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김훈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라 먹고 먹이만을 집어먹을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명랑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다. 돈과 밥을 위해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떠나가는 배
이 시대의 '개혁'은 수많은 사람들을 제도 밖으로 추방해야만 가능하다. 이미 함께 강을 건너갈 수는 없게 되어 있다. 개혁과 추방을 통한 재건론은 명석한 경제 논리를 갖는다. 그 경제 논리의 과학성은 거의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명석한 과학은 추방당한 사람들의 삶을 설명하거나 포용하지 못한다. 개혁의 경제 논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그들을 침묵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치매에 가까운 비과학이다.
한국 현대사는 고통 분담의 역사적 체험을 축적하는 성장 과정에서 꾸준히 실패해왔다. 고통은 늘 전담되어왔다. 사회경제적 갈등과 모순을 돌파하는 방식은 흔히 추방으로 나타났다. 고통을 분담하는 도덕적 원리를 과연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대통령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이다. 개혁의 성패는 오직 여기에 달려 있다. 지금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또 한바탕의 추방자 집단으로 전락한다면 개혁은 실패한 것이다.
책임질 수 없는 책임
돌멩이라도 소화시켜내는 청소년 시절에 못 먹는 고통은 죽음과 흡사할 것이다. 배가 고프면 청운의 꿈이고 'Boys, be ambitious'고 뭐고가 없는 것이다. 성립되지가 않는다. 배가 고파서 눈앞이 노란 아이들을 붙잡고 무슨 교육이 가능할 것인가. 이런 아이들이 학교마다 늘어가고 있다. 배가 고파서 쩔쩔매는 아이들 앞에서 이 사회는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져봐야 목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못하고, 책임지워지지 않는 굷주림은 계속될 터이다. 또 추워진다. 세밑의 거리에서 구세군 자선냄비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천 원짜리한 장이 책임의 소재를 따지는 고담준론과 명석한 이론보다 소중할 뿐이다. 다들 천 원씩 넣자.
시장과 전장
자유시장에 대한 인식은 경제 주체에 따라 크게 다르다. 재벌 기업은 기존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불공정과 소유권력의 결정권을 긍정하는 것이 시장의 자유이며 적자생존의 원칙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정부는 시장의 이름으로 재벌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고, 재벌은 시장의 이름으로 거기에 저항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시장의 이름으로 일터에서 추방되었다. 교환과 약탈을 뒤섞어가면서, 시장은 언제나 전장(戰場)으로 돌변하는 속성을 갖는다. 번개처럼 치고 빠지는 국제 투기 금융은 그 전장에서 유격전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도덕적인 분노에 대해
여자의 몸은 사물화되어간다. 이 사물화의 목표는 '잘빠진 여자'이다. 언론과 대중예술과 상업광고와 패션가 디자인과 의학기술과 식품산업과 미용산업과 화장품산업과 대량소비시장의 힘이 모두 합쳐진, 이 사회의 가공할 연합 세력이 여자의 몸을 쉴 새 없이 옥죄고 비틀고 만다. 사회 전체가 이러한 판국에, 개별적 여자의 자의식이 거기에 저항하기는 어렵다. 이영자는 재능 있는 연예인이지만, 뚱뚱한 이영자는 뚱보에 대한 이 사회의 혐오와 모멸을 은연중에 대리만족시켜줌으로써 인기를 누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뚱뚱한 여자를 집단적으로 혐오하는 이런 미학적인 사회에서 그 뚱뚱한 여자에게 날씬해지고 싶은 비원이 있었다면, 수술을 했건 운동을 했건 간에 나는 그 여자가 날씬해진 것을 축하한다. 살을 빼서 날씬해진 여자를 상대로, 그 여자가 운동을 해서 살을 뺐느냐 수술로 살을 뺐느냐를 검색하고 입증하는 일도 언론의 사명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하다.
이영자는 기자회견장에서 서럽게 울었다. 그 여자는 이 나라의 언론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내 직업을) 그만두라고 하신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경악했다. 이 나라 언론이야말로 여자의 몸을 옥죄고 비틀어온 가장 무서운 권력이었다. 그 권력이 지금 이영자의 눈물을 향해 폭소와 야유를 보내고 있고, 대중들이 그 권력에 갈채로 호응하고 있다. 여자의 몸을 이처럼 사회 전체의 노리개로 삼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이영자에게 쏟아지는 이 사회의 도덕적 분노가 두렵다. 이영자에 대한 분노는 사회정의도 아니고 언론의 자유도 아니며 민주주의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폭소를 동반한 분노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러브호텔과 러브
본래 조악한 것일수록 당당한 외양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내가 사는 이 무인지경의 산골마을에서도 밤이면 강 건너 러브호텔의 불빛은 찬란하다. 러브호텔들은 그 조악한 건축양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제 러브호텔에는 도농(都農)의 격차가 없다. 본래 욕망은 평등한 것이다. 전에 살던 외곽 신도시에도 러브호텔은 창궐했다. 러브호텔 사이사이에 교회가 수없이 들어섰다. 큰 사찰도 세워졌다. 밤마다 그 거리는 성(聖)과 속(俗)이 뒤엉켜 번쩍거리며 욕망의 분화구와도 같은 세속 도시의 장관을 이루었다.
