였다. 경기도 한 지역농협에서 의사를 피력해와 그쪽으로 추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느타리버섯과 관련한 여러 가지를 조사하고 다녔다. 버섯에 필요한 자재의 공급을 시도할 필요성 등을 검토했다. 배지재료로 사용되는 것 등을 조사 연구하였으나 실질적인 사업성을 가진 품목은 거의 없었다. 종균배양소 등을 찾아다니고 버섯재배지를 돌아보기도 하였으나 사업성은 없어 보였다. 하루는 과장이 야근을 좀 하자고 하였다. 단 둘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 퇴근해버렸다. 12시까지 근무를 했다. 그리고 퇴근을 하는데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포장마차에서 한잔을 하고 퇴근했다. 얼마나 강단 있고 기개가 넘치는 사람인가 하면 다음 얘기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군에서 단기하사로 제대를 했단다. 그리고는 제대하면서 칼을 한 자루 숨겨 나왔단다. 그리고 그 칼을 모친 앞에다 내려두고 대학을 보내주지 않으면 그 칼로 죽어버린다라고 엄포를 놓았단다. 자식이 죽는다고 엄살을 피우는 데 그걸 안 된다고 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다음에는 그 얘기가 더욱 가관이었다. 서울에서 한 번씩 고향을 다니러 가시면 소주한 병씩을 모자간에 대작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모친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수술을 하자 또 한편에서는 그냥 두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기어코 허락을 받아 수술을 하게 해서는 5년 더 장수하게 했단다. 체육 행사 등이 있을 때면 충암고가 있던 은평구 빌라촌에 있던 과장님 집에서 놀이를 하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부장은 P모 부장님이 오셨다. 대체적으로 온화하시고 합리적이었다. 미술을 하시던 사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처하신 상황이었다. 이후에는 남해화학 인수단을 이끌었고 그 후 정년퇴임하였다. 젊은 시절 형님의 신세를 많이 지셔서 그것을 꼭 잊지 않고 아직도 감사해 하였다. 독실하신 신앙인이었다. P.P포대 원가조사를 나갔다가 다른 부서로의 전근을 얘기했는데 거부당했다. 과장님은 이후 곧바로 인력개발부로 가셨고 급여팀장 인사팀장을 하시다가 제천지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충북유통사장으로 정년퇴임 하였다. 그 후에 말년에 폐암에 걸리셔서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다. 노조에서 주는 존경하는 상사상도 탔다. 얼마 전에는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자재과에서의 막판 겨울쯤 되었을 것이다. 공급한 특수필름의 하자문제로 농민들이 전세버스로 상경했다. 안산 일신화학공장에서 일주일간 농성을 하였다. 금요일에 담당책임자랑 안산을 내려갔다. 12시간을 꼬박 밤까지 새면서 중재하여 타협안을 만들어 합의서에 쌍방대표 간에 서명 날인하도록 만들었다. 아침 일곱 시에 합의하고는 사무실로 왔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담당책임자는 열두시에 사무실에서 퇴근해서 나갔다. 과장은 토요일이었음에도 15시에 퇴근하였다. 토요일이라 13:30분이 퇴근시간이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밤을 꼬박 샌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근무를 한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언젠가는 협상하러가 도저히 안 돼 사우나에 들어가 먼저 나오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해서는 굴복시키기도 했다고 했다. 과실봉지공장이란 것이 있었다. 유통공사에서 운영해온 것이었는데 그것을 인수받으라는 것이 정부 측 요청이었다. 인수단을 운영해서 그것을 매입했다. 예전 모셨던 K모님이 인수 책임자였다. 사장으로 내정되신 분은 정년하신 원로였다. 공장 대금으로 50억 가량을 주고 공장을 인수해 운영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공장까지 왔다 갔다 했다. 공장은 달성농공단지 내에 있었다. 개소식도 했다. 유통공사도 수차례 왔다 갔다 했다. 직원으로 충북에 있던 L모군이 왔다. 얼굴이 빼어난 미남이었고 적극적이었다. 본래 있던 H모군이 가고 왔다. 늦은 승진이었다. H씨는 대학학생회장 출신이었고 멋진 사회솜씨까지 갖추고 있었다. 부친상을 당해서 대구까지 문상을 간 적도 있었다. 과장이 모친상을 당해 제천까지 내려갔다. 산간벽지 시골이었다. 박달재를 넘어 아래쪽 마을이었다. 정중하게 문상을 하고는 월악산 쪽에서 송어회를 먹었다. 큰 그릇에 야채랑 콩고물이랑 회를 비벼먹었다. L모라는 부부장님이 계셨는데 수안보쯤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과장님은 충북에 내려오셔서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고 그 절약된 비용을 불우이웃돕기를 해서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는 퇴임하시고 제천에 내려가 지낸다고 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 된다. 다음해가 되었다. 95년이 된 것이다. 집을 신림1동 조그만 아파트로 옮겼다. 20평대 아파트였지만 방이 3개였다. 자동차도 장만하였다. 중고로 5만 킬로미터를 탄 프라이드 베타였다. 이백오십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처형이 소개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처제가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으로 이사해 왔다. 부서의 소속이 자재과에서 농기계과로 이동되었다. S모 과장님이셨다. 술보다는 놀이에 치중하셨다. 한두 잔의 건배만 있었다. 부부장도 놀이를 즐겼다. 식사를 마치면 바로 놀이에 들어갔고 11시경까지 이어졌다. 소형 농기계 쪽을 보았고 농기계 교육 쪽을 담당하였다. SIMSTA라는 농기계전시회 등을 담당하였다. 서울이나 대전 등에서 전시회를 2년에 한 번씩 열었다. 상하반기에 농기계업체에 가서 농기계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J모 부장이 담당이었다. 정신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여주 쪽 서비스센터 기사가 교육도중 사망하는 사고가 나기도 하였다. 지병이 있는 상태에서 교육을 받다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비가 한참 많이 왔는데 문상을 가기도 했다. 농기계회사의 연수원이 있었던 옥천, 용인, 성환, 창녕 등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부장과 함께 출장을 가서 정신교육을 하기도 했다. 한번은 고로쇠 물을 가져와서 여관에 모여 앉아 먹기도 했다. 저녁 내내 고로쇠를 먹고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체육행사 때에 타이타닉 영화를 보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워커힐을 가서 식사하면서 공연을 보기도 하였다. 동물 쇼를 보기도 했고 마술쇼도 보았다. 소형농기계의 주류는 예취기가 주를 이루었다. 계양, 북성정공 등의 업체가 있었다. C모 대리가 있었는데 충청도 양반이었다. 이 양반과 죽이 맞아 한참을 같이 다녔다. 출근은 K모 대리와 카풀을 했었는데 퇴근시간에는 시청 앞에 있는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잔씩 하였다. 각각 2000 CC를 먹고는 귀가했다. 간혹 한 번씩은 주점 같은 곳을 찾기도 하였다. 강동의 술집까지 가기도 하였다. 호기를 부렸고 객기를 부렸다. 그는 1년 있다가 비료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00년에 승진을 하여 충남으로 내려가 지역본부팀장을 하다가는 지점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명예퇴직을 했다. 고덕동에 살았다. 하도 술을 많이 먹고 돌아다녀서 집사람은 싫어하였다. 봄에는 승진시험 출제에 차출되었다. 법학을 출제하거나 구매 관련 실무를 출제하였다. 93년부터 시작해서 99년까지 94년도를 제외하고 매해 연중행사였다. 어떤 경우에는 중앙회와 조합출제를 둘 다 차출되기도 했었다. 보름여를 감금생활을 하였다. 96년도에는 9월부터 1월까지 3개월간 경제사업활성화 T/F팀을 만들었는데 부서대표로 차출되었다. 중부공판장에서 작업을 하였다. 3개월여를 작업해서는 책자를 한권 만들어 냈다. 95년부터는 안양평촌에 있는 조합아파트에 참여를 하였다. 98년에 완공이 되었다. 전세를 주었다가 2001년쯤에 팔았다. 승진시험 출제유공으로 해서는 회장상을 받기도 하였다. 2000년도에도 차출이 되어 호텔까지 끌려갔으나 모친이 쓰러지는 바람에 도로 나오기도 하였다. 실무책자를 집필하기도 하였고 출판사로부터 의뢰를 받아 참고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93년도에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집사람은 교직생활을 복직해서 하고 있었고 수학 사랑이란 사단법인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학교생활을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신안아파트 라동에서 마동으로 이사하였고 1층 입구에 집이 있었다. 맞은편 동에 처제네가 살았다. K모 직원도 라동에 살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계동으로 집을 사서는 이사를 가버렸다. 국제화재에 다니는 후배가 한명 주변에 살고 있었는데 가끔 가다 목욕탕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아파트 뒤의 야산인 장군봉에 자주 올라가서 아이들과 놀았다.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줄넘기도 하였다.

