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계 에피소드
금니와 선그라스
여행을 하던 중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갑자기 입안이 이물질이 낀 것같이 느껴졌고 뭔가 잘못된 듯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온 것이다.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고 정체를 알아 보았다. 왼쪽 위 어금니에 붙어있던 금니가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거의 20여년 이상 붙어 있었던 것인데 하필 장가계 여행 중에 사단이 난 것이다. 옆좌석에 앉아있던 집사람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잘 보관해 두라고 했다. 다음은 집사람의 선그라스에 관한 얘기였다. 여행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것이 선그라스였다. 아마도 첫 관광을 하려 했던 서안의 병마용갱을 둘러보려던 때였다. 제법 제딴에는 멋을 내보려고 집사람이 손가방에서 선그라스를 꺼내는 순간 순식간에 선그라스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었다. 안경알과 테를 연결하는 부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 결국 선그라스를 다른 곳으로 교체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연말에 갔었던 서유럽 여행에서는 나의 선그라스가 비슷한 꼴이었다. 품페이를 관광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외국인 여행객이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엉겹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핸드폰을 받아들고 사진을 찍고 하던 와중에 선그라스가 흙바닥에 떨어진 것이었다. 결국 선그라스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안경의 중요한 기능인 다리가 접쳐지지 않은 상황이 되었으니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수선을 맡기려 했더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일단 품질보증서가 있어야 A/S의 접수가 되었다. 집근처의 백화점에서 산 것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비수기라 매장 자체는 철수한 후였다. A/S접수처에 가니 품질보증서가 없으면 A/S가 안된다는 답변이 전부였다. 일반 안경점에서는 수리에 난색을 표했다. 결국 이리 저리 안경점을 돌아다니다가 한 대형 안경점에서 수리를 해 준다고 해서 맡겼다. 겨우 정상으로 돌아온 선그라스를 보니 절로 한 숨이 새어나왔다.
2. 토가족의 결혼풍속
장가계의 원주민인 토가족에게는 독특한 결혼풍속이 있다. 여자가 발을 내밀면 남자가 발들을 밟는다. 그리고 연모의 정을 담은 노래를 남자가 부르면 여자가 답가를 부른다. 그렇게 3차례를 주고받은 후 남자의 발을 여자가 밟으면 혼약이 되는 식이다.여자와의 혼약을 파기하면 그 벌로 남자가 처갓집에 황소 한 마리를 바쳐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여자집에 가서 한달동안 머슴살이를 해야 한다. 매년 3월 3일이 되면 토가족 처녀 총각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자기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한다. 택일을 위해서 대나무 바구니를 가져가는데 그 안에는 돼지족발을 갖고간다. 족발의 표시를 보고 결혼날짜를 가늠한다. 다음으로 오래된 풍속으로 결혼 한달전 울기이다. 노래에 곡을 붙여가며 우는데 짧게는 열흘 길게는 두달을 운다. 시집간 첫날 시부모 앞에서도 구성지게 울어야 하는데 얼마나 많이 울었냐에 따라 결혼 후 명성이나 시집살이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시댁에서는 구성지게 잘 울고 눈이 퉁퉁부어 올라야 며느리를 잘 보았다고 소문이 동네방네 나고 이로써 집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을 하고 재산상속도 된다. 여차하면 3년을 더 연습할 때까지 곳간 열쇠를 내놓지 않는다.
3. 장가계와 우관중
우관중(1919-2010)은 5.4운동이 일어났던 해에 장쑤성 이싱현에서 태어났다. 파이에서 47년도에 유학을 한 후 고국에 돌아왔다. 문화대혁명(‘66-’76) 당시 순수미술을 고집했던 연유로 인해 헤베이 농촌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그는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다. 장가계를 그린 그림을 공모전에 출품했다. 사람들이 상상속에 그린 그림이라고 호도하자 실제로 있는 곳이라고 해명하고 갤러리들을 데리고 직접 장가계로 안내했다. 장가계는 이 사건 이후 유명세를 탔고 전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 변모되었다. 삼림공원 입구에 우관중의 동상이 세워졌다. 우관중은 루쉰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로 루쉰을 치켜세웠고 그에 관한 그림 ‘야초, 루쉰시의도, 루쉰의 고향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결국 201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계적인 화가였고 명망이 드높았다.