그 신도시는 러브호텔을 추방해야 한다는 주민들과 허가를 내준 행정기관 사이에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다. 시장은 시위대 앞에 나와서 "러브는 규제 대상이 아니다. 행정력으로는 러브를 막을 수 없다."라고 절규했다. 좀 희화적이기는 하지만 시장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행정력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해도 러브를 막을 수는 없다. 종교나 교육의 힘도 러브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종말이 가까워왔다."고 겁주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고, 욕망에는 회계가 없다.
시장의 그 절규는 틀린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사람이란 뻔한 일을 대놓고 뻔하게 말해주면 약올라하게 마련이다. 그러자 행정력을 동원해서 러브호텔 주차장의 비닐 커튼을 걷어내라는 분노의 함성이 일었다. 이것은 될 일이 아니다. 호텔 주차장 입구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가려주는 이 비닐 커튼은 그 신도시의 평화를 지켜주는 완충장치다. 이 커튼을 걷어내면 가정은 거덜나고 불화는 증폭된다. 비닐 커튼은 물론 위선과 허위의 장치다. 세상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위선일 때가 많다.
대학 졸업식 풍경
꽃술 드리운 사각모의 대학총장들이 빈 의자 앞에 서 있다. 졸업식이 열리는 대강당이나 체육관은 벌판처럼 넓다. 그 넓은 강당 안에는 단과대학별 말뚝이 꽂혀 있고, 말뚝 뒤쪽 자리는 휑하니 비어서 인기척이 없다. 어떤 단과대학은 단 한 명의 졸업생도 오지 않았다. 단상 위에는 기라성 같은 석학들이 장중한 예복차림으로 도열해 있다. 예복은 나무랄 데가 없다. 예복으로 말하자면, 학문과 인격의 권위가 중세적 오라를 거느리고 있다. 이 찬란한 광배(光背)를 임석시킨 자리에서 사각모의 총장은 말뚝과 빈 의자를 향해 학위를 수여하고 말씀을 내린다. 최고학부의 학위를 수여하는 자리에 학위를 받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는 이 사태는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삶의 형식과 질서는 점차 소멸되어가는 것이 마땅하고 이 사태는 통제 불능이며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저 이 민망하고도 난감한 자리가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
총장이 기념사를 통해 이 난파된 현실 속으로 젊은이들을 내보내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시름 하는 동안, 사각모를 쓴 졸업생들은 구석구석에서 주로 어머니(!)를 가운데로 하고 사진을 찍고 있다. 대학 졸업식은 배움을 마치고 현실의 삶 속으로 진출하는 젊은 날의 중대한 통과제의라는 것, 그 통과제의의 정신적 바탕은 경건성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 졸업식은 총장에 의해 대표되는 대학의 권위와 졸업생들 사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공식적인 작별과 출발의 자리라는 것을 이 모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대학과 졸업생 사이, 단상과 단하 사이의 공적 관계의 정당한 모습은 "아이고 내 새끼야."라는 이 애끓는 가족주의에 의해서 송두리째 폐기처분되고 시름에 잠긴 총장 앞에는 말뚝과 빈 의자만이 남는다. 대학 졸업식은 다만 사진찍기와 무허가 식품과 핸드폰의 축제일 뿐이다. 그 축제의 모습은 피난민 캠프의 축제와도 같았다.
심하다, 이 난장판이여. 심하다, 이 무지함이여. 우리는 꼭 이래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처럼 삶의 기율과 법도를 모조리 부수어버리고 권위와 경건성에 먹칠을 하고, 삶의 외양을 이토록 쓰레기통처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놓아야만 하는 것인가.
말하기의 어려움
젊은 날에는 말이 많았다.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구별되지 않았고 말과 삶을 분간하지 못했다. 말하기의 어려움과 말하기의 위태로움과 말하기의 허망함을 알지 못했다. 말이 되는 말과 말이 디지 않는 말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언어의 외형적 질서에 하자가 없으면 다 말인 줄 알았다. 어쩔 수 없었다. 말하기의 조건들을 일러주는 스승이나 선배도 없었고 가르쳐주었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적 억압에 대응하려는 전투의식이 젊은 날의 언어를 더욱 들뜨고 허성한 신기루로 만들어갔다. 초로(初老)의 가을에, 저 젊은 날의 크고 속 빈 말들, 현실과 유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윗자리를 고집하던 그 몽매한 열정의 언어들을 돌이켜보면 식은땀이 흐른다. 밑창이 허하고 받칠 힘이 없어서 뒤뚱거리던 그 말들은 땅 위에 내려앉지 못하는 눈보라처럼 바람에 불려가서 흩어졌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는 한바탕의 격렬한 무질서와 아우성이었으며 한 시대 황폐의 징후였다.
