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왜 수행을 할까?
왜 다음 생애를 위해 현생에서 힘들게 수행자의 길을 가야하지?
수행을 시작하며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의문입니다.
내가 수행자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그간 살아왔던 50년 남짓한 나의 삶을 10년씩 나누어 정리해 보면....
철없이 유복한 줄 알고 살았던 유년,
지독한 가난으로 인고의 시간에 이어 애 늙은이로 보낸 10대,
혼란과 혼돈이 가득 찬 절망의 시간 20대,
물질적ㆍ정신적ㆍ체력의 고갈 속에 살아온 30대,
한숨 돌리며 주변을 조금 볼 수 있었던 40대,
늦게나마 내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난 50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6학년말, 아버지의 경제적 몰락으로 인해 우리 집은 지독한 가난에 빠졌다. 엄마는 나를 겨울 방학 두 달 동안 친척집에 도우미를 보냈는데 훗날 왜 보냈느냐는 나의 질문에 엄마는 ‘친척집에 가서 일손을 돕고 있으면 굶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보냈다고 했다. 중학교에 진학 할 때는 ’정상적인 중학교에 보내기 어려우니 전수학교에 가거나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니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다. 난 단호하게 중학교에 갈 것이라고 주장했고, 언니는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양장기술을 배우러 서울로 떠났다. 그 후 엄마는 집안의 모든 걸 놔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 드셨고, 집안일은 고스란히 내 차지였다. 학교를 마치면 어린 동생 4명을 돌봐야 했고, 엄마의 장사 일을 도와야 했다. 주말이면 목욕대야에 한 가득 쌓인 빨래는 한나절을 해도 끝나지 않았다. 집안이 어려워진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옷을 사 달라거나 용돈을 달라고 해 본 기억이 없다. 엄마가 힘들까봐 나의 이런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밝고 명랑하고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나의 욕망을 절제하며 참고 견디며 살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가정방문을 한 담임선생님은 집안사정을 살펴보시고 인근의 실업계 고교인 ’OO 여자상업고등학교‘의 진학을 권했다. 동생도 많고 가정도 어려운데 실업계 고교에 진학해서 3년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빨리 돈 벌어서 집안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그 즉시 나는 ’전 인문계 고등학교 갈 겁니다.‘ 라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어려운 형편으로 언니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상태여서 우리 집에서는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나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조언도 해주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여고 시절은 참 고달프고 어려움에 부딪쳐 좌절도 많이 했지만, 당시 선생님들을 통해 비전과 희망을 얻었던 것 같다. 고 3때 518을 겪으면서(참고로 나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518 여고생 일기의 주인공이다) 나의 정체성이 통째로 흔들렸고, 암울한 사회에 대한 비관, 기득권자와 화이트칼라에 대한 염증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어찌되었든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내가 학부를 마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은 납부금이 저렴하고, 국공립 교사발령을 보장한다는 것이 장점이었으며, 어려운 집안 사정상 내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수학교육과를 선택했다. 당시 서슬이 퍼렇던 5공화국 시절, 과외 금지에도 불구하고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엄마에게 드렸고,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납부금을 내야한다는 심적 부담을 늘 안고 살았던 것 같다. 518 당시에 도청에 있었던 것과 함께 했던 사람들을 배신하고 살아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지만 회피조차 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러한 심적 갈등과 부담은 이후 내 삶에서 언제나 나를 괴롭혔던 것 같다. 대학생활은 20대의 혼란이 그대로 반영되어 좌충우돌하였으나 부모님에게는 우리 집의 첫 대학생, 효녀, 장학생이라는 큰 자랑이었고, 동생들에게는 꿈을 갖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길을 찾기 위해 대학 4학년 때 대학생 성경읽기선교회(UBF)의 한 계파인 SBF에 들어가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였으나 답을 찾지 못하였고, 언젠가는 이상한 종교집단에 잠시 머무른 적도 있었으나 비논리적인 사고 체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만 두었다.
대학 졸업 후 교사로 발령받고 전라도 처녀와 경상도 총각이 만나 결혼한 후 십수년간 주말부부를 반복했던 쉽지 않았던 결혼생활과 출산, 시댁의 몰락과 사기를 당해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던 가정경제 등으로 결혼생활은 마음 놓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어려운 경제 사정을 회복하기 위해 밤이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문제집을 썼다. 너무나 바쁘고 삶이 힘들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30대를 보냈다.
