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을 접으며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멀리 지방에서 서울 강남 결혼식장까지 찾아주신 친지, 이웃, 직장동료, 선후배 등 하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얼마 전 아들을 장가보냈다. 무척이나 감개무량하고 뜻깊은 날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웠던 것의 결정체로서 결혼이 이뤄지는 것이 하이라이트라 할만했다. 30세가 되도록 제대로 성장을 시켰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고 그 결실을 이뤄낸 것이었다. 날씨는 쾌청한 전형적인 가을날이었고 예식도 많은 날이었다. 아들도 나름대로 계획하고 준비했으며 실행에 옮기기까지 여러 가지를 검토했고 준비절차를 거쳤다. 언제 그런 날이 올까 하고 손꼽아 기다렸는데 꿈결처럼 그런 날이 왔다. 처음에는 볼을 꼬집으며 이것이 꿈일까 생시일까 의문이 들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직장의 선배들이 제대로 직장생활을 영위하고 마무리 했던 분들도 하기 힘든 부분이 직원으로 재직하는 중에 자녀결혼이었다. 어떻게 하든 어떤 의미에서든 직장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고자 했던 부분의 핵심요소였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허다하다. 어떤 분들은 재직 중에 일사천리로 자녀들은 다 여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명만 결혼을 시키는 것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평생 하나의 비원처럼 여겨지는 것이 재직 중의 자녀결혼이었다. 하루아침에 혼사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충분히 심사숙고해야 하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모저모 살펴보고 고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서로간의 마음을 확인하고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다음 양가부모를 찾아뵙고 허락을 받고 결혼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당당하게 피력한 후 내락을 받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양가의 상견례를 통해 나름대로의 통관절차를 거치고 혼약일을 받아야 한다. 웨딩촬영도 해야 하고 사성이 오가고 함이 처자의 집으로 가야 하는 수순을 거쳐야 하기도 한다. 정말 세상에서 제일 복잡하고 어려운 수순을 거쳐 부부는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주례도 섭외해야 하고 사회도 정해야 한다.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청첩장을 보내고 모든 것이 갖춰지면 이제 결혼식장으로 향하게 된다. 1년 정도의 기간을 갖고 준비를 했고 전략을 짰다. 우리 부부는 그냥 아들이 하는 대로 거의 지켜보는 정도였다. 식장준비도 둘이서 했고 웨딩촬영 등도 다 알아서 했다. 예복을 맞추고 예단을 보내고 받는 것도 날을 받아서 적정하게 밟았다. 2월쯤에 상견례를 했고 5월쯤에 웨딩촬영이 있었다. 7월쯤에 예단이 왔고 8월경에 예단을 보냈다. 주례도 한 달 보름 전쯤에 정했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 상의를 했다. 주례께서 요구하는 내용에 대해 답변서를 작성해서 88월 말까지 보냈고 9월 초에 결혼식을 거행했다.
아들은 1988년 7월8일 전남 고흥의 시골병원에서 태어났다. 한밤중에 진통이 왔다. 이역만리 떨어져 살았던 나는 3일 뒤에야 병원에 당도했다. 득남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감흥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곧바로 아들은 본가에 맡겨졌고 1년여를 그곳에서 자랐다. 90년에 제주도로 근무지가 변경되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살 수 있었다. 집사람이 3년간 휴직을 했기에 제대로의 신혼을 처음 느껴볼 수 있었다. 20평대의 아파트에서 단란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1995년쯤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처음 학교생활이라 적응에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 동생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6학년이 되었던 2000년에는 자신이 직접 녹색소년단을 해보고 싶어 했다. 아침마다 6시30분부터 한 시간을 자전거로 훈련한 후 등교했다. 동생이 계속 이어받은 덕에 3년간 전국일주를 도왔다. 중학교는 광신중학교에 다녔다. 집에서 꽤 먼 거리였지만 그럭저럭 잘 적응했다. 고등학교는 용산고에 배정을 받았다. 역시 집에서 꽤나 먼 곳이었는데 그런대로 이골이 난 편이었던지 그럭저럭 적응해 나갔다. 고2시절이었던 2005년도에 서초동으로 이사를 했다. 