4. 라면의 연필
여행을 하는 중에 특별한 재미 중의 하나는 몰래 호텔방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것이다. 신라면을 조리기에 넣고 끓여서 먹는 맛은 별미다. 그런데 문제는 준비부족이었다. 라면을 끓였는데 그것을 먹을 젓가락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한밤중에 슈퍼에 다녀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먹을 방법이 없었다. 캐리어를 뒤지고 가방을 뒤엎고 손가방을 훑었지만 젓가락으로 대용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행히 연필 두자루가 나왔다. 급한 마음에 연필 두자루를 젓가락으로 활용해서 밤참을 맛있게 먹었다. 독특한 맛이었고 해장으로서도 제격이었다. 쿠커는 미리 준비를 한 것이었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을 생각하고 챙겼어야 하는데 불찰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장가계에서 서안으로 거의 자정무렵에 출발했고 도착은 새벽에 도착이 되었다. 호텔로 돌아와 쉬어야 하는데 라면을 끓였다. 이제는 젓가락도 준비되었고 밑반찬으로 김치까지 준비가 되었으니 금상첨화였다. 더할나위없는 라면의 별미를 즐길 수 있었다.
5.중국인의 거의 불가능한 바켓리스트
중국인이 죽을 때까지 해 볼 수 없는 세가지가 있다. 평생해도 해볼 수 없는 것이란 의미이리라. 첫 번째는 중국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해 보는 것이다. 영토가 워낙 넓으니 그 많은 중국의 도시, 지방을 다 가볼 수 없다는 얘기다. 시차도 실질적으로는 엄청나다는 얘기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제대로 시차를 따지자면 5시간쯤 차이가 난다. 그리고 북에서 남쪽지방도 차이가 진다. 북쪽은 추운데 남쪽은 다르다는 식이다. 눈과 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 장가계란다. 천문산 정상에는 백설이 휘날리는 세상인데 장가계 시내에는 비가 내린다는 식이다. 장가계의 절경은 운무가 피어오를 때 환상적이라는 얘기다.
두 번째는 중국의 음식을 다 맛보는 것이다. 수백, 수천, 수만가지 요리가 있다. 그래서 제대로 중국의 맛있는 요리를 다 맛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 차만 하더라도 차 한잔에 2백만원을 호가하는 차가 있다. 보이차라 한다. 광저무에 가서 한끼 식사로 5명이 6천 3백만원어치를 먹었다. 다리가 넷달린 것에서 책상을 빼고 다 먹는다. 또한 요리를 할 수 있기도 하단다. 하늘을 나는 것 중에는 비행기, 헤엄치는 것에서는 잠수함 그리고 지상의 것으로는 기차를 빼고 다 맛볼 수 있다는 식이다.
세 번째는 중국 말을 다 배우고 섭렵하는 것이다. 중국은 한족과 소수민족 56개로 구성된 나라다. 북방 남방 각 민족마다 말이 다 틀리다. 북경말을 표준어로 하고 있고 학교에서 선생님은 표준말만 사용해야 한다. 중국의 7대 방언을 살펴보면 관화, 오, 감, 상, 민, 객가, 월 방언이 존재한다. 전체적으로 방언의 유형이 여럿 있는데 첫 번째 유형으로는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와 같은 유형이다. 난이도가 어려운 4번째 방언의 유형이 있는데 광동어와 객가어가 그 유형이다. 전혀 의사소통이 불가한데 같은 문화, 역사를 가진 것이다. 광동어의 경우 성조가 9개다. 우리의 제주도 사투리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리라. 거의 서로간에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방언 유형인 셈이다.
6. 술과 반찬, 등 준비물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날씨는 쾌청하고 좋았다. 다행히 장가계의 날씨도 맑고 깨끗했다. 1년 중 200일이 비가 오는 날이라고도 했다. 실감이 날 정도였다. 첫 번째 미스는 손풍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줄을 서 있는 내내 부채질에 여념이 없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그리고 안경의 뒷부분을 연결하는 것도 필요했다. 어느 일행은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오기도 했다. 선그라스와 안경은 여행 중에 필수품이었다. 번갈아 안경을 끼었다가 선그라스를 끼었다가 번잡스러웠다. 샌들을 준비해서 가지고 갔는데 산악지형이어서 제대로 여행기간 중에는 신어볼 기회가 없었다. 제대로 샌들을 신어볼 기회를 가진 것은 장가계에서 서안으로 돌아올 때와 귀국할 때 뿐이었다. 술과 반찬 등도 제법 준비를 해서 갔는데 제대로 활용이 된 것은 반찬 뿐이었다. 술의 경우는 거의 기본으로 맥주(칭타오 등)나 연태고량주(42도), 소주(참이슬) 등이 기본으로 제공되었으므로 별도로 준비된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가져간 소주는 그대로 남았고 김치, 고추장, 깻잎 등 밑반찬은 다 소진이 되었다. 간식거리로 준비했던 초코렛, 사탕, 껌 등은 수시로 먹었던 탓에 유효적절하게 활용이 되었다.