 

 

직장생활 3 (1997-2001)

농기계 팀에 온지 3년째 되었다. 계속 S과장이 업무를 맡고 계셨고 소형농기계와 농기계 교육을 맡아서 했다. 연초에는 승진시험 출제를 위해 차출도 있었다. 평촌에 아파트를 분양받기위해 자금의 투입이 있었다. 중도금은 대출을 받아서 충당했다. 98년도가 되었다. 업무분장이 되었고 계통농기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농기계업체인 대동농기계 국제, 동양, LG 등과 계통공급계약을 해야 했다. 농기계 공급의 실적이 목표한 만큼 확대되지를 못해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계통농기계를 담당하던 이가 주무 팀으로 이동되어 가버렸다. 경제위기가 왔고 IMF 구제 금융을 받았다 금모으기를 하였고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J모씨가 과장으로 왔다. 진주고 출신이었다. 서민적이었고 소탈하였다. 목동 쪽에 집이 있었다. 농기계 보조금과 관련해 감사를 받던 중에 문제가 발생되기도 했었다. 99년이 되어서는 3명이 승진해 나갔다. 89, 90, 91 3개년 승진 자가 승진해 나가고 90승진자 3명이 남게 되었다. 참담한 상황이었고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었다. 기획실 3, 교육 연수부 쪽 2명이 발탁되었다. 부회장의 입김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승진에 누락된 사람의 심정이 피부에 와 닿았다. 다음해의 부장으로 온 이는 K부장이었다. 서울 북쪽 도봉산 자락에 집이 있었는데 무척이나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농기계과 직원의 중매를 선적이 있었는데 잘되어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집사람이랑 증인으로 같이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부장집에 갔는데 선풍기조차도 없어 사러간다고 나갔으나 문을 연 곳이 없어 그냥 돌아가기도 하였다. 기획실 출신이어서 무척이나 예산 조직에 있어서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자재부장을 끝내고 농촌지원 부장을 하다가 지역본부장을 역임하셨고 상무로 자회사 사장으로 승승장구 하였다. 통장에 현금이 몇 억이 쌓여있을 정도였다. 막판에 분당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하였다. 차를 레간자를 타고 다녔다. 무안 세발낙지를 무척이나 즐겨 잡수셨고 산을 좋아했다. 담배를 애용하셨는데 금연을 하시고 이빨에 문제가 생겨 한동안 고생했다.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술도 잘 드셨고 놀이도 즐겨하였다. 무척이나 엄격하고 무서울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업무에 상당히 생소하고 처음 접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잘 리드해 갔다. 체육행사로 북한산 등반을 하였다. 창녕 쪽에 출장을 갔다가는 이차장을 만나 식사를 같이 하였다. 화왕산 쪽을 조금 올라가 보기도 하였다. 00가 지부장을 하고 있었다. ‘99년도 말에는 농축협 통합관련 차출이 있었고 승진이 코앞이었음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11월부터 익년 2월까지 있었다. 이후의 통합작업은 실무작업반에서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승진시기와 맞물려 있었는데 이듬해에도 다시 또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2000년도에 2명만 승진이 되었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중앙회에 90승진자중 누락자가 6명 인가였는데 그 속의 1인이었다. 턱관절 관계로 수술을 받았다. 그 이 전해에 턱관절 뼈의 잘못된 부분을 긁어내었는데 그것과 연관된 수술이었다. 파견이 끝나고 부서내로 복귀를 하고 자하니 농기계 팀에서는 퇴물이다 보니 받을 수 없다는 얘기였고, 하는 수없이 일반자재 팀으로 가서는 PP포대업무를 맡았다. PP포대의 원가조사차 부안으로 출장을 갔었는데 무리하게 음주를 한 게 원인이었는지 아무튼 턱 관절뼈가 부러져 내부에 철심을 박고 고정을 하였다. PP포대계약을 일반경쟁계약을 해야 한다는 부장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주원인은 PP조합의 전무를 역임했던 L모씨가 가 있었다. 부장의 학교선배에 원로 측에 드시는 분이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전무로서 불명예퇴직을 하다 보니 부장에게 그렇게 종용을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팀장이 팀장 직을 걸고 만류해서 단체수의 계약을 하고는 공급을 하였다. 원가계산을 하느라 출장을 다녀왔다. 업무 후에는 술을 한 잔씩 하였다. 어떤 때에는 일주일 내내 마시기도 하였다. 팀원 중 한 사람이 갓 결혼을 한때라 집들이를 하기도 하였다. 팀장의 집을 방문해서 술을 한 잔 하기도 하였다. 사모님이 미스코리아 출신이라 할 만큼 미인이었고 키도 컸다. 강남 대치동 Y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명동 칼국수집, 호프집 비젼 등을 자주 갔다. 아들이 녹색 소년단에 참가를 해서 휴일마다 거의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것에 같이 참가를 했다. 강화도를 시발로 해서 행사가 계속 이어졌다. 새벽6시부터 나가서는 자전거를 탔고 행사가 있을 때면 따라 다녔다. 정신문화원 6.25 임진각, 천불암, 가평행사 전국일주 등등 거의 쉬는 휴일이 없을 지경이었다. 차를 프라이드 베타에서 아반테로 2000년에 바꾸었다. 휴식시간마다 간식을 날라다 주었고 물을 보충해 주었다. 학부형끼리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재미나게 지냈다. 산행도 몇 번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을 가기도 했다. 작은 녀석도 데리고 갔는데 3학년짜리가 정말 힘든 일을 해냈다. 대청봉에서 내려올 때는 비를 흠뻑 맞기도 했다. 동해안에서 해수욕을 하면서 즐거워하기도 하였다. 부장은 N모씨였는데 목포 출신이었고 고대출신이었으며 해병대출신이었다. 하남지부장을 하였는데 전국업적 1위의 금자탑을 쌓고는 검사부장으로 왔다가 자재부장으로 왔다. 술은 잘못하셨는데 강한 인상을 보여 주었다. 연초에 복귀를 하자마자 승진시험 출제에 차출이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황당한 상황이었다. 하루를 지냈는데 모친이 병환이 나셨다는 연락이 왔다. 급거 부산으로 내려가 보니 뇌졸중이 와서 중환자실에 계셨다. 2일을 간호하다 올라왔다. 7.1일자로 농, , 임 삼협의 통합이 있었다. 자재부 쪽에서 축산자재 또는 인삼자재의 신규취급이 논의되고 검토되었다. 인삼협, 축협쪽 직원이 일부 충원되었다. 인삼부 쪽 사람들과 간담회를 갖기도 하였으나 계통공급 품목으로 마땅하게 검토할 만한 것은 별로 발견할 수 없었다. 조직적으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고 복잡했다. 71일자의 인사얘기도 나왔으며 내정자도 하마평에 올랐으나 모든 것은 원상회복되었다. 다음해(2001)가 되었다. 3명이 승진되었다. 나머지 2명은 92승진자를 승진시켰다. 서무과장은 배제되었다. 승진 턱을 내었고 기쁨이 컸다. 팀장으로서의 발령은 추후 결정이었고 MBA교육으로 결정이 났다. 본래는 양곡부 모씨가 교육을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시급한 현안관계로 차출이 보류 되었다. 경제 쪽이었고 인원은 20명이었다. 253급이 15명이었다. 농협이 13명 축협이 7명이었다. 자체 모임의 총무로 선출이 되었다. 회장은 L모씨였다. 매달 얼마씩 각출을 했고 그것으로 운영해 나갔다. 매달 한 번씩 교육 연수부를 가서는 급여명세표를 뽑아다 개별적으로 갖다 주었다. 교육은 330분경에 종료되었다. 90분 강의를 4교시 정도 하였다. 파트가 나뉘었다. 놀이파, 골프파, 술파로 나뉘었다. 술자리가 잦았다. 수업을 마치면 호프집에서 한잔씩하고 헤어졌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서울역 앞 중국집에서 해단식 비슷하게 책걸이 겸해서 한잔을 더했다. 스승의 날에는 교수님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비용관리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수료 때에 공로패를 받았다. 편성된 조로는 5조였는데 농협유통의 도매사업에 관하여 조사보고서를 만들었다. 대전에서 출퇴근하는 분들도 있었다. 나중에는 고시원에 방을 얻어 생활하였다. 7주간씩을 3회로 하여 나누었다. 중국여행을 5일가량 다녀왔다. 최초로 해외를 나가는 것이었다. 비디오로 촬영을 하였고 편집을 해서는 한 장짜리 VTR로 만들었다. 사진촬영도 많이 하였다. 발마사지도 받았다. 지도교수가 여행기간 내내 감기에 걸려 고생을 많이 했다. 중국의 상해, 항주, 소주를 돌아보았다. 매일 재미있게 지냈다. 중국술 오량액을 E마트에서 한 병씩 사가지고 왔다. 간단하게 리포트 형식으로 주제를 정해 분임별로 과제를 만들어냈다. 8월경에 MBA과정이 끝났다. 어떤 이는 계속해서 대학원에 등록을 해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중국어에 심취해서 능통할 정도까지 일취월장한 어학능력을 갖게 되었다. 안성교육원으로는 두 명이 발령을 받았다. Y모 박사로 잠시 머무는 인사였다. 인사발령은 안성교육원으로 났다. 아이들의 전국국토 대행진 행사가 있어 다소 늦게 부임을 했다. 원장은 C모씨로 축협출신이었다. 부원장은 Y모씨였다. 생활지도 팀장으로 보직을 받아 부임하였다. 교육생들에게 처음 교육원을 소개하고 브리핑하는 역할을 맡았다.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소개를 하였다. 진행교수 1명과 일일교육 담당1명이 있었고 밑에 직원 2명이 있었다. 한사람은 간호사로 여직원이었다. 한분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으로 평생을 교육원에서 근무하신 분이었다. 팀 내에 진행을 담당하는 직원이 좀 문제가 있었다. 전산소 출신이었는데 별로 업무에 충실하질 못한 듯 보였고 미덥지가 못했다. 장교출신이라고는 하였지만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해내지 못했다. 일일교육 담당교수는 오랫동안 교육원에서 근무해온 터라 무난하게 업무에 충실하였다. 5-6세정도 연배였다. 간호사는 아주 맡은바 일에 충실히 하였고 대인관계도 화목하게 잘 이끄는 편이었다. 같은 농협직원끼리 결혼하여 잘살고 있었다. Y팀장으로부터 업무에 대해 인수인계를 받았다. 교무팀장으로 있었던 H모씨가 MBA(서강대 금융)를 가게 되어 송별회를 했다. 술을 꽤 마셨음에도 꼭 가야 한다는 부분 때문에 차를 끌고 갔다. 무척이나 걱정을 하였다. 교육이 끝나고 바로 본부로 갈 줄로 알았는데 다시 또 복귀를 하였다. 참으로 아쉬워하였다. 교육원이 예전의 그 화려했던 명성을 잃어 가고 있었고 농업인 교육의 활성화도 예전만 못했다. 중앙교육원의 리모델링 얘기가 들려 왔다. 숙소는 상당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푸른 자연 속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익숙하지 못한 생활패턴에 적응하기까지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입사동기 교수가 한 명 있어 소주를 한잔하였다. 교육원 전체 시설 쪽을 담당하고 있었다. Y모 팀장은 노조 창립멤버로 상당히 예리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승진한 후 여주 쪽에 있었는데 일 년 만에 교육원으로 왔다. 노조에서 전화문의나 자문요청이 많았다. 정책 전문이었던 것 같았다. J팀장은 나주가 고향이었는데 독특하게도 서양화가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개인전도 연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테니스를 잘 치셨고 단정하시고 깔끔하셨다. 부드러움과 온화함이 있었다. 아주대에 대학원을 등록하셔서 열심히 석사과정 공부도 병행하였다. 아들이 연대에 다니고 있었고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오기도 한 모양이었다. 사모님이 피아노를 레슨을 하였고 가계를 책임지게 한 자책으로 미안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얼마 후에 2관으로 가셨다. 큰녀석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작은 녀석이 자전거타기를 시작하였다. 전국일주 코스는 강원도 쪽으로 시작해서 부산 해운대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무척이나 힘든 코스였다. 여름 땡볕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큰 녀석도 동참을 하였다. 막판에 충돌 사고가 있어 병원치료를 받은 녀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기차를 타고 귀경하였다.

