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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을 향한 여정

학사여 영원히 웅비하라

by 자한형 2023.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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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여 영원히 웅비하라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었던 1983319일 우리는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영천에 소재한 제3사관학교에 머리를 짧게 깎고 입교를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입소하여 다시 정밀 신체검사를 받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군 보급품을 지급 받고 입고 있었던 사제복은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들녘에는 겨우내 자란 보리들이 막 새싹을 파릇파릇하게 피우고 있었다. 그 새싹을 보며 그것들이 자라 누렇게 익어갈 때쯤에 이곳을 나가게 되고 임관이 되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졌었다. 아직까지는 제대로의 군인이라 할 수 없었다. 후보생이라는 명칭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정식 계급장도 아닌 단풍소위라는 후보생 계급장을 달았었다. 처음 2주간은 제식훈련 총검술 등 연병장에서 이루어진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 먼저 온 군의관들이 휴일에 면회를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움이 일었고 언제 우리는 저런 기쁨의 순간을 맛볼까 하며 안타까워 했었다. 다음으로는 본격적인 사격 훈련, 각개전투, 독도법 , 화기학, 전술학, 등이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가며 교육훈련이 이루어져 나갔다. 독도법을 하던 시기에는 조그만 상점에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기도 했던 추억이 아련히 남아 있기도 했다. 독도법에 정통하게 되면 지도만 보고도 새소리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그 의미를 되새기면 절로 웃음이 나기도 했었다. 정말 그렇게 새소리 물소리가 들리는지 지도를 귓가에 대보기도 하는 동기생들도 있었다. 참으로 아득했던 옛날의 추억의 한 자락이 아닐 수 없다. 교육훈련이 끝난 밤에는 야간 집합이 있었으며 얼차려가 있었고 끝날 무렵에는 꼭 어머님의 은혜 노래를 불러야 했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를 때에는 눈물을 삼켜야 했었다. 4주가 지나고 나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후발의 특수병과 후보생들의 입교가 있었다. 포병 공병 기갑 헌병 등 여러 병과가 혼합된 것이었다. 이들은 후에 같은 3맥으로 분류되었고 같은 동기생으로 인정되게 되었다. 고경사격장에는 앞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었다. 이름하여 옥녀봉이라 불리는 곳으로 사격술이 저조했던 이들은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선착순을 당해야 했었다. 고속버스 얼차려도 있었다. 지난해 가을에 가보니 그렇게 고생했던 고경사격장은 체력 단련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민간에 위탁되어 관리되는 골프장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30년 전의 추억이 남아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렸지만 옛 시절의 추억을 되새길 만한 것들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각개전투를 할 때에는 봄비가 내렸다. 흙탕물 속에서 약진 앞으로를 하며 군복이 온통 흙으로 묻힌 가운데 야전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속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훈련하는 가운데에는 곳곳에 폭약이 폭발하고 있었고 머리위로는 기관총알이 날라 다니기도 했었다. 지옥 같았던 화생방 훈련에서는 가스실습을 하며 눈물, 콧물을 흘려야만 하기도 했었다. 제대로 된 가스를 맛보기도 했었다. 각각의 훈련 때마다 사진 촬영이 있었다. 단체로 찍은 부분도 있었고 개별적으로 훈련모습이 촬영되기도 했다. 4주 후부터는 영내 면회가 이루어지기도 해서 가족, 친구, 애인 등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기도 했었다. 훈련장까지는 언제든지 구보나 도보로 이동하여 체력단련이 생활화되기도 했었다. 매주 토요일 마다 연병장에서 열병 분열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3사관학교 5만평이라는 연병장에 전 장병이 학교장님의 훈시말씀을 듣기도 했었다. 입소한지 8주가 지나자 얼마만큼 적응이 되기도 했었는데 어떤 친구들은 귀가조치를 당하기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었다. 다음으로 가게 된 곳은 화산유격장이라는 곳이었다. 40여 킬로미터를 행군하여 도착했는데 그렇게 힘겹게 도착했음에도 도착하자마자 선착순을 돌아야 했던 것에는 치를 떨어야 했었다. 다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행군이었다. 군장을 메고 먼 길을 걸어야 했었다. 휴식시간에 총을 함부로 다루었던 것이 지적되어 5킬로미터의 역행군을 하는 고역을 치루기도 했었다. 2의 생명인 화기를 그렇게 내팽개치는 것에는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했었다. 학생대장의 진노는 하늘을 찌를 뜻했고 항존전장(恒存戰場)의 철칙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가상하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훈련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가 전쟁터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런 가상 상황을 염두에 두고 리더로서 소대장으로서 행동하고 움직이고 지시하고 명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굴의 피부껍질이 세 번이나 벗겨지는 일이 있었다. 거의 12주간의 훈련이 뛰어다니는 속에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1200키로미터를 달렸다고도 했다. 서울부산을 세 번 가는 거리였다. 드디어 모든 훈련이 종료되고 장교로서의 임관이 있었다. 6. 11일 가족들과 함께 성대한 임관식을 가지게 되었다. 12주간의 노고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고 세상천지가 모두 내 것인 것만 같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다시 또 광주에서의 교육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관식 전날에는 전야제가 있었다. 어떤 동기생은 톱으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었고 또 어떤 동기생은 가고파라는 가곡을 부르기도 했었다. 온통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이던 때였다. 12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611일에 임관식이 있었다. 드넓은 연병장에서 임관을 하게 되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분열식을 했었고 행진을 했었다. 5만촉광의 다이야 몬드를 달기 위해 흘린 피와 땀은 소중한 결실로 열매를 맺었다. 이제는 제대로 된 국제신사 장교로서 발돋움을 하게 된 것이었다. 세상에 거칠 것은 없었다.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충만되어 있었고 자부심과 긍지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앞으로 전개될 36개월간의 군 생활이 탄탄대로일 것 같은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었다. 임관식 후에는 23일간의 휴가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영천에서 임관식을 가졌던 때로부터 30년이 지났다. 한세대가 지날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모든 이들이 머리가 희끗희끗해졌고 어떤 이는 손자를 볼 나이에 이르렀기도 하다. 2년 전에는 드디어 우리 학사장교 출신 중 최초의 장군이 탄생하기도 했다. 또 어떤 동기생은 아들과 며느리를 다 학사장교 후배로 두는 일도 있었단다.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후배 여러분들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고 여겨진다. 앞으로 승승장구해서 사단장도 되고 군단장 군사령관까지 배출되는 영예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누님처럼 그렇게 세상살이의 황금기를 다 보낸 듯하다. 어떤 이는 아직도 왕성한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은퇴 후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의 앞날은 왕성하게 꿈과 이상을 좇아 열심히 생활했던 때를 지나고 있다. 이제는 마무리의 삶을 정리해야 하고 노년을 준비해야할 때가 되었다. 이상과 야망에 불탔던 시절의 얘기를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시기가 가까워오고 있다.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뜨거웠던 피와 땀을 쏟았던 그 화려했던 봄날의 찬란했던 영광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반추해야 하리라. 학사 3기의 뜨거운 열정과 포부가 계속적으로 면면히 이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우리는 여전히 동기생과의 우정을 나누고 있고 아득한 시절의 추억을 나누고 옛정을 공유하고 있다. 학사장교라면 잊지 못하는 학사가의 학사여 영원하라는 가사처럼 그렇게 우리의 끈끈한 전우애는 영원무궁하리라. 학사3기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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