평소 다녔던 학원이 서초동 쪽에 있었는데 편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2007년도에 대학은 서울시립대학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008년에서 2009년까지 군복무를 했다. 파주 법원리 쪽의 포병부대에서 근무했다. 친구와 동반입대를 했다. 우리는 몇 번 면회를 갔었고 외출외박 휴가 등을 나왔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 복학했다. 본격적으로 보험계리사를 공부하겠다고 해서 집을 나갔다. 선배의 집에 기숙을 하며 수험생활을 한 셈이다. 방학 때에는 기숙사에 입소해서 공부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계리사가 되었다. 그리고 중간에 영국에 어학연수를 7개월간 다녀왔다. 1년 동안의 취업준비를 통해 농협손해보험에 입사했다. 1년여가 지난 후 보름양을 만났고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이 되었다. 아들은 7시에 집을 나섰다. 우리는 10시 30분쯤에 집을 나섰고 예식장 인근의 미용실에 갔다. 사돈네의 예약이 1시간 먼저였고 곧이어 우리 차례였다.. 남자들은 거의 10분 수준이었고 여자들이 오래 걸렸다. 집사람의 경우는 머리를 붙여 올림머리를 해야 했으므로 시간이 걸렸다. 화장을 마치고 내려갔더니 사무실 직원들이 막 도착하는 시간대였다. 어도라는 일식집으로 안내를 했고 곧바로 식권이 든 가방을 들고 예식장으로 갔다. 아직 전 예식이 끝나지 않은 탓에 어디 마땅하게 있을 곳도 없었다. 1시 30분경부터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에 예식장을 둘러보았고 음식도 맛을 보았지만 당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일찍 도착한 버스 편의 부산팀도 곧바로 일식집으로 안내를 했다. 접수대 옆에서 복장을 갖추고 하객들을 맞이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예식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어 지정된 좌석에 착석했다. 양가 어머님의 촛불 점화부터 예식이 시작되었다. 신랑입장, 신부입장이 있었고 혼인서약 주례 축가 양가 아버님의 당부말씀 그리고 행진이 이어졌다. 기념촬영이 이어졌고 다음은 폐백을 받을 순서였다. 며느리가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 길었다. 결국 피로연장으로 내려가 하객들에게 인사를 먼저 했다. 그리고 올라와 폐백을 받았다. 대추와 밤을 던졌고 받았다. 약주도 한잔했다. 부모님께서는 부산편 버스의 출발시간이 임박해져서 초조해했다.. 하는 수 없이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출발시간을 30분 더 늦췄다. 직원들이 접수를 보았다. 정산된 내역을 받았고 가방도 받았다. 예식장 직원과 계산룸에서 정산을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차를 예식장 주차장에 주차해 두고 최종적으로 일식집에 가서 정산을 하고 귀로에 올랐다. 숨 가빴던 하루가 정리되었다. 아들은 인천공항 부근의 호텔로 이동하게 되었고 다음날 11시 비행기 편으로 신혼여행지인 크로아티아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다음 일요일에 귀국하고 수요일까지 처갓집을 다녀오고 목요일에 출근한다.
무척이나 많이 긴장되었고 걱정되었던 부분들은 별다른 문제없이 해소되었다. 하객의 과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룰 것이라던 부분은 얼마만큼 일식집으로 손님을 분산시킴으로 인해 완화되었다. 장황하고 지루하리라 예상되었던 주례사도 적절하게 유머와 위트로 재미있는 진행이 되었다. 어떤 행사든 완전무결하게 결점 없이 진행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리라. 거의 밤 11시쯤이 되어서야 부산, 목포로 향했던 버스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고 안도할 수 있었다.
자고로 혼사는 인륜지 대사라 했다. 배필은 하늘이 정해준다고 해서 천정배필이라는 얘기도 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느꼈고 혼사가 이렇게 사람을 성숙시켜 주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일련의 과정과 절차를 통해서 가족 간의 화합 및 갈등해소 등도 있었고 한 가족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일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껴볼 수 있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도 있겠지만 격식과 절차 그리고 예의를 갖춰 진행되려면 많은 공부도 필요할 듯했다. 청첩장을 받으니 결혼을 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많은 하객들이 도와주고 성원해주시고 후원해 주신 덕에 혼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에 다시 한번 하객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아들내외에게 행복과 화목함이 강물처럼 넘쳐나길 기원한다. 아무튼 청첩장을 접으며 인생의 새로운 묘미를 느꼈으니 그 속에 인생의 진정한 맛과 멋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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