 

직장생활 4 (2002-2006) 안성교육원 예금자보호기금사무국(2004~ )동부APT(2002-2005) 유원(2005.5~2011.1)

2002년 새해가 되었다. 업무분장이 되어 졸지에 교육원의 총무 팀을 맡게 되었다. 시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아래층과 2층에 자리가 두 개 마련되었다. C모 원장은 정년을 앞두고 있었다. S대 출신으로 지역본부장까지 역임한 분이었다. 하지만 농협인 에게는 낯설었다. 손님들이 오셔서도 모두 종묘센터로 가기도 하였다. H팀장이 교육기획팀을 맡았다. 직원교육이 하게 되기도 했다. 중앙교육원에서 건물을 새로 짓느라 일부가 분산해서 내려와 있기도 하였다. 학습장이라고 비닐하우스 동이 15개정도 있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교수들이 모두들 그것에 매달렸다. L, K모 등을 데려왔다. L모 교수는 동기였는데 승진이 안 되어 무척이나 섭섭해 했다. J팀장은 2관으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부원장이 가고나니 교수부장이 부원장으로 오셨는데 행정업무에 익숙하지 못했다. 교육원 업적평가에서 하위를 맴돌았다. 직원교육으로 인해 과목을 맡아 강의를 해야 했다. 미리 강의시연회를 개최해서는 심사를 받았다. 2002년도에는 신안아파트에서 동부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26평 정도였고 1억 천만 원 정도였다. 2층이었다. 소파를 놓기도 비좁은 상황이었다. 곧 이어 처제네도 6층으로 이사를 왔다. 그런지 얼마 있다가 동서가 공주교대로 임용되는 바람에 대전으로 급하게 이사를 가게 되었다. 동서네와 같이 있는 동안은 한동안 정답게 잘 지냈다. 서로 간에 애들도 봐주고 식사도 같이 한 번씩하면서 말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신록사 사람들이랑 자전거로 서울대를 갔다 오면서 아침을 같이 먹었다. 라면을 먹기도 하였고 감자탕을 먹기도 하였다. 또는 설렁탕, 해장국 등을 먹었다. 안산의 수리산에 산악자전거를 타기도 하였다. 춘천 강촌을 가서 자전거로 산악을 돌기도 하였다. 교육원 생활에 조금은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한창 잘 몰던 아반테 차량을 처제네에 주고 카니발로 차를 바꾸었다. 경유 차량이었고 9인승이었다. 안성을 왔다 갔다 하며 몰고 다녔다. 하반기에는 부원장으로 계셨던 Y모님이 교육을 갔다. 그리고 2교육관의 교수부장이 부원장으로 오셨다. 둘째아들이 녹색소년단이란 자전거 타는 모임에 가입을 해서는 그곳에 쫒아 다녔다. 교육평가회가 있기도 했었다. 연말이 되어서는 원장의 퇴임식을 열어드렸다. 원장의 퇴임식 행사를 하고는 한해가 마무리 되었다.

 