7. 비휴
전설적인 동물로 알려진 비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왼발이 앞에 나온 것은 여자 오른발이 앞에 나온 것은 남자로 한쌍을 사야 한단다. 옥황상제님의 아홉 번째 아들이다. 금, 은, 보석을 좋아해서 마구 집어먹는다. 어느날 비휴가 이곳 저곳에 배설을 하고 돌아다니자 옥황상제가 엉덩이를 때렸다. 그리고 항문이 막혀 이제부터는 배설을 할 수 없게 되고 토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비휴를 갖고 있으면 재물운이 좋아진다. 장가계를 여행하던 중에 쇼핑센터에 들른 곳은 세 곳이었다. 첫 번째는 라텍스 매장이었다. 그다음은 게르마늄 판매장이었다.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진주 보석상이었다. 이 세 번째 보석상에는 한국인 이사가 있었다. 그는 7년을 한국 서울 후암동에서 살았단다. 연변사람으로 하얼빈에서 태어났고 한국인 3세였다. 그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우리 일행들의 혼을 빼놓았고 모두들 그런가보다 하고 빠져들었다. 일행중 한분이 비휴를 한쌍 샀다. 4백만원을 호가하는 것을 깍아 190만원대 수준에서 흥정에 성공했다. 무거운 옥으로 된 것이어서 택배도 어려워 직접 보자기로 싼 것을 매번 들고 다녀야 하는 애로를 겪었다. 어떻든 사업이 잘 풀리고 재물이 들어온다고 하니 그 효험을 믿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듯하다.
8. 기타
진주에 관한 얘기를 가이드가 했다. 가이드는 20여년 가이드를 하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서안에서 가이드를 했었는데 5년쯤 하다 이곳 장가계로 왔다. 그가 실제 경험담으로 얘기하는 부분이었다. 진주를 가지고 한국에 갔었단다. 종로의 보석상에 가서 진주를 감정받았다. 처음 보석상에서 가짜라고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똑같은 진주를 가지고 다른 보석상에 갔더니 이번에는 진품이라고 감정을 해줬다. 그 후 그는 첫 번째 집에 가서 이렇게 진품이라고 감정을 해줬는데 왜 가짜라고 감정을 했냐 라고 질의를 하자 그 대답이 걸작이란다. 중국에서 온 것은 무조건 가짜라고 판명을 해야 하는 것이 업계의 불문율이라는 식이다. 중국제품의 80% 이상이 거의 가짜 내지 모조품이라고 했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짝퉁이 많이 돌아다니는 형국이란다.
9. 여담
나에게 중국은 이번이 두 번째 여행이었다. 첫 번째는 2001년도에 여행했었다. 20여명이 상해, 소주, 항주를 돌아보았다. 한창 상해가 세계적인 도시로 급부상하던 시절이었다. 88층의 고층 건물도 있었지만 8시경이면 모두 불이 꺼지는 식이었다. 저녁무렵이면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카세트로 음악을 틀어놓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식이었다. 야채등은 채독을 우려해서 가급적 먹지 말라는 충고를 듣기도 했다. 계림이라는 곳을 유람선을 타고 유람하며 그 절경에 매혹되었다. 동굴관광도 했었던 듯했고 중국식 정원도 둘러보았고 수로를 따라 이동하는 항주의 모습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모두들 이마트로 몰려가 중국 5대 명주에 속했던 오량액을 한 병씩 구입했었다. 관광지 마다 조그만 꼬마애들이 몰려다니며 한국돈 천원을 구걸했던 것에서 중국의 경제사정의 열악함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었다. 비단 공장에서 비단 패션쑈도 관람했었다. 종업원들이 줄지어 길게 정렬해 있던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했었다. 제대로 세계화 되지 않은 탓에 영어도 전혀 통용되지 않던 시절의 얘기다. 18년이 지난 중국의 현재모습은 무척이나 변화되었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부족하고 열악한 부분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계속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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