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베일 속의 백합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이란 제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부제로 언급된 것이 메디치가의 사람들이었다. 350년을 이어온 중세 메디치가의 얘기에 얽힌 것이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라는 곳에 근거지를 두었던 메디치가는 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가 발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기억해야하는 핵심은 네 가지로 축약된다. 첫 번째는 손가락을 기억하라. 두 번째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는 정면 돌파하라. 세 번째는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라. 그리고 마지막은 당나귀를 타고 간 코시모를 기억하라는 거였다. 메디치가는 인문학을 열렬히 지원했고 걸출한 많은 인물들을 지원해서 문예부흥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가문이 지원했던 인물이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 유수한 인물들이었다. 이로 인해 역사의 수레바퀴는 대전환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교황 두 명과 또한 왕비 두 명을 배출해서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긴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초로 식사를 할 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게 했었고, 하이힐도 처음으로 도입하게 했으며, 오페라를 탄생하게 만들기도 했다. 존 보일(1755년)이라는 이가 메디치가에 대해 남긴 말을 한번 음미해 보자. “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살아간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한편으로 그들을 존경하고 심지어 경외감까지 들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충격적이고 심지어 공포심까지 생길 것이다.” 처음 메디치가의 시작은 시골의 조그만 농장주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차에 은행업과 모직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은행업에 관여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의 핵은 금융업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모든 재산을 팔아 피렌체로 이주했다. 영국, 네덜란드에서 양모를 수입해서 피렌체에서 염색 가공해서 다시 전 유럽에 판매를 해서 수익을 올렸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메디치가는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발다사레 코사라는 이가 나타나게 된다. 나폴리 출신의 해적이었다. 그러던 그가 명문 볼로냐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학위를 매입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추기경을 매입한다. 그럼으로 필요한 자금을 메디치가의 은행이 대출하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첫 메디치은행의 고객으로 거래를 개시하게 된다. 그리고 1410년에 교황에 등극한 교황요한은 23세로 취임한다. 1378년부터 1417년까지 30여 년간은 카톨릭 교회의 분열의 시기였다. 세 명의 교황이 각각 활동을 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개입으로 교회통합을 위한 회의가 독일 콘스탄체에서 개최되고 1414년 마르틴 5세가 정식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요한 23세는 불법행위로 체포된다. 35천 플로린의 막대한 벌금도 함께 선고된다. 당시 중산층의 연수입이 150플로린이었다. 벌금액은 233년간의 수입총액에 맞먹는 것이었다. 메디치가문은 이를 대납한다. 그리고 망명생활에 필요한 자택과 생활비를 지원한다. 그리고 1419년 교황이 사망하게 되자 성 세례요한 세례당안에 교황 영묘를 제작해서 안치한다. 임종 직전 요한 23세는 자신의 마지막 재산인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한다. 이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손가락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메디치가문의 시작을 보라. 메디치 가문은 결코 한번 맺은 신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두 번째는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건 정면 돌파를 선택하라.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이의 얘기이다. 1478년에 파치의 음모라 해서 나폴리의 국왕 페란테가 사주해서 로렌초를 암살하는 시도가 있게 된다. 부활절 대성당에서 암살기도가 있었다. 다행히 로렌초는 살해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나 대신 그의 동생 줄리아노가 살해된다. 그런 암살기도가 있은 이듬해에 페란테는 나폴리 교황군 연합군이 피렌체를 포위하게 되면서 항복 위협을 가하게 된다. 그때 로렌초는 배를 타고 프랑스로 원군을 구하러 간다. 그때 한 말이다. “ 친애하는 원로 여러분, 위기와 절망에 처한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 이제는 말로가 아니라 행동을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우리 피렌체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다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지금, 피렌체가 더 큰 재난에 봉착하기 전에 제가 목숨을 걸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폴리로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이들이 들끓는 그 곳으로 제가 가겠습니다. 우리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적의 손에 저를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나폴리 국왕이 우리 도시에서 자유를 뺏어갈 계획이라면 피렌체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재앙이 닥치기 전에 제가 먼저 그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겠습니다. ” 로렌초의 정면 돌파는 결국 원군을 데리고 오게 되었고 위기의 피렌체를 구하게 된다. 그것을 묘사한 것이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라는 것이다. 지혜와 승리의 여신 팔라스(아테나)가 야만과 폭력의 켄타우로스를 제압하는 것이다. 9.11테러가 있었을 때 부시대통령이 그 현장으로 가서 외쳤다. “이 건물을 무너뜨린 사람들이 우리의 이 함성을 듣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그것에 굴복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를 보여준 사례로 손꼽힌다.
다음 세 번째는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라. 이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라는 왕비에 관련된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인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언제나 기억했던 진정한 메디치 가문의 딸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1533년에 결혼한다. 피렌체 가문의 몰락과 교황의 서거로 불행한 결혼생활이 이어진다. 그 이탈리아 여자라고 불렸고 시댁의 핍박을 받게 된다. “이 계집아이는 완전 알몸으로 내게 왔구나” 라고 프랑수아 1세의 한탄이 이어졌다. 앙리 2세는 미모의 애첩인 디안과 주로 생활을 하게 된다. 왕비가 의지했던 이는 세기적인 점성술사 노스트라 다무스(1503-1566)였다. 그의 예언은 이랬다. “ 젊은 사자가 늙은이를 눕히리라. 싸움처에서 이상한 결투로 황금우리 속 그의 눈을 찌르리라. 두 집단의 하나 그리고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녀는 그의 아버지가 헌정 받았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애독자였고 실천자였다. 최악의 상황에 처했지만 굳건히 자존감을 지켜갔고 피렌체가문의 딸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프랑스 왕비로서 또는 섭정왕후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종교전쟁의 와중에서도 30년 동안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통치했었고 지배했다. 부군이었던 앙리 2세의 죽음이후 단호한 행동으로 왕실과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아들 세 명이 차례로 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영국,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왕실과 사돈을 맺게 된다. 그녀의 좌우명은 “나는 빛과 평화를 가져온다.” 그녀는 항상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거의 웃지도 않았다. 그녀의 별명은 검은 베일 속의 백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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