2003

새로운 원장으로 H모님이 왔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었다. 부원장으로도 Y모님이 전입되어 왔다. 한때 같이 교육개혁단에 계셨던 분이었고 서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맨 먼저 원로 분들을 찾아뵈었고 안성관내 유지들을 모셔서 회합을 했다. 모두 대단히 흡족해하셨고 기뻐하였다. 조합장님등 유지 분들과의 관계를 열었고 대내외적으로 차질 없이 일을 처리하셨으며 열정적이고 의욕적으로 교육에 임하셔서 귀감이 되었다. 간간히 회식을 하셨고 침체되었던 교육원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처음 오셔서는 건강이 좋질 않으셔서 병원에 입원해서는 일주일을 보냈다. 어떻게 안성교육원을 교육의 메카로 우뚝 세울 것인가로 고민을 많이 하셔서 병이 나신 모양이었다. 1교육관과 제2교육관으로 양쪽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행사에 참석을 하셨고 교육원 홍보에도 열성을 보였다. 중앙회로부터 예산을 확보하여 2교육원 주변에 경계용 철망을 설치하시기도 하였다. 교육원 마당을 직접 솔선수범하면서 쓸기도 하였다. 회장님도 세 번 정도 방문을 하셨다. Y모님이라 분이 평생을 교육원에서 사셨는데 갑자기 뇌일혈로 돌아가시게 되자. 교육원에서 노제를 지내고 장지로 가셨다. 보신탕을 즐겼다. 특식을 좋아하였고 미식가였다. 교육원 업적평가 결과 1등을 차지하였다.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예전 군지부장시절의 농민회 간부들이 감사패와 고로쇠 물을 들고 오셨다. 정말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대학원과정을 새로 등록하셔서 박사과정을 밟으셨다. 골프를 무척 좋아하였다. 주중이나 주말이나 한 번씩 라운딩을 하셨다. 부킹용 전화기를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주말에도 댁에 가시질 않고 사택에서 지내도 하였다. 관사로 팀장 등을 초대하여 환담을 나누거나 술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씩은 관내 사무소장모임을 하였다. 한번은 회장님이 오셨는데 곧바로 올라가시게 되어 식사시간이 없었다. 따뜻한 도시락을 준비해서 식사에 차질이 없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일선 회원조합의 합병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중앙회 방침에 배치되게 집단행동을 하고자 하는 조합장님들이 교육원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러 오자 이를 잘 설득해서는 돌려보냈다. 테니스도 곧잘 즐겼다. 부원장의 아들이 병원에 입원하자 병문안을 가기도 하였다. 한번은 시골에 수행해 내려 간 적이 있는데 점심 식사 후에 놀이가 벌어져 저녁까지 늦어진 적도 있었다. 항상 부지런하셨고 매사에 철두철미하셨다. 고향근처에 땅을 사두기도 하였다. 시골에 부친이 홀로 생활하고 계셔서 그것이 큰 걱정이었다. 건강나라라는 사우나가 있었는데 그곳엘 같이 가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보신용 개를 잡아서 회식을 하기도 하였다. 교수들이 여가시간을 활용해서 운동하는 것 등을 적극 권장하였다. 원장님들의 정기적인 모임에도 참석하기도 하였다. 언제나 청렴하셨다. 표창이나 해외연수 등에 항상 공정하고자 하였고 정확하게 공사를 분별하였다. 사모님은 강원도 횡성분이셨는데 항상 사택에만 계셨고 교육원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신하게 행동하였다. 인력개발부 또는 회원지원부 직원을 초청해서는 행사를 치르게 배려하였다. 일박이일 일정을 잡아 편안히 쉬었다가 충분히 휴식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모든 교수들은 의욕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여주었고 활기가 넘쳤다. 상호금융MBA2교육관에서 진행하였다. 그것으로 인하여 해외연수 기회가 있었다. 교수들의 컴퓨터 역량강화를 위해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추어탕, 해장국, 매운탕 등도 좋아하셨다. 스카이 라이프를 설치해서는 그것으로 골프시청을 즐겼다. 비단옷입고 밤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한번은 강원도를 가셨는데 여러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생색은 지역본부가 따내고 계산은 교육원에서 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분 나빠 하기도 했다. 인맥관리에 철저하셨고 비서실까지 근무하신 적이 있으셔서 인간관계에 일가견이 있었다. 외부에 특강도 자주하셨고 출타도 잦았다. 일주일에 2-3일정도 사모님이 오셨다가 가시기도 하였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셨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교수들을 데리고 수안보 수련원에 워크숍을 12일간 다녀오기도 하였다. 문경의 드라마 촬영장과 문경새재 도 하였다. 가을쯤에는 교수요원의 해외연수기회가 주어졌다. 해당이 되어 일본을 일주일간 다녀오는 기회를 가졌다. 각 교육원 교수요원이 갔다 왔다 교육제도 농산물 유통시설 등을 둘러보았고 일본의 실체를 파악하는 등 여러 가지 견문을 넓혔다. 골프를 치기 시작해서 레이크힐스 나인 홀에서 머리를 올렸다. 광주에 가서 처남과 집사람과 한번 골프를 치기도 했다. 막내동서가 식사를 샀다. 막내동서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골프장이었다. 아주 분위기 좋은 골프장 식당 내에서 VIP대접을 받으며 먹었다. 본부에서 손님이 무척이나 많이 왔다. 상무, 임원뿐만 아니라 대표회장 등 엄청나게 온 듯하였다. 교육평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가끔씩은 외식을 하기도 하였고 한우촌이나 매운탕집, 보신탕집 등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별식으로 회식을 하기도 하였고 화기애애(和氣靄靄)하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의 조직생활이 이어졌다. 연도 말에 원장이 갑작스럽게 예금자보호기금 사무국장으로 발령이 나버렸다. 전혀 준비가 없었는데 인사이동이 된 것이었다. 영전이라 할 만하였다. 업적이 그동안 하위권이었는데 단번에 1위에 올려놓았다. 내신으로 총무팀장과 기획팀장을 추천해서 올려주었다. J팀장은 승진을 하였다. 고향으로 갔다. 원장께서 떠나고 도라지회라고 모임을 만들었다. 1년에 두어 차례 모임을 갖고 우의를 다졌다. 처음에 오셔서 빈 땅에 도라지를 심으라고 하여 온통 도라지로 교육원 곳곳을 도라지 천국을 만드셨던 연유로 회()이름이 도라지회가 되었다. 2교육관에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서 함부로 교육원을 이탈하거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상호금융 MBA교육과정을 신설해서 성공적으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업적을 쌓았다. 한번은 계약직으로 일하던 이가 눈 속에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해서 숙소로 옮기기도 하였다. 여러 인맥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훌륭하신 분들을 모셔서 강의를 듣기도 하였다. 황수관박사, 엄길청교수 등도 다녀갔다. 큰 녀석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용산고에 배정을 받았다. 한 번씩 녀석을 태우러 학교에 데리러 가기도 하였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경우에 한하여 말이다. 수학사랑에서 집사람과 같이 근무했었던 C선생이 있었는데 박사과정을 밟는 바람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H모 원장이 경북 칠곡군 지부장을 하시다가 원장으로 오시게 되어 칠곡까지 내려가서 모셔왔다. 얼마 후에는 발령이 나서 예보사무국으로 가게 되었다. 3년만의 귀경이었다. 참으로 많이 답답하고 힘들고 하기도 하였는데 막상 떠나고 보니 좋은 추억이었고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2004

예금자보호기금 사무국의 조사송무팀을 맞게 되었다. 부실조합에 대하여 부실에 책임 있는 부실관련자에 대한 부실조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전국 곳곳에 출장을 나갔다. 한 달에 한 두 차례 출장이어서 정신이 없었다. 사무국내에 전문계약직 자문변호사가 있었다. 또한 위원회도 있었다. 상당히 격론이 벌어졌고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부서로 전입해 오자마자 문을 닫는 조합이 줄을 이었다. 철원, 성주, 구미장천, 파주교하까지 있었다. 성주 축협은 직접 총괄지휘를 맡아서 했다. 2주 정도를 머물면서 마무리 지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눈이 내려 길이 엉망이기도 하였다. 같이 내신을 내었던 H팀장은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실조사를 하고 심의를 하고 위원회에 안건상정을 해서는 조합별로 소송을 수행하도록 지도하였다. 부실조합 중 계약 이전된 부분에 대하여 사무국에서 직접 소송을 수행하였다. 구조개선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2-3년이 경과하였지만 소송도 이제부터 시행이 되었다. 자문변호사는 여자변호사였다. 직접적인 소송 수행보다는 법률문제에 관한 자문이 주를 이루었다. 직원들과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부부장과의 불화도 있었다. 부부장은 구조개선업무의 원조였고 정확하고 치밀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파주교하농협을 정리할 때에는 정말 심각한 지경이었다. 노조측과의 물리적인 마찰도 있었고 쉽게 법집행이 이루지질 못했다 계속적인 농성이 있었고 노조원에 의한 조직적인 방해가 이루어졌다. 직원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조직적인 저항에 상당한 애로를 겪었으나 다소간의 물의를 무릅쓰고 법 집행을 강행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어렵게 처리할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조합을 해산해버리고 새롭게 한 조합을 만들어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조합원이 조합원의 의사에 의해 그렇게 자발적으로 조합을 해산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다음해에는 새로운 부부장이 오셨다. H부부장이었다. 경북 분이셨는데 근무는 예산이랑 창녕에서 근무를 하였다. 세무 쪽에 밝으신 분이었다. 변호사와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전임 부부장은 교육을 가셨는데 5월 말경에 갑자기 뇌일혈로 돌아가시는 불상사가 있었다. 모두가 애통해했고 가슴아파했다. 교육을 받으시는 중에도 여러 곳에 열심히 노력하였다. 테니스장에 새벽에 가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으나 여의치 못했다. 변호사와 부부장과의 갈등의 골이 조금씩 깊어갔다. 그리고 결국 상반기의 근무평가를 하면서 극점에 이르렀다. 부장께서 중재를 하려고도 했고 화해를 유도하려고도 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부부장에 독대해서 시간을 벌어보기도 하고 애원하였으나 수습이 어려웠다. 결국은 변호사측에서 사퇴를 하기로 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변호사는 삼양사라는 사기업체의 변호사로 계약되었다. 새로운 변호사를 모집해서는 채용을 해야 했다.