이런 속에서도 교사로서의 나의 생활은 학생들도 잘 따르는 편이었고, 가르치는 것에 보람과 재미를 느끼며 대체로 수월하게 잘 해 나가고 있었다. 수학사랑 저널 편집장, 수학교사모임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전국으로 수학교육 강의도 다니면서 수학교사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아이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았고, 아이들과의 거리감이 크게 느껴질수록 교직에 대한 매력이 떨어졌다. 교직을 전환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장학사로 전직하게 되었던 것 같다.
40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금 안정된 삶을 찾고, 지난 과거의 힘든 기억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 묻었다. 50을 넘어서는 과거의 힘들었던 삶은 까마득히 잊고, 현실에 안주하며 그저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친정 동생인 선암당 선생님이 “언니, 수행을 한 번 해 보는 것이 어때요?” 라고 권했다. ‘이제야 겨우 삶에 안락함을 느끼기 시작하며 살고 있는데 수행을 하면서 다시 힘든 삶을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 약간은 빈정거리며 “수행을 하면 뭐가 좋은 데?” 라고 반문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어요. 언니가 하면 참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했다.
‘얘가 아직도 세상을 덜 살았구나. 세상이 어떻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니? 나는 돌아가는 세상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아. 아직도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이상 속에 사는 구나. 이상한 곳에 빠져서는.... ’라며 오히려 동생을 걱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작년(2013년) 여름, 선암당 선생님에게 인도 성지 순례를 함께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교육청에서 맡은 바 일이 많아 매일 밤 11시가 다 되서야 퇴근하고, 토요일에도 근무를 하며 시달리고 있을 때라 당연히 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더 길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12월 쯤 다시 스승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인도 성지 순례인데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이전 부서에서 근무했더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지만, 새로이 옮겨진 부서는 현장 지원 중심의 업무를 하기 때문에 일정을 조정하면 가능 할 것도 같았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생각지도 못한 인도 성지 순례를 함께 했다.
성지 순례에서 선배 도반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의문을 가졌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나도 수행을 하게 되겠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과 내 인생의 삶에 대한 또 한 번의 전환을 맞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마음에 품고 순례를 마쳤다. 나는 그때까지도 퇴직 후의 삶을 생각해서 평생교육이나 청소년 심리상담 분야로 박사과정을 하려고 했었는데 그러한 생각을 접고, 2014년 5월 수행자의 길을 택했다. 매주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야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으나, 삶에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마음먹고 스승님께 전화를 드렸다.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2014년 5월 17일부터 매주 토요일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정하고 목포를 향한다. 내 생애에 온 하루를 나를 위해 써 본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수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될 때쯤부터 집에서 수행할 때 문제가 생겼다. 가슴에서 울컥울컥 울음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원인 모를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 주 선원에서는 스승님의 말씀을 듣기 어려울 정도로 하루 종일 눈물을 흘리고, 업무하는 과정에서 잠시 짬이 나면 눈물이 나려고 해서 난감하기도 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날 무렵 간헐호기1을 하면서 선원에서 시작된 눈물이 일주일 내내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과거의 내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감정을 표출할 줄 모르고 울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다가, 더 나아가 518 때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이 나타났고 수행을 열심히 해서 518 당시 전남 도청에 있었던 주인없는 시신들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가도록 빌어 주겠다는 생각까지... 과거가 하나씩 떠오르며 한없이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이런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맘이 편해지고 가벼워지고 있었는데 흉부호기1을 했다. 눈물콧물 다 흘리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참을 수 없는 기침이 나오면서 가슴에 맺혀있는 것이 토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덮고 살았던 힘든 과거가 다시 떠오르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내 마음에 깊은 평온이 찾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나는 그렇게 천천히 수행자의 길을 가고 있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또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설레인다. 또한 수행이 더 깊어지면 ‘왜 수행자의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릴 것이라 기대한다.
깊은 인간애를 갖으신 존경하는 무산본각 스승님을 믿고 따르며, 죽을 때까지 몸으로, 호흡으로, 마음으로 닦아, 수행은 고행이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걸 느끼며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설레임을 맛보려 한다.
2014년 8월 5일
큰 바람 지나간 서해 바다 바라보며 주 소 연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