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등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휴일에 우리 부부는 부석사로 향했다. 거의 한시간여가 소요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길을 나섰던 터라 대략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복장부터가 나들이 복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집사람이 전날에 문상을 갔던 길이었기에 복장은 더욱 가관이었다. 결국 허름한 나의 와이셔츠를 그나마 다림질해서 입고 있었던 형편이었다. 일단 시장통에라도 들러 간편복을 사야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그냥 부석사에 당도했다. 미리정보를 알았더라면 들러야 할 곳이 소수서원이었는데 워낙 경황이 없다보니 그냥 바로 부석사로 올랐다. 가는 길 국도는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한여름의 청취를 느낄 수 있었다. 입장권을 끊고 입장을 했다. 하필 지갑을 놓고 오는 바람에 모든 계산과 비용부담은 집사람의 몫이었다. 일단 들어서자 마자 문화해설사가 설명을 해 주었다. 부석사의 사찰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그 사찰 내부로 보니 다섯분의 부처님이 앉아 계셨다. 오로지 지금 서 있는 곳에서만 관측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사명대사의 얘기도 있었다. 사찰 정원에는 항상 그렇듯이 온갖 꽃들이 난만해 있는 상황이었다. 한쪽편에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기도 했다. 최고의 목조건물이라는 것만 알았는데 그 옆에는 큰 바위도 부석이란 암각이 된 채로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에는 설화가 있었다. 부석사를 세운 이는 의상대사였다. 최초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개창하였고 수없이 많은 절을 지었고 부지기수의 제자도 길러내었단다. 그는 원효와 더불어 대표적인 고승에 속했다. 중국에 불교를 더욱 공부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도적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두 번째에도 원효와 같이 갔었는데 해골 바가지의 물로 인해 원효는 그대로 귀국하고 의상 홀로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독실한 신자의 집에 머물며 불법을 공부했는데 그때 만나게 된 여인이 선묘라는 아가씨였다. 그는 의상의 높은 인품을 흠모해서 은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상은 그녀의 뜻을 받을 수가 없었다. 10년의 공부를 마치고 의상은 귀국하게 되었다. 배에 떠나는 상황에서 선묘아가씨는 그를 위해 만든 법복을 배로 던졌고 의상은 그것을 받았다. 결국 선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 용이 되었다. 그리고 그 용은 의상이 탄 배를 수호하게 되고 무사히 신라에 당도하게 되었다. 부석사라는 절을 지으려고 하니 도적들이 횡횡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절을 지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용이 나타나 바위를 들었다 놨다를 여러번 했다. 그러자 도적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게 되었고 이후 순조롭게 절의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후 부석사에는 부석이 자리잡게 되었고 석룡의 흔적도 있어 불상이 위치한 곳 아래쪽에는 용의 머리가 석등이 있는 쪽에는 용의 꼬리가 묻혔다. 부석사의 아래쪽에는 박물관도 위치해 있어 부석사를 발굴하는 중에 출토된 문화재 등도 전시되어져 있고 사찰에 보존되었던 불화 등도 전시되어져 있었고 퍼즐맞추기도 직접 해볼 수 있게 놓여져 있었다. 사찰을 내려오는 길에는 풋사과인 아오리를 팔고 있기도 했고 간간히 말린 나물류도 곁들여 팔고 있기도 했다. 부석사를 다 보고난 후 우리는 다시 청량산의 청량사로 향했다. 그곳은 봉화에 속해 있었다. 한창 심산유곡을 더듬어 들어가야만 했다.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고서야 사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은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했다. 청량산에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당분간 통행을 할 수 없다는 안내표지판이 붙어져 있었다. 가파른 길을 올라갈 때에는 목덜미에 땀이 비오듯 했다. 대웅전에 도착해서 보니 산세가 유려했고 정경이 더할나위 없었다.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이 있었을 때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피신을 이곳으로 왔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절의 유리보전이란 현판을 공민왕의 친필로 남겨진 것이라고 했다.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할 때의 설화가 남아있었다. 어느날 대사가 아랫마을에 내려갔더니 농부가 논을 가는데 소의 뿔이 셋이었다. 그런데 이 소가 농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농부에게 부탁을 했단다. 절에 공사를 하는데 꼭 소가 필요하니 제발 소를 공양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농부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좋은 뜻을 받아들여 소를 절에 희사했던 것이었다. 소는 절에 오니 성질이 양순해졌고 곧잘 어려운 일도 척척해내고 절을 기공하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가 죽은 후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게 되었고 우각삼송이라 이름 불리우게 되었다. 일설에는 그 소는 관음보살상의 현신이라고도 했다. 청룡사의 특이한 부분은 급격한 경사지를 따라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시주객들이 더위도 식히고 물의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두군데의 절을 답사하고 나니 시장기가 돌았다. 우리는 청량사 입구에 있는 한 음식점에 때늦은 점심을 위해 들렀다. 까치마을이란 식당이었는데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문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간 것처럼 여러 가지 식탁위에 음식들이 그대로 치워지지 않은 해 나뒹굴고 있었다. 주문을 했더니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이니 기다려달라는 얘기였다. 막간을 이용해 마당에 있는 눈요기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해바라기도 함초로이 피워져 있었고 한쪽 켠에는 하얀 토끼가 놀란 듯 빨간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있었다. 곧이어 음식이 나왔는데 상당히 정갈하고 맛이 담백했다. 송이덮밥과 더덕구이를 시켜서 맛있게 요기를 하고 그곳을 나섰다. 이제 목적지는 울진으로 정했다. 한참을 달리고 보니 불영계곡이 나왔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올망졸망하게 운치가 있어 보였다. 깊은 계곡 속에 아름들이 금강송 등이 그 훌륭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차를 멈추고 절경을 감상하고 갔으면 하였으나 그렇게 할만한 여유를 갖지는 못했다. 집사람은 오늘 유숙할 숙소를 물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은 숙소는 영덕 강구항의 한 모텔이었다. 성수기인 탓에 가격도 턱없이 비쌌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울진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영덕 강구항까지 갔다. 6시 이후부터 입실이 가능하다고 하니 좀 쉬었다갈 필요가 있었다. 차를 해안가에 세워두고 바닷속으로 발을 담궜다. 이제 석양이 지는 때였다.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강구항의 어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서 회를 좀 뜨고 필요한 야채는 식당에서 사서 차에 실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소주와 기타 필요 물품이었다. 길가의 인근 편의점에 들러 필요한 것을 구입했다. 이젠 만반의 준비가 된 셈이었다. 숙소에 들어가 여장을 풀고 맛있게 술잔을 기울였다. 약주를 한잔 한 후 집사람을 쉬게하고 강구항의 야경을 둘러보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다. 휴가철임에도 손님들은 별로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동네분들인 듯한 장년 여러명이 선착장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척이나 분주했던 하루였는데 그래도 좋은 경치와 관광지를 순례하고 나니 일상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새롭게 충전된 에너지로 다음 한주도 힘차게 시작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