 

2005년년이후

연도 말 쯤 해서는 변호사를 채용하려고 선임이 되었으나 사퇴하는 바람에 새롭게 변호사를 뽑는 일이 벌어졌다. 사법연수원을 갓 나온 이가 사무국의 변호사로 채용되었다. 상당히 성실하고 부지런했으며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너무나 직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업무분장이 되어서는 기금관리팀을 맡게 되었다. 부부장으로는 K모씨가 왔다. J팀장은 승진해 가셨다. P교수도 안성교육원으로 승진해 갔다. H차장이 몹시도 섭섭해 하였다. 부장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7월이 되어서는 새로운 위원장이 부임해 왔다. 예전에 상무로 업무를 하셨던 분이어서 대환영을 받았다. 서울지역본부장을 하다가 왔다. 합리적이셨고 신망이 높았다. 예금자보호제도 발전방향에 용역연구가 있었고 곁들여서 유럽출장이 있었다. 사정이 많아 우여곡절 끝에 출발하였으나 상당히 유익한 출장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을 둘러보고 오는 것이었다. 연말쯤에는 화천양구축협의 계약이전이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상무님의 브라질 출장이 무산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어렵게 성사되었고 계획되었던 일이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무주리조트에 예금자보호제도 발전을 위한 워크숍을 갔다가는 급거 사무실로 나왔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공기업 감사들의 무분별한 해외출장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화천축협조합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방안이 논의 되었다. 회원지원부의 합의를 받아 되도록이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지원책이 강구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하기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은 사안이었다. 조합의 노조에 의해 파국으로 치달은 상황이어서 조합원의 손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회원지원부장의 합의까지 받아서 지원방안에 관한 방침 안을 만들었다. 회원지원 부장은 다음해에 지역본부장으로 영전해 갔다. 또한 사무국 국장도 지역본부장으로 영전해 가고 새로운 분이 오셨다. 무척이나 희망하셨던 부분이었고 원하던 바였기에 축하를 받았으며 송별회 등이 이어졌다. 10월 야유회 겸 체육행사가 있었다. 동두천에 있는 소요산이란 곳에 등반하기로 하였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새롭게 시작해야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몸을 제대로 만드는 것에 대하여 더욱 열중해야할 것이다. 대학원에 대하여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하리라 집도 어떻게 빨리 장만이 되어야 할 텐데 문제는 문제였다. 10월 말 국감일 이었다. 문제는 회장님의 불출석이었다. 초장부터 삐걱거렸다. 병으로 인한 불출석사유서를 제출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31일 종합 국감에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그에 대한 입장 등을 전무이사에게 물으셨다. 전날은 정말 복잡했다. 밤늦도록 대기하던 관례가 계속되었다. 새벽 한 시경에야 겨우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도착하니 20분이 지나있었다. 송무팀 쪽에 현안이 많이 나왔다. 10시부터 방송이 되었다. 점심으로는 도시락으로 때웠다. 노조에서 시위를 하고 대자보를 붙였다. 농림부 협동조합과에서도 왔다. 부부장석에서 팀장들이 식사를 했다. K 팀장은 김재원 국회의원을 만나러 갔다. 저녁시간에 맞추어 끝이 났다. 8시 전이었다. 식당에서 식사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위원장님과 자리가 있었다. 아주 시원스럽게 답변하셔서 매우 화기애애한 자리가 되었다. 노조에서 잠깐 지나가는 바람에 상당히 일순 긴장이 일었으나 바로 평온을 유지했다. 비서도 같이 왔다. 부장님은 술을 삼갔다. 위원장을 보내고 영양탕 집으로 가서 소주를 한잔 더 했다. 다음날에는 용역초안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고려대 양교수와 부장님 등이 식사를 했다. 양교수와 Y차장을 2차로 보내고 부장님과 같이 귀가했다. 토요일에 일어나 작은 녀석에게 라면을 사오라고 시키고 아침을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30분가량을 뛰었다. 점심으로 떡국을 먹었다. 하루 종일 청소를 했다. 아들 녀석과 목욕을 하러 갔다. 속이 좀 풀렸고 개운해졌다. 밤에는 양재 하나로 마트를 갔다. 프로야구 코리언시리즈를 봤다. 계속 동점상태가 유지되었다. 은행에 가서 돈을 좀 찾았다. 귀가해서는 참치회에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연속극을 보았다. 사랑과 야망이 또다시 리메이크 되어서 방영되고 있었다. 고전적 스토리 임에도 아직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최근에 북핵 사태로 시끌벅적 했으며 최규하, 김일 등의 부고가 있었다. 일요일에 자전거를 230분에 탄다고 연락이 왔다. 오전에는 조금 걸었다. 작은 녀석은 자전거를 탈 줄 알았는데 학원엘 가버리고 말았다. 고장난 자전거를 싣고 가서는 수리를 의뢰해 두고 동부아파트 앞으로 갔다. 일행들과 만나서는 수리점까지 가서 차를 주차해 두고 서울대를 2바퀴 돌았다. 그리고 농구장에 앉아서 탕수육을 시켰다. 막걸리 3병과 더불어 말이다. 그리고 서울대를 내려왔다. 자전거를 차에 싣고서 귀가해서 저녁을 먹었다. 전문직 시험에 떨어져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빠져있는 집사람을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제는 인터넷이 안 되었으나 오늘은 다행히 복구가 되었다. 7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한밤중에 깨어서 밤늦도록 영화를 보았다. 루시아란 스페인영화였다. 아주 독특한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코리안 시리즈의 축소판을 보았다. 간발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오전에 보았던 세인트루이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이 떠올랐다. 4:2로 디트로이트를 제쳤다고 했다. 월드시리즈 두 자리 수 우승 그것은 뉴욕 양키스 다음의 대기록이었다. 병건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마누라에게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일이 꿈만 같다.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실패의 원인을 모두 돌려버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3명중 2명 합격에 그 한명에 당신이 속한다는 부분에 정말 참으로 답답하고 속앓이를 하는 부분이 마음 아프지만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맥주한잔을 마시며 풀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인가 보다. 그렇게 준비해도 논술도 잘 썼는데 이유를 모를 지경이다. 내년에는 기필코 꼭 고지에 오르리라.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편하질 않은 모양이다. 우울증에 빠져버릴 만큼 신경 쓰이고 마음 아픈 모양이다. 자리정돈을 했다. 자료정리도 했다. 그래도 냉정하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기 힘든 모양이다.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넋을 잃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소설 백경을 읽다가 말았다. 작은 녀석과의 실랑이가 계속된다. 녀석이 불만스러워 하는 부분에 대해 그렇게 속 시원히 해결책을 제공해 주질 못하는 모양이다. 파주교하 같은 사태가 또 발생될 모양이다. 화천양구 축협에서 유동성이 왔다고 한다. 위원장이 부재중인데 또 농림부의 종합국감이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인데 일촉즉발의 사태가 곧 현실화될 예정인가 보다.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차량의 접촉사고로 인한 손실이 참으로 안쓰럽다. 슬쩍 부닥쳤을 뿐인데 그렇게 피해가 크다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브라질의 출장 건을 그런대로 잘 해결이 될 모양이다. 모양새가 썩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목적달성이 된 셈이니 만큼 제대로 순리를 밟아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큰 녀석의 대학입시만 잘 되면 순조로울 텐데 말이다. 올해의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제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 내년도에는 새롭게 총력을 경주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올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보다 신선하게 충족된 여력을 표출시켜야 할 것이고 업무에 충실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의 변신이 절실히 요청된다 할 것이다.

 

직장생활 5 (2007 ~2009)

