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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역사, 이야기 수담, 칼럼 바둑기사 등

바둑의 역사6

by 자한형 2023.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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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역사 (6) 전문기사제의 확립/이재형

(혼인보(本因坊) 가의 출범과 기소(碁所)의 설치

일해(日海, 닛까이)는 바둑 가문을 개설하여 그 가문의 이름, 즉 성()을 본인방(本因坊, 혼인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본인방가 초대 당주(堂主)로서 이름을 혼인보 산사(本因坊算砂)로 개명하였다. 혼인보(本因坊)라는 이름은 일해가 주지로 있었던 적광사(寂光寺, 쟉코지)란 절에 있던 탑 가운데 하나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산사, 즉 일해(日海)는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일본을 통일한 3명의 절대 권력자 오나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바둑 스승이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전국을 통일한 최고의 권력자를 천하인(天下人, 텐카비토)이라고 하는데, 일해는 3인의 천하인의 바둑 스승인 셈이다. 이들은 모두 일해에게 5점을 깔고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산사가 현재의 프로 정상급의 실력이라 한다면 산사에게 5점을 깔고 둔 이들의 바둑실력은 지금의 1(아마추어 3-5)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 정도의 실력일 텐데, 도저히 그 정도는 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변변한 바둑교재나 체계적 바둑수업이 없는 당시의 여건에서 전쟁과 정치의 틈새에 틈틈이 두는 바둑이었을텐데, 그러한 정도로 현재의 1급 수준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5-7급 정도의 실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산사가 이들의 비위를 맞춰주어 슬슬 두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산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는 며칠 밤을 새우면서 바둑을 둔 적도 있다고 한다. 하수의 기분을 맞춰주며 며칠 밤을 새우면서 바둑을 둔 산사로서는 아마 대단한 고역이었을 것이다.

혼인보 산사는 두 가지 큰 업적을 남겼다. 하나는 그로 인해 근대 바둑이 출발되었다. 그때까지의 바둑은 미리 흑백 돌을 몇 개씩 미리 깔아 놓고 바둑을 두는 순장바둑 형식이었다. 산사가 활약하던 무렵부터 초반 배석 없이 바로 바둑을 시작하는 자유 포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혼인보 산사는 이 자유 포석 방식을 대중화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바둑에서 처음으로 전략(戰略)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두 번째는 산사로부터 전문기사, 즉 프로기사라는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가 개설한 혼인보 는 전문기사 집단이었으며, 그로 인해 본격적인 전문기사 양성소라 할 수 있는 일본의 4대 바둑 가문이 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적광사와 혼인보 산사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도요토미(豊臣)를 멸망시킨 뒤 에도(江戸지금의 동경)에 막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쇼군(將軍)이 되었다. 쇼군이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을 줄인 말인데, 현재에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의 합참의장에 해당되는 자리로서 군부의 최고위직이다. 막부란 굳이 예를 들자면 상설 계엄사령부쯤으로 볼 수 있는데, 천황으로부터 권력 일체를 위임받았다. 그러므로 막부의 최고책임자인 쇼군은 군주제 하에서 실질적인 종신세습의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다.

토쿠가와 막부는 일본 전국을 약 300개의 번(, )으로 나누어 각 번주[藩主=다이묘(大名)]들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규모가 큰 번의 경우 국력(쌀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며, 이를 고쿠다카(石高)라고 한다)100만 석 정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번의 경우 10-20만 석 정도가 되었다. 막부의 직할령을 천령(天領)이라 하는데, 토쿠가와 막부 초기에는 천령이 200만 석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천황의 직할령은 겨우 2만 석 정도에 불과하였다. 막부와 천황 간의 권력관계를 잘 알 수 있는 숫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幕府)를 설치한 뒤 혼인보 산사를 명인 기소(名人碁所, 메이진 고도코로)로 임명하였다. 명인이란 공식적으로 바둑의 제1인자를 의미하며, 기소(碁所, 고도코로)는 바둑에 관한 행정을 담당하는 최고위 관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명인이 기소를 겸임하게 되는데, 기소는 프로기사 면허의 발급, 단급의 인정, 바둑행사의 주관 등 바둑 행정 전반에 대해 총괄적인 권한을 갖는다. 그러니까 현재와 비교하자면 기소는 한국기원 총재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기원은 민간기관이지만 기소(碁所)는 막부로부터 녹()을 받는 어엿한 관직이다.

바둑을 총괄하는 관청이 설립되고, 바둑을 전업으로 하는 가문이 개설되어 사실상의 프로기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일본의 바둑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 최고의 바둑고수가 조선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없어 대국 상대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혼인보 산사는 그에게 3점을 깔게 하고 두어, 산사가 이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소가 설치되어 바둑 관련 행정이 체계화되자 단급위(級位)가 확립되었다, 바둑은 사람에 따라 그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바둑을 갓 시작한 초보자부터 프로기사들에 이르기까지 실력의 폭이 매우 넓은데, 이러한 바둑실력을 표준화할 필요가 있다. 바둑실력(기량)을 객관적으로 표준화한 척도가 바로 단급위(級位) 제도이다. 에도 시대의 단급위 제도에서는 명인을 9단으로 하고, 준명인을 8단으로 하였다. 명인은 항상 1명이므로, 9단은 당대에는 1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단급위 제도에서는 가장 하수(下手)18급이며, 그로부터 17, 16급 식으로 하나씩 올라간다. 이렇게 하여 급으로서는 1급이 최상이 되며, 이 보다 실력이 강할 경우에는 단()이 된다. 아마추어 단은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는 7단이 최고이다. 프로의 경우는 1단에서 9단까지 있는데, 프로의 단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1단과 9단의 실력 차이는 없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상 아마추어 단은 1, 2단과 같이 한글로, 프로 단은 一段, 二段과 같이 한자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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