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을 오르며
보름전쯤의 휴일이었다. 평소 목포 선원을 다니던 집사람이 휴일날에 계룡산 밑에 있는 신원사에 공을 들이러 간다는 것이었다. 졸지에 기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냥 선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일행들과 같이 가는 일정을 잡는 것이 정상인데 굳이 번거럽게 다시 또 서울로 왔다가 계룡산 밑의 신원사로 가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것도 일행과 어떻게 조우하게 될 것인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원장이었는데 서울에서 같이 출발하게 되거나 아니면 정안정도에서 같이 만나서 들어가게 되는 두가지 방안이 있었다. 그것은 그날 아침에 결정이 되었다. 만남의 장소는 정안농협 하나로마트 앞에서 만나는 것으로 정해졌다. 신원사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은 11시 30분까지였다. 집에서의 출발시간은 8시 경이었다. 여러 가지 길이 있었으나 일단은 그냥 가장 빠른 길이고 통상적으로 가야하는 길로 잡았다. 집을 나서서 88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남대교 입구에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도로 사정은 양호한 편이었다. 휴일이라 상당한 정체가 있을 것으로 걱정을 했었는데 그런대로 무난하게 달릴 수 있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안성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국밥을 먹었다. 원장에게 연락을 취했더니 거의 다 도착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중간에 만날려고 했던 것은 결국 무산되었다. 다시 한시간여를 더 달려서 겨우 정안부근에 도착이 되었다. 그리고 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제는 신원사로 향하면 되었다. 거의 다 온 상황이어서 20분 남짓 가면 되었다. 신원사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묵밥집 가요’라고 외쳐야 했다. 입장료가 있었고 입장표를 끊어야 했기 때문에 다른 목적으로 입장을 하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차단을 풀어주었다. 집사람과 원장을 내려주고 12시 경에 다시 조우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차에서 물을 챙겨넣고는 본격적인 등산에 들어갔다. 예전에 한번 사무실에서 하는 행사에서 갑사에서 동학사 쪽으로 등산을 했던 기억이 떠올려졌다.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던 한 직원이 있었던 듯했다. 남매탑에 대한 전설 얘기가 고교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백제의 왕족으로 태어났던 한 사람이 있었다. 절에서 수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느날 호랑이를 만났다. 보니 입안에 가시가 박혀 여러 가지로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수도승은 호랑이에게 다가가서 가시를 뽑아주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어느날 젊은 처자하나를 데리고 왔다. 수도승은 아가씨를 보살펴 주다가 절에서 내려보냈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집안에서는 다시 스님에게로 보냈다. 그러자 스님은 오누이로 의를 맺자고 하고 평생을 같이 수도를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열반에 든 두 스님에게서는 많은 사리가 나왔단다. 그래서 그 사리를 보관하는 탑을 조성하게 되었고 두 개의 남매탑을 만들게 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연이 아닐 수 없었다. 계룡산은 우리나라 4대 명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대전과 인접해 있고 논산 공주 등과도 접해있는 산으로 국립공원으로 되어 있다. 신원사는 보덕이라는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고 중악단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산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날도 보니 많은 산악회 사람들이 와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었다. 아예 산신제를 지낼 수 있는 장소가 별도로 마련되어져 있기도 했다. 일단 큰길로 쭉 따라서 올라갔다. 차량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등반을 위한 준비로 해온 것이라고는 등산화를 신었다는 것과 물을 한통가지고 가는 것 이외는 준비된 것이 없었다. 맨 위쪽에 고왕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그리고 올라가야 하는 길은 이정표로 되어 있는 것이 연천봉이라는 곳이었고 2.7Km로 나와 있었다. 시간이 한시간 30분 정도 밖에 허용되어지지 않았기에 부지런히 갈 길을 재촉해야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직 봄기운을 느끼기에는 기온이 무척이나 낮았다. 아직도 겨울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으나 직접적으로 봄을 느끼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드문 드문 등산객들이 있었다. 그래도 유명산인 점을 감안하면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 한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의 돌로 된 산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했다. 관절에 상당한 무리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연천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중간 중간 마다 이정표가 있었고 각종 산악해에서 걸어놓은 리본이 길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막판에는 가파른 곳이 나타났다. 숨이 찼다. 급경사였기에 나무로 된 계단이 놓여져 있었다. 연천봉에 오르는 길목에 세갈래길이 나왔다. 한쪽은 갑사였고 또 한쪽은 동학사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삼거리 길에서 여러 곳에서 온 등산객 일행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천에서도 왔고 여러 가지 이름의 산악회에서 계룡산을 찾은 것 같았다. 거의 한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12시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어려울 듯했다. 그러나 걸음을 재촉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갈림길에서 목을 축이고 셀카를 찍고는 급하게 하산을 서둘렀다. 혹시나 하고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낯익은 곳은 아니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제법 넓은 개활지가 있었고 그곳에서 막걸리도 한잔 했었는데 전혀 그럴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본래 계룡산은 영험한 곳으로 이름이 나있고 이곳을 도읍지로 정해야 하고 그리고 언젠가는 정씨가 나라를 이끌 것이라는 것으로 예언이 되어져 있다고도 한다. 아무튼 여러 가지 도를 닦는 사람들이 곳곳에 즐비한 그런 곳으로 알려져 있어 보통사람들은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거의 다 내려오고 보니 거의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법회나 불공도 늦어졌는지 12시 40분이 되어서야 식사를 하러 간다고 해서 일행들이 법당을 나오고 있었다. 경내에는 신원사의 사계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것을 전시하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몇 컷을 담았다. 식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다. 원장의 사정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아들이 공주부근의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를 쫓아 의사로 진로를 정했는데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일요일마다 아들의 학원수업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7시 경에 출발해서 아들의 과외를 시키고는 오후쯤에 귀경하는 것을 매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고 지난해에 이어서 올해에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 서울 학생들은 매일 그렇게 뒷바라지를 하는 것에 비해서는 일주일에 한번이니 훨씬 가벼운 일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계룡산을 오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20여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선명하게 추억이 되었다. 이제는 곧 봄이 닥칠 것이다. 봄은 본래 순식간에 지나는 것이 한 특성이다. 요즘은 하도 기후변화가 심해 봄과 가을이 없고 여름과 겨울만 남은 듯한 느낌도 든다. 어쨌든 사계절을 만끽하며 사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유럽쪽이나 북구에 비하면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것도 무척이나 큰 축복일 수 있다. 봄날은 간다. 새로운 기분과 호기로움을 가지고 봄을 만끽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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