새해가 밝았다 부장이 전북지역본부장으로 영전해 가고 새로운 부장이 왔다. 남양주지부장을 하시던 분이었다. 총무부 검사부 서울지역본부 총무팀장을 역임하셨던 분이었다. 원만하고 합리적이셨고 순리를 존중하는 분이었다. 고형을 중매하셨다고 했다. 경기도 이천 분이었다. 마포 레미안 아파트에 살았다. 딸이 있으셨고 중등교원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는데 계속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실 때 잔을 고르라는 언급을 하셨다. 술잔이 비어 있는 사람은 잔이 모자라는 사람의 잔을 다 따르고 건배를 하였다. 13일에 상무퇴임식이 있었다. 10분이 퇴임하셨고 담당상무였던 김상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4일에는 업무보고가 있었다. 새로운 상무로 강원지역본부장을 하셨던 전상무가 왔다. 1.12일에는 평촌누님네 손자의 첫돌잔치가 있었다. 엄청나게 거창하게 뷔페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14일에는 관악산 등산을 하였다. 그리고 1.15일부터는 결산감사를 중앙회 감사실로부터 받았다. 119일에는 부 전체 회식이 황토마루에서 있었다. 21일에는 승진시험이 있었고 출제위원으로는 김 차장 이차장, 박차장이 차출되어갔다. 진돗개 축협의 조짐이 좋질 못했다. 결국은 계약이전의 절차를 밟았다. 김팀장이 주도를 했다. 연초부터 혈변을 보던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일단은 대장내시경을 하기로 해서 날을 받아 했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결국은 항문의 문제로 결론 나면서 수술을 받기로 하였다. 큰아들은 시립대 경제학과에 합격을 하였다. 작은 녀석은 반포고에 배정을 받았다. 설 명절이라 두 녀석만 부산으로 보냈다. 명절 전에 수술을 받아 그냥 보내기로 하였다. 한 달여를 고생을 했다. 2월초에 환송 환영회가 있었다. 전출 승진자 등은 김병욱, 한명규, 정호철, 이인용이었고 전입자는 이, 신팀장이 새롭게 왔다. 화천양구축협의 출자금 보전이 하나의 이슈로 대두되었다. 양구축협 조합원의 입장에 서보면 화천 축협의 부실을 떠안은 것 때문에 출자금을 날리게 생겼고 자금지원이 원활히 이루어졌다면 파산상황이 아닐 수도 있었던 부분이 있었으나 법적으로나 기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회원지원부를 통한 간접적인 지원 등에 관해 협의를 했었다. 새로운 부장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춘천까지 출장을 가서 협의를 하였으나 뾰쪽한 수단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은 조합원 측에서 소송을 거는 바람에 유야무야되어버리고 말았다. 부장에게 요청이 온 라운딩을 팀장에게 미뤄 홍천 비발디에서 한번 골프를 했다. 그리고 위원장과 함께 두 팀으로 조감처랑 골프를 하기도 했다. 3월초에는 철원농협에 대한 경영진단을 갔다. 상무도 다르게 변경이 되었다. 전북지역본부장을 역임하신 이상무가 왔다. 철원농협에 대해서는 재무구조개선으로 위원회에 상정되었다. 4월에는 통영에서 경영관리 역에 대한 교육이 일박이일로 진행이 되었다. 부장이 만취한 모양이었다. 다음날에 이대우가 차로 대구까지 모시고 열차로 상경하신 모양이었다. 통영 신용보증기금 출장소의 김 소장과 만나 맥주를 한잔하며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부서 내에 T/F팀이 만들어 졌다. 2002년부터의 구조개선업무가 5년이나 지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새롭게 자금지원방식 등의 변경이 필요하다는 요청 때문이었다. 세계문학전접 120권을 헌책방에서 샀다. 그리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T/F 팀회의는 주기적으로 계속되었고 열띤 공방이 이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과감한 자금지원방식이 마련되었다. 이때까지의 자금지원과는 다른 획기적인 것이었다. 5월에 허선배의 모친상이 있었고 정차장과 KTX로 내려갔다왔다. 오랜만에 부산에 동문들이 다모였다. 울산본부장을 하셨던 선배도 보였다. 성선배의 사망도 있었다. 직장암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재발되어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병문안도 몇 번을 갔었는데 안타까웠다. 조직을 위해 엄청 애를 많이 썼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동삼태. 진안, 울릉농협 등에 대한 경영진단이 이어졌다. 집 문제는 처음에는 이곳저곳을 알아 보다 결국은 재계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3월초의 아이들 입학식에는 부모님께서 참석을 하시고는 내려갔다. 춘계체육행사를 북한산에서 하기도 했다. 족구를 했었고 영양탕을 먹었고 비주류는 등심을 먹었다. 집사람은 독서실을 끊어서 새벽2시까지 고군분투하였다. 6월초에 시험을 치렀고 12차 모두 한꺼번에 합격하는 영예를 안았다. 여름 방학 중에는 사당동 연수원에서 한 달간 전문직 교육을 받았다. 동기회 회계를 맡은 모양이었다. 34명이라고 했다 9월부터는 파견으로 교육청에서 근무를 하였다. 상무가 축하 꽃다발을 보내주었다. 8월말에는 광주 컨츄리에서 라운딩을 처남과 했다. 그리고 돼지국밥으로 식사를 했다. 연도 말에는 아파트 당첨이 있었다. 여러 군데를 하다가 겨우 당첨이 되었다. 계약금을 입금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국제예금자보호기구 회의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있었다. 여팀장과 부장이 다녀왔다. 11월에는 부산에서 있었던 시제에 참석하고 올라왔다. 큰 녀석을 데리고 갔다. 위원회 망년회는 동보성에서 있었다. 부 망년회는 27일에 했다. 10월경에는 시그너스 클럽에서 입사동기생의 회원권 확보 덕에 저렴하게 골프라운딩을 하기도 했다. 동기들 8명이 참석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도 저물고 2008년이 되었다. 부장은 농업금융부장으로 전출해 가고 충북부본부장을 하셨던 이부장이 왔다. 팀 편성을 하면서 기금관리팀 인원을 한명 줄이는 바람에 상반기 내내 곤욕을 치렀다. 일선 조합의 추가정산과 관련해서 지방 출장 중에 복귀명령이 떨어져 출장 중에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김 차장을 서무로 앉혔다 출제에는 이차장 류차장이 차출되어 갔다. 3급 승진은 정차장과 김차장이 발탁되었다. 고참이었던 김차장은 누락되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4급 직원의 이동도 있었다. 전 차장 기획실 김차장 서차장 상호금융 쪽으로 이동이 되었다. 유차장 이차장 김차장이 새로 왔다. 부장의 성격이 워낙 강하고 업무추진력이 대단해서 부원들이 상당히 애를 먹었다. 술도 두주불사(斗酒不辭)였다 부부장과 경기지본에서 같이 팀장을 하기도 했다. 1월에는 정기인사가 있었고 업무보고회의 가 이어졌다. 유능한 직원의 전출에 대해서는 상당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부장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팀장의 이동은 없었으나 조직의 개편이 있어 전략팀이 만들어졌다. 3월에는 우리은행 마포지점에서 집과 관련해서 중도금 대출을 받아 중도금을 불입했다. 대출금 이자는 건설사에서 부담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집사람은 정식발령은 아니고 파견으로 해서 영재교육과에 발령을 받았다. 상당히 아쉬워했다. 9월에 정식발령으로 직진과로 근무하게 되었다. 지역청이 아닌 본청에 바로 발령 받은 것도 큰 은덕이었다. 아들은 입영을 준비하게 되었다. 일 학기를 마치고는 휴학을 하고는 준비에 들어갔다. 운전면허를 학원등록해서 다녔다. 그리고 바로 운전면허를 땄다.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것으로 해서 친구와 둘이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고, 홍콩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8월에 부산과 광주를 들렀다가 광주에서 서울까지 자전거 투어를 45일간 하기도 했다. 아무런 지원 없이 지도를 보고 홀로 찾아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그래도 그것을 실행해 내었다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9월초에 집사람은 정식을 발령받아 정신이 없었다. 입영하는 아들을 내가 데려다 주기로 했는데 종로까지만 데려다 주고 홀로 입영을 했다. 동반 입대하는 친구가 있었고 여친이 있는 것 등으로 해서 홀로 굳이 간다고 했다. 오주간의 훈련소 생활이후 10월 중순 경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면회를 오라고 해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다녀왔다. 상당히 주눅들어있고 엄청 군기가 들어있는 이등병을 볼 수 있었다. 편지를 보내다가 겨우 한 달여 만에 만났는데도 무척이나 반가웠다. 포병이었고 문산 법원리 쪽이어서 가까운 거리였다. 외출 외박 휴가 등을 나오면서 차츰 군 생활에 적응을 해나갔다. 업무적으로는 3년째 관리팀을 맡다보니 어느 만큼은 익숙해져 있었다. 문제는 인원이 줄어 상당히 난처했다. 9월에는 베트남을 갔던 이차장이 돌아와서 보충이 되었다. 6월에는 서경양돈축협에 출장을 가기도 했다. 서울 외곽 쪽에 있는 조합이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곧 정상화가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4월에는 고교졸업30주년이 되어 홈카밍데이를 했다. 집사람과 같이 참여하였다. KTX로 가서 부산을 둘러보고 행사를 하고 모교를 둘러보고 올라왔다. 해운대 일류호텔에서 일박하고 오륙도를 돌아보고 올라왔다. 5월에는 친척들과 벽계계곡의 펜션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사촌형이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전주군산을 방문해서 라운딩을 하기도 했고 부서사람끼리 한 각출금을 내어 선운산을 일박이일 다녀오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휴일 호출이 있어 조마조마한 가운데 라운딩을 하기도 했다. 위원회의 현지방문이 평창에서 있었다. 한우에 저녁을 잘 먹었다. 상무님이 금주하셔서 대신 먹느라 많이 취하기도 했다. 고교 선후배 끼로 육인회를 결성해서 2-3개월마다 한 번씩 모이기도 했다. 대부분 30회형이 계산을 했다. 6월에는 위원장의 교체가 있기도 했다. S위원장이 오셨다. 신임위원장에 대한 업무보고가 있었다. 8월에는 무주리조트를 신청해서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아들의 입영을 앞두고 오붓하게 가족끼리 시간을 가졌다. 고향 산소까지 갔으나 수풀이 우거나 성묘는 하WL 못했다. 통영까지 가서 회를 포장해 와서 고속도로 중간에 휴게소에서 맛있게 먹기도 하였다. 춘계체육행사를 협대에서 하게 되었다. 조감처와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장의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끝나고 재호출이 있었다. 삼각지 중국집에 모여 혼쭐이 났다. 충북출신의 부장이다 보니 회를 즐길 줄 몰랐다. 오뉴월에는 대학동창들과 평창을 가게 되었다. 그전에 라운딩을 하고는 펜션에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왼손 가운데 손가락 끝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당했다. 부랴부랴 새벽녘에 올라와 수술을 받았고 이박삼일 입원가료를 했다. 그리고 그 후 1년 동안을 물리치료를 받았다. 큰일이었고 대단한 일이었다. 수술비 등은 유공자 덕으로 해서 부담이 없어졌다. 가을 체육대회 때에는 북한산에서 했는데 부장을 부추겨서 빨리 일어나도록 했다. 그리고 불광동으로 나와 호프집에서 직원들과 한잔을 더하기도 하였다. 부장이 본부장을 꿈꾸다 보니 욕심이 대단했고 의욕도 넘쳤다. 전임위원장은 9월부터 삼송 프로젝트의 감사를 맡기도 하였다. 교대역에 사무실이 있었다. 솔토라는 곳에서 몇 차례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목란에서 부서 내 경남출신 직원들과 점심을 하기도 하였다. 아들에 대한 편지 면회 등으로 하반기를 다 보낸 것 같았다. 면회를 갈 때 불판 등을 가져가서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하였고 부대 앞 찜질방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외박을 나올 때에는 일산에서 보내기도 하였다. 친목모임인 신륵사 사람들이 면회를 와 같이 장어로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갈릴리라는 곳의 장어 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11월에는 처갓집 가족행사가 있어 제주도에 가서 즐기기도 하였다. 싱싱한 갈치회와 고등어회를 먹고 동서와 처남 등과 라운딩을 하기도 하였다. 제주도에서 귀가할 때에는 바쁜 일이 있어 가족들은 남겨두고 첫 비행기로 귀로에 올랐었다. 연말에는 명퇴신청이 있었고 전임원의 사표제출이 있기도 하였다. 새로운 대표로 전남본부장이 되셨다. 부장은 소원대로 충북본부장으로 영전해 갔다. 부서에서 송별회를 하였고 감읍해 하였다. 댁에 까지 가서 한잔을 더하였다. 술은 밸런타인이 나왔다. 사모님께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남해 보리암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기도를 하였다고도 했다. 대단한 정성이었고 내조였다. 닥종이 공예를 하였다고 했다. 작품을 집안 여기저기 진열해 두었다.