98년의 정치적 언어는 들뜬 바람에 불려가버린 것 같다. 말은 진화하지도 않았고 가지런해지지도 않았다. 총풍, 북풍, 세풍, 그리고 사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말들이 허공을 휩쓸고 지나갔던가. 그것은 가히 말의 아수라라고 할 만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는 것은 당대의 현실을 당대에서 확인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는 백치감뿐이다. 당대 현실은 당대의 풍문이거나 야담에 불과했다.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묻는 질문을 구별하는 데 있다. 언어의 순결은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 98년의 말들은 이 구별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놓았다. 헝클어놓아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정치적 언어는 사실에 바탕하지도 않았고 의견에 바탕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흔히 욕망이나 이득에 바탕하고 있었다. 욕망과 이득에 바탕한 말들은 사실을 지운다. 말은 무기로 변한다. 무기로 변한 말은 적에게 허상을 부여하고 그 허상을 친다.
개 발자국으로 남은 마을
산밑에 엎드려 나에게 칼럼을 써 달라고 제안해왔을 때, 나는 난감했다. 오직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날짐승들의 시대에 당대를 향하여 말을 거는 일은 가능한가. 당대를 향하여 할 말이 나에게 있는 것인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언어와 신호는 아직도 소통력이 있는가, 그런 고통스런 질문의 지옥 속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정치 구호는 왠지 처음부터 수상했다. 그것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낭만적인 슬로건으로 보였다. 한국 현대사는 사회적 고통을 분담해본 역사적 경험이 없다. 농업을 세계 무역 시장 앞에 개방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이득이며, 그 종합적 이득이 수많은 농민들을 고루 이롭게 하리라는 학설과 정책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일수록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한 위기 극복 정책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논리가 개별적 인간 삶의 구체성 위에 바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수작'을 그만 두라
2001년 한국의 여름은 무장한 정치 언어들이 백병전을 치르는 염천지옥이다. 언어의 인식 기능과 소통 기능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나는 이 지옥이 이른바 '조세 정의'나 '언론 자유'와 같은 거룩한 민주적 가치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다고 믿는다. 나는 이 지옥의 본질을 적나라하고도 파렴치한 권력투쟁일 뿐이라고 믿는다. 이 나라의 모든 사태는 권력투쟁이 아닌 것이 없다. 지역 간의 갈등과 대립도 권력투쟁이고 민노총의 파업도 권력투쟁이다. 권력에 환장하고 권력에 눈이 뒤집힌 자들이 모두들 권력을 향한 기갈을 깊이 감추고 '자유'와 '정의'의 깃발을 흔들며 온 나라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판국에 술이 약해 보이는 여성 국회의원이 제 맘에 안 드는 신문 칼럼을 쓴 소설가를 향해 "지식인이라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나는 경악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가 있는가. 당신들은 또 어느 편인가. 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의 편인가. 나는 이른바 조세의 '정의'의 편인가. 내가 '자유'의 편이라면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내가 '정의'의 편이라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러니 어느 편인가를 밝히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언론의 부자유가 언론의 자유다
한국의 언론 시장은 현저한 독과점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몇개의 공룡 신문들이 전국 신문 시장의 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 역시 방송 3사만의 시장일 뿐이다. 이 독과점 현상은,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이 독과점 현상을 인위적인 작용이나 정치의 힘으로 '개선'하려는 의도에 반대한다. 그것은 지금의 독과점 현상보다 더욱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뻔하다.
협잡이 '디지털화'화될 때
언어와 문화와 사건들 속에서, 나는 때때로 몽유병자와도 같은 환각을 느낀다. 디지털 문화는 인간의 삶을 기호화된 허상에 복속시키는 것이 아닌지, 사이버 공간 속에서도 삶은 영위되고 있는 것인지, 이런 의문들이 나를 괴롭힐 때 나는 그런 의문에 시달리는 나 자신의 존재가 몽유인지, 아니면 나를 괴롭히는 이 당대의 문화 전체가 몽유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렵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수만 년 동안 돌도끼를 들고 수렵과 약탈의 들판을 헤매었던 구석기 사내들의 근육을 그리워한다.
식사나 함께
이번 주말이면 우리는 신문에서 또 한 장의 심란한 사진을 보게 될 모양이다. 그것은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렇게 전직 대통령 네 명과 현직 대통령이 청와대에 모여서 저녁을 먹는 사진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은 정서의 이입에 기여한다. 그런데 식탁에서의 정서 이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그 자리에서 밥맛이 좋아야 한다. 한데, 이번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는 전직 