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분을 그리며
내가 그 분을 만나러 간 것은 2013년 말쯤이었다. 평소에 안면은 있었지만 직접 이렇게 대면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불쑥 찾아 뵈었는데 금방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잠깐 산책을 나가신 듯했다. 연락번호를 남겨두고 차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비서인 듯한 여직원으로부터 잠시 후 연락이 왔다.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당부를 드렸다. 참으로 푸근한 인상을 주었고 온화한 모습이 덕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얼마후 그분 밑에서 같이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굳이 나를 믿어 준 데 대하여 깊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쯤에 농협에 입사를 했다. 본래 전공은 영어교육이 전공이셨는데 엉뚱하게도 본래 꿈이었던 선생님의 꿈을 접고 농협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부산에서 조금 사시기도 했단다. 학창시절에 소를 먹이러 갔다. 소가 풀을 뜯어 먹게 내버려 두고 신나게 친구들이랑 놀았단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소가 기차길로 내려가 버린 것이었다. 결국 소는 기차에 치여 죽고 말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혼이 났다. 그런데 죽은 소는 결국 잡아서 동네 잔치에 쓰여지고 말았다. 그 분은 그 때의 그 소고기 맛을 잊지 못한단다. 기차통학을 하며 어렵사리 학교를 다녔다. 미군들에게 초코렛을 구걸하기도 하고 그냥 가는 미군을 향해 삿대질도 해댔다. 그것을 본 여선생님에게 학교에 가서 혼줄이 나기도 했다. 서울 삼청동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독서실과 학원을 오가며 공부를 했다. 그 때의 사람 중에는 나중에 국회의원도 역임하여 야당 대표를 지낸 분도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당연히 학교 선생님으로 가는 것이 당연지사였는데 우연찮게 농협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로 발령을 받아 갔는데 운좋게도 처음부터 조사부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무척이나 콧대가 높은 선배들 때문에 곤욕도 치렀고 마음고생도 심했단다. 얼마 후 승진을 해서 포항으로 내려갔다. 지부장이 하늘같은 분이었다. 하필 또 경남출신이었던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요원이 없다는 전제하에 해외 파견을 가는 것에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다. 그래서 이태리에 가서 국제기구에서 파견근무를 1년정도 하고 왔다. 그리고 대만 근무를 하다 결국은 중국 사무소장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국제 금융과 관련된 큰 미제 사건이 있었는데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변제를 받아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귀국해서 얼마후 승진이 되었다. 당연히 고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얼토당토않게 청도 군지부로 가게 되었다. 지도사업을 하면서 농협인으로서의 보람을 느꼈고 정말 열심히 농업인의 편익증진을 위해 몰두했다. 휴일이면 들녘에 나가 농업인의 애로을 청취하고 그 애환을 들었다. 그러자 관내 조합장들이 난리가 났단다. 자신들도 못하는 일을 지부장이 하고 있으니 대략난감이었다. 1년 후에 다시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 지부장을 하는 동안 원자력 방패장의 건설자금 유치하는 큰 공적을 세웠다. 특별회계가 지방은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렬하게 뚝심으로 밀어붙이신 결과 그 큰 일을 해냈다. 조합장들을 이끌고 중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여직원들이 재직중의 사진을 모아서 앨범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지부장 시절에는 머리가 백발이어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후 회원지원부장, 상무를 거쳤다. 기획상무를 하면서 워낙 어려운 시기여서 거의 365일을 사무실에서 지냈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엄청나게 후유증이 있어 고생을 하기도 했었다. 결혼은 고향의 여자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백년가약을 맺었다. 해외에 나가면서 자연히 사모님은 업을 접었다. 아이들은 아들과 딸 둘을 두었다. 중국에서 학업을 하다 대학은 한국에서 유수한 곳을 나왔다. 그리고 아들은 대기업에 딸은 언론사에 취업을 해서 잘 근무하고 있다. 아들은 작년 11월에 인천 교육청에 교육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처자를 며느리로 맞았다. 늦은 결혼이어서 무척이나 애를 태웠는데 성혼이 되어 안도했다. 작년도에 항상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던 장인이 타개하는 바람에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고향에 가면 아주 허름한 횟집이 한 곳이 있단다. 경주 인근에 있는 조그만 포구인 감포항 근처인데 그곳에 가면 주인이 직접 잡은 제대로된 자연산 회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정말 순수 그자체 회이고 자연산 그 맛을 볼 수 있단다. 아직까지도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 했었던 대만의 사람들과는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한번씩 내왕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자기의 소신을 가지고 조직의 미래를 위해 매진하고자 했고 공명정대하고자 했었던 이로 정평이 나 있었다. 몸은 단구이고 왜소한 모습이지만 대단한 강단을 가지고 있었고 의리가 깊은 사람으로 지인들과 우의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애로를 겪기도 했지만 항상 의연한 자세로 대처해서 만사를 해결해 나갔다. 인문학을 했던 이답게 한번씩 멋진 시귀(詩句)도 인용하기도 하고 멋진 얘기도 자주 해 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런 시였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또는 “6월을 드립니다” 등이었다. 조사부시절에서 학업을 계속해서 박사학위까지 갖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분이셨다. 중국에 정통해 있고 해박함을 갖고 있었지만 나서지도 않고 자신이 중국에 대해서 잘 안다고 언급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워낙 중국이 넓은 곳이라 쉽사리 언급하는 것이 망설여진다는 것이었다. 한 때 야인으로 1년 반 정도를 쉬시기도 했지만 다시 연수원장으로 부임해서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항상 웃으라고 얘기하고 소중한 인연을 잘 간직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자신의 식탐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몸 건강을 소중하게 유지하게 하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를 보았다. 휴일이면 청계산을 오르내리시고 주말농장에서 소일을 하기도 한다. 한때 어깨에 부상을 입어 골프는 중단을 한 상태다. 항상 소탈하게 평안하게 걷는 것을 좋아 하시고 천엽을 좋아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스스럼이 없고 소탈한 품성을 보여주었다. 보신탕 등도 일체 즐기지 않는다. 음식을 가리는 것은 아닌데 맛있는 곳을 찾기를 좋아 하신다. 요즘도 한번씩은 고향을 방문하기도 하고 며칠을 지내다 오기도 하는 형세였다. 노후를 걱정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시골로 귀촌하셔서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생활할 것을 원하시는 듯하다. 결코 큰 소리를 내시는 법도 없고 화를 돋우는 적도 없이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매진하고 진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직업인의 표상을 보는 듯하다. 원장을 마치게 되면 결국 전국을 유랑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구가하리라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항상 건강하시고 밝은 모습대로 생활하시고 활기찬 노후를 보내시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