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松江)과 자미(紫微)
송강 정철(1536-1593)은 1536년(중종31년) 음력 12월 6일 부 영일 정씨 돈녕부판관 유침(惟沈)과 모 죽산 안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4남 3녀의 막내였다. 큰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 됐고, 막내 누이는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손자인 계림군에게 시집갔다. 이로인해 어린 시절에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는 함께 뛰어 놀며 지낼 정도로 허물없고 두터운 관계였다. 훗날 명종은 송강이 과거에 급제하자 축하잔치에 술과 안주를 하사하기도 했다. 그의 유복한 어린 시절도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나이 10살 때, 1545년 을사사화로 왕실 외척간에 정국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면서 매형이었던 계림군이 역모 주동자로 몰리면서 정철의 부친과 당시 이조정랑이었던 맏형이 잡혀갔다. 계림군은 처형됐고 아버지는 함경도로, 맏형은 전라도로 유배됐다. 2년 후엔 아버지가 경상도로 이배됐고, 큰형은 함경도로 유배되던 중 장독으로 인해 사망했다.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로, 경상도로 유배지를 전전했다.인생에서 반전의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게 되어있다. 1551년 왕자(선조) 탄생에 따른 은사(恩赦·특별사면)덕택에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났다. 부친은 선친의 묘소가 있었던 담양 창평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문인 면앙정 송순에게 가사를,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에게 정치와 행정을, 석천 임억령에게는 한시를, 서하당 김성원에게는 거문고를 배우는 등 각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꿈을 연마했다. 김윤제와 사제지간의 정을 맺는데는 일화가 전한다. 어머니와 함께 순천으로 형을 만나러 가던 송강은 환벽당이라는 곳에서 멱을 감는다. 김윤제는 잠깐 낮잠을 잤는데 꿈에 용이 개천에서 노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개천에 하인보고 나가 보라고 하는데 그곳에 멱을 감고 있던 어린 송강을 발견한 것이다. 순천행을 만류하고 자신의 제자가 되어볼 것을 권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는 김윤제의 소개에 의해 강항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식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당시 사람들은 식영정의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사람이다. 성산의 경치 좋은 곳 20수씩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었다. 이것이 후에 성산별곡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교류한 이는 성혼, 이이 등이었다. 그는 담양 생활 10년 만인 27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요직을 지냈다. 그의 출세가도에는 어릴 적 함께 뛰어놀던 명종이 재위했던 것이 한 몫 했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적인 화려함도 잠시였다. 40세와 43세 때 당쟁에 휘말려 낙향했다.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를 시작으로 예조판서까지 승진했지만 49세에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해 4년간 담양에 머물렀다. 그는 서인에 속했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작품이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이 작품은 강원도의 명승지를 돌아본 뒤 읊은 노래이고 가사인데 조선 가사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낙산사,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등 작품속의 풍광은 지금도 동해안의 명소로 관동팔경 등이고 인기다. 그는 54세에 다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됐지만 56세에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서 유배됐다. 광해군은 서자였고 선조는 다른 세자 신성군을 책봉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58세에는 동인의 모함으로 강화도 송강촌으로 유배돼 칩거 중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하직했다.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정치적으로 강직하지만 냉혹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의 수사 책임자로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연루되면 처형하는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 탄압의 주역이었다. 이 때 옥사한 사람이 1천 명에 달했다. 정철이 묻힌 곳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구 원신동)이다. 송강마을 뒤편 소나무가 무성한 곳에 무덤 4기가 있는데 한쪽에는 부모가 묻혀있고, 다른 한쪽에는 큰 형 내외가 묻혀있다. 그는 이곳에서 부친상 시묘살이 2년, 모친상 시묘살이 2년을 했다. 송강마을 뒤편 언덕에는 정철이 좋아했던 남원의 기생 자미(紫微)의 묘가 있다. 비서에는 의기강아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1582년 송강이 전라도체찰사가 되어 근무하던 어느 날이었다. 송강은 거의 지천명을 앞두고 있었다. 노기는 숫처녀인 자미를 송강에게 소개했다. 송강이 얘기했다. 내 듣기로 기생이란 아침에는 동쪽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잠을 잔다고 하던데 정녕 그러하냐? 그러자 자미가 대답했다. 아침에 동쪽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잠을 자는 것은 노류장화(路柳墻花)의 본분이지요. 임금에게 잘 보이려고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는 사대부 나리들과도 유유상종(類類相從) 아니겠나이까. 그러자 송강이 얘기했다. 자네는 나의 아들보다 더 어린 듯한데 오늘밤 늙은 나의 수청을 들겠는가. 그러자 자미는 수청 들기를 거부했다. 다음날 자미는 다시 송강에게 찾아가 제안을 한다. 소녀의 첫정을 나리께 바치겠나이다. 제 머리를 얹어주시옵소서 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아직 피지도 않은 꽃을 꺽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라고 거절한다. 그 대신 제안한 것은 자미에게 학문과 시를 가르치겠다고 하고 배워보기를 권고한 것이다. 기생이란 공가지물인데 대감의 한마디면 수청을 들지 않을 수 없지 않겠냐고 했지만 송강은 기생도 사람인데 어찌 물건에 비유하겠는가라고 핀잔을 주었다. 송강이 떠날 때가 되어 자미에게 시를 남긴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백일홍) 곱게 피니
그 예쁜 얼굴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마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네 고움을 사랑하리니.
10여년이 지나 1591년 정철은 함경도 강계로 귀양을 간다. 그러자 자미는 정철이 평안도 강계에 유배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철이 전라도와 충청도 도체찰사로 임명되면서 서로 길이 엇갈렸다. 그녀는 의병장 이량의 권유를 받아 적장을 유혹하고 군사 첩보를 수집해서 아군에 전달한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정철을 꼭 보살펴서 살아서 귀가하도록 신신당부한다. 그러면서 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지 않듯이 자신을 원망하지 말라고도 한다. 이 첩보로 인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강아(江娥)는 엇갈린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승려가 되었고, 이름도 소심으로 바꿨다. 정철이 죽자 묘소를 지키며 여생을 보냈다. 정철의 묘가 문백면 봉죽리로 옮긴 것은 1665년(현종 4년) 우암 송시열의 권유 때문이다. 숲과 계곡이 깊고 느리다.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도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고야…. 그의 노래처럼 생과 사를 넘나들며 골곡지고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렇지만 상처깊은 인생가가 있었기 때문에 불멸의 문학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사문학의 전설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과 시조 ‘훈민가’ 등 한국가사문학의 백미는 그냥 탄생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난 장진주사를 보자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꺽어 셈하며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가나
좋은 상여에 만인이 울며 따라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회오리바람 불 제 뮈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쩌리
정철에 대한 평가를 보자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편협하고 행동이 경망한 사람이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超)했다 라고 기록돼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강직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조선 후기 명문장가 상촌 신흠이 평가했다. 평소 지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하고 조정에 벼슬을 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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