 

2009년이 되었다.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부장으로 한부장이 왔다. 농민신문 쪽에 오래 근무하신 분이었다. 상당히 힘든 마라톤까지 했다. 충남 금산출신으로 지부장도 하고 왔다. 주무팀장으로 여팀장이 되었다. 승진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분루를 삼키느라 하루를 휴가 내었다. 각종 환송 환영회 참석을 자제했다. 김 차장은 순창으로 승진해 갔다. 주무 서무는 이차장이 되었다. 기금팀에는 이동이 좀 있었다. 정차장이 왔고 황차장도 왔다. 유차장이 다른 쪽으로 갔다. 직원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부서전체가 이사를 하게 되어 10층으로 옮겨졌다. 부장과 제일 먼 구석 쪽으로 자리가 되었다.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 되었다. 집사람과 같이하는 출근은 계속 이어졌고 퇴근은 따로 였다. 한 번씩 집사람이 회식이 있게 되면 차를 끌고 퇴근하기도 했다. 연초에 신록사회원 진씨네 외조부의 상이 있어 여의도 성모에서 문상을 했다. 업무보고는 부부장이 위원장에게 했다. 둘째는 고삼이 되었다. 막냇동생은 봄에 미국으로 전 가족이 떠났다. 애리조나 주로 연수를 겸해서 갔다. 서울에서의 대사관 인터뷰로 하루를 집에서 묵고 갔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김포공항 부근에서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3형제가 장어를 먹었다. 기금의 변호사는 임변호사가 관두고 또다시 여자변호사가 왔다. 김제출신이었고 성균관대를 나왔다. 전북대 의사와 결혼을 하였다. 보험요율의 인하와 목표기금제가 이슈로 제기되었다. 전농노에서 물고 늘어졌다. 좀더 낮추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해와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공제부분은 부부장이 직접 부장을 찾아가서 해명하고 왔다. 부장은 일본어에 능통했다. 아침마다 전화일어를 하고 있었다. 술은 그렇게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자산관리회사의 대출과 관련해서 질타가 있기도 하였다. 아산둔포조합장이 기금관리위원이 되었다. 농림부등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기금은 지속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채권 등으로 기금 운용방법을 다양화해서 수익률을 제고시킨다고는 했으나 만만치가 않았다. 3월에는 전임위원장의 모친상이 있어 진주를 내려갔다. 조합의 합병과 관련해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회원지원부와 맞물려 있었다. 서로가 책임을 지고 소신껏 하고자 하는 이가 없었다. 여러 가지 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농림부도 입장정리가 쉽지 않았다 전임부장 출신 본부장은 상무가 되었다. 그리고 전임부장이었던 김 부장도 상무대우가 되었다. 기획실장을 잘 수행한 공이었다. 전임부장은 회의 시에 한 번씩 사무실을 방문해 주곤 했다. 그리고 직원들과 다 일일이 악수를 하고 가곤 했다. 부실장 교육 중의 회식자리에 나서서 노래를 한 곡조하고 백만 원의 직상금을 받아서 그것으로 불우이웃돕기를 했다고 한다. 대단한 파이팅이라 할 만 하였다. 한 부지부장도 가끔씩 한번 사무실에 다녀가기도 하였다. 부장과 부부장 간에는 다소간의 알력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원만하게 이루어져갔다. 문제는 황차장이었다. 기금관리를 박차장이 가고 황차장이 맡았는데 자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부부장과의 불협화음이 컸다. 여러 가지로 미숙한 점이 많아 애를 먹었다. 이팀장은 친정이었던 조감처로 갔다. 직원들과 경기 북부 쪽에서 라운딩을 한차례하기도 하였다. 5월경에는 치루라 해서 대항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연초에는 위쪽에 문제가 있어 50여일을 한약을 먹기도 했다. 지난해 다친 손가락 관계로 해서 사무실 인근의 병원인 수지정형외과에 주기적으로 치료를 법으로 다녔다. 치료비는 무료였다. 약도 공짜였다. 체육행사를 북한산 쪽에서 하기도 하였는데 족구에서 특이하게 기금관리팀이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기금관리팀 출신 직원이 다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건강관리에 신경을 쓴다고는 하였지만 몸무게가 상당히 늘었다. 치아도 문제가 있어 치료를 받았고 인플란트를 해 넣게 되었다. 치료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요하게 되었다. 작은 녀석도 치아 교정을 하게 되어 여러 가지로 힘들게 했다. 옆에 팀장이 가만히 있을 경우 주무팀장에게 밀릴 수도 있음을 경고 하였고 김팀장이랑 한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송무 팀과 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였다. 구조개선 팀에서 몹시도 시샘을 하기도 하였다. 전과장이 충무로 지점에 있어 한번 충무로에서 술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직원이었던 은호 씨는 종로지점으로 갔다. 자재부 사람들과는 옛 자재과 사람들과 한 번씪 자리를 했었다. 6인회 모임도 한 번씩 하였고 주말에는 우면산을 자주 찾았고 서리플 공원도 한 번씩 산책하기도 하였다. 서강대 MBA출신 모임인 서일회가 서산에 모임을 갖기로 하고 라운딩을 나갔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결국 취소하고 스크린으로 만족해야 했다. 4월과 7월에는 출장이 있었다. 4월은 서울원예였고 7월에는 북광주였다. 서울원예는 집에서 왔다 갔다 했다. 북광주는 출장을 갔다. 서울원예 지점에는 윤지점장이 있었다. 서울지역본부 기획팀에 있었는데 조합장의 권유로 조합직원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경제 사업이 취약해서 애를 먹고 있었다. 본소의 건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 자기자본이 늘어나면서 순차본 비율은 상승하여 크게 문제될 소지는 없었다. 북광주는 관외 대출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지역본부 강 팀장이 나와서 술을 사주었다. 민어회에 맛있게 먹었다. 최팀장도 같이 나왔다. 상당히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새롭게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안철수의 저작과 학문의 즐거움이란 일본작가가 쓴 책이었다. 그리고 기적의 사과란 것도 있었다. H상무의 자제(子弟) 결혼식이 있었다. 식장에 다녀왔다. 하객이 엄청났다. 런던에 있는 성수 형과는 10월에 삼삼횟집에서 만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교육원 부원장으로 있었던 정선배가 상을 당해 강남성모에서 조문을 하고 한잔을 하기도 하였다. 양구대암에 관한 재산실사에 애를 먹기도 하였다. 워낙 손실규모가 커서 애를 먹었다. 그리고 함안과 강진 등에서의 부실조합들이 생겨났다. 김차장이 상을 당해 안동을 다녀오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올 때는 유차장이 운전을 했는데 속도위반 스티커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11월에는 마당놀이 구경을 부차원에서 가기도 하였다. 부장이 여팀장과 양차장을 데리고 돼지머리에 절을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12월에는 각종 망년회가 있었고 강릉에 집사람 행사를 위한 사전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사전 예약을 한 횟집에서 오징어를 한 박스 줘서 그것으로 신록사 사람들이랑 회식을 하기도 했다. 막판에 부장은 희망대로의 충남본부장은 안되고 준법감시인이 되었다.

 

직장생활 6 (2010 ~2013)

2010년이 되었다. 부서의 부부장은 가평지부장으로 갔다. 3년 만에 승진이었다. 나는 M급으로 승진이 되었다. 인사발령도 안성교육원 부원장으로 되었다. 한 팀장이 경남에서 올라오게 되었고 황팀장이 홍보실에서 새로 왔다. 부부장은 조부부장이 고양시지부에서 왔다. 기금관리팀은 주무 팀과 합쳐졌다. 집사람도 중부교육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작은 아들은 건국대에 합격해서 충주로 내려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기숙사를 배정받아 생활하게 되었다. 가족 넷이 각자 떨어져 생활하는 상황이 되었다. 집사람만 혼자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게 되고 큰 녀석은 군복무중이고 작은 녀석은 충주에 있었다. 나는 안성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주말에도 부부만 있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5월에는 교육원의 개관식이 있었다. 회장님을 모시고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2년에 걸친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이 된 것이었다. 원내에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새롭게 원장으로 오신 분은 의욕이 충만해 있었다. 연도 말 업적에서 또다시 전년에 이어 수위를 차지했다. 큰아들은 여름쯤에 전역을 해왔다. 6개월간은 서울시교육청에서 파트로 근무를 했다. 10월쯤에는 아파트의 입주를 해야 했는데 계약기간이 남아 3개월 정도는 지연이 되었다. 작은 아들도 1학기만 했고 7월부터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군생활보다 더 엄격한 듯했다. 간간히 면회를 가기도 했고 생활모습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수능을 치렀고 서울 쪽 대학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최종 합격하게 된 곳은 가톨릭 대학교였다. 입주예정일을 20101월로 잡았다. 조카가 빈 아파트에 보름정도 기식을 하기도 했다. 성대를 다니다가 다시 수능을 해서 연대로 입학하게 되었다.

2011

한 달여를 이사에 매진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교체했다. 가전제품 등 일체를 말이다. 세간이 보통이 아니었다. 가구도 새롭게 넣어야 했다. 카펫도 구입했다. 이사를 하고 새로운 주거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서초동의 생활이 익숙해질 만 했는데 또다시 옮겨온 것이었다. 농협 창립50주년이 되었다. 에세이 공모가 있었다. 존경하는 상사에 대한 글을 하나 썼다. 당선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계속 글을 일반 문예지에 공모했다. 그리고 연말에는 푸른 노을이라는 수필집도 하나 발간했다. 문예잡지 8군데 정도에 당선이 되었다. 조직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팀장 두 분이 지점장 등으로 나가게 되었고 교수도 몇 분이 교체되었다. 새롭게 젊은 피가 수혈되었다. 새로운 팀장 두 분은 예전에 다 교육원의 근무경험이 있었던 이여서 큰 무리는 없었다. 원장은 이제 직장생활을 마무리해야 할 시기가 되었음에도 별로 예전과 다름없이 충실하게 본분에 합당한 업무를 빈틈없이 수행하였다. 9월경에는 차를 새롭게 뽑았다. 9년 정도 탔었던 RV차량을 승용차로 바꿨다. 처음에는 배기량도 2400CC정도로 고려했는데 막판에 상당히 무리가 되도록 풀옵션에 주문을 했다. 차가 나오는데도 상당히 시일이 요했다. 최고급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적정수준이라 할만 했다.

작은아들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학교가 있어 등하교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집사람이 상당히 힘들어 했고 큰아들도 거리가 더 멀어지는 바람에 애로를 겪었다. 원장에 대한 퇴임식을 준비해야 했다. 하반기 6개월 정도는 팀장과 부원장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었다. 원장의 두 딸에 대한 결혼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내년도에는 사업구조개편이 이루어지는 것이 예정되어져 있었다. 32일부터 새롭게 조직이 변화되는 것이었다.

2012

새로운 원장이 왔다. 젊고 유능하신 분이 온 것이었다. 신선한 기운이 감돌았고 모두들 좋아하는 상사였다. 분위기가 쇄신되었다. 처음에 와서는 좀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곧바로 적응해 나갔고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나는 전출 희망을 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또 교육원 생활을 해나가야 했다. 큰아들은 복학해서 정상적인 학창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군복무를 하고 와서는 정신을 차렸는지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에 적응해 나갔고 학점도 일정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집사람은 중부교육청에 가서 16개월을 생활하고 온 이후 다시 본청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집사람이 여고3학년시절에 쓴 일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일이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기간중에 쓴 것이었다. 그 순수성과 진실성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것으로 광주시에서 감사패를 주었다. 집사람이 가지 못하고 장인이 대신 수상을 하는 영광을 안았다. 처제네가 안식년을 맞아 전 가족이 미국 애리조나주로 가는 바람에 처제네가 몰던 차를 인수받아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사람이 소형차를 운행하게 되었고 덕분에 대형은 교육원을 오가는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아들이 2학기에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1015일이었다. 입대할 때 데려다 주고 수료식 때 면회를 하러갔다. 그리고 연락을 주로 편지를 부대카페에 올리는 것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취했다. 교육원 생활은 크게 변화된 것 없이 평이하게 예전과 같이 일상적으로 진행이 되었다. 숙소가 좀더 편안해졌다. 한 해 동안 책도 많이 읽고 단문도 많이 썼다. 연초에 문예지에 두 군데 당선이 되었다. 문예지 외에 공모도 많이 해보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큰아들은 보험계리사 시험 준비를 했다. 4월에 1차를 보았고 합격했다. 2차는 8월말 경에 있는 것이었다. 1차를 합격하면 두 번의 2차 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받았다. 내년에 2차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학기는 학교를 다녔고 내년 1학기는 휴학을 하고 2차 시험에 전념할 계획이었다. 방학기간에는 기숙사를 신청해서 기숙사에서 공부를 했다. 학교로 왔다갔다 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교육원 업적 평가를 3년 연속 1등을 한 것으로 해서 12일 제주여행을 다녀왔다. 8월 말경이었다. 제주의 둘레길 7코스를 걸었다. 너댓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환상적인 여행계획이었고 모든 부분에 만족스러워할만 하였다. 전 직원이 사기 충천된 상태로 돌아왔다. 상호금융MBA과정을 청주교육원에서 이관 받아왔다. 사업분리로 인해 우리교육원에서 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2개월씩 상하반기 각1회씩이었다. 한번은 홍콩 등의 해외를 갔었는데 하반기에는 경영사정으로 인해 제주도를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13

중앙회에 전출내신을 내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망감이 무척이나 컸다. 남팀장만 중앙회로 전출이 되었다. 4급 교수도 전출입이 소폭으로 있었다. 정원자체가 줄어드는 바람에 전출은 많았고 전입은 적었다. 승진자도 배출되지 못했다. 5급 직원까지 전출하는 바람에 후유증이 컸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교육원에서 충분히 근무를 한 상태였던 만큼 당연히 어디로든 전출이 될 줄로 여겼는데 요지부동이었다. 6월에는 임관30주년 기념식이 K-호텔 연회장에서 있었다. 군회고기를 써서 제출을 했다. 책으로 나온 것에 실렸다. 83년에 임관을 했으니 햇수로 30년이 지나 강산이 세 번 바뀐 셈이었다. 모두들 건재했고 장년의 중후함이 묻어났다. 가족은 완전히 44색이 되었다. 집사람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큰아들은 학교 앞에서 기거를 했고 주말에 간혹 한 번씩 집을 오고갔다. 3월쯤에는 수필집으로 2권이 나왔다. 제목은 색다른 낯설음 저 너머였다. 작은아들은 군 생활에 여념이 없었다. 1,48월에 각각 한 번씩 휴가를 다녀갔다. 10월에는 면회를 한번 다녀왔다. 그리고 상병으로 진급했다. 이제는 반환점을 돌았고 얼마만큼 적응이 된 듯했다. 큰아들도 8월말에 2차 시험을 응시했다. 10월에 발표를 했는데 합격했다. 11월에 삼성화재에 면접을 보았다.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합격이 되면 내년 8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하는 것으로 될 것이었다. 10명 정도를 뽑는데 50명이 지원을 했다고 한다. 11월 말에는 부산으로 내려가 조상에게 묘사를 지냈다. 부모님 등 가족친지들이 모두 축하해 주었고 기뻐했다. 집사람은 91일부로 팀을 바꿨다. 초등 분야의 팀이어서 무척이나 힘들어 했는데 새롭게 배치 받은 부서에서는 큰 스트레스는 없는 듯했다. 8월 휴가 때에는 남도로 가서 가족들이랑 놀았다. 벌교 쪽 바닷가에서 여가를 즐겼다. 남자들은 골프를 이틀간 쳤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이제자한의 일상사라는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 본래 이러한 글은 단락형식으로 예전에 작성해 놓은 것을 좀 더 수정보완해서 이제 하나로 재편집을 한 것이다. 자한이라는 것의 의미는 별명으로 사용했었던 자그마한 의 줄임말이다. 호라든가 그런 것은 아닌데 어찌 사용하다보니 필명으로 쓴 것이 되었다. 이름은 여럿이 있었다. 아명이었던 성수, 봉구도 있었고, 법명으로 받은 철주도 있었고 작명가가 지어준 정한도 있었다. 언젠가 성명이라는 글에서 한번 피력한 바 있었다. 50여년의 생을 하나로 정리해 보니 오랫동안 살아온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인생길이지만 아무튼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신조로 삼아 적선여경(積善餘慶)하면서 올곧게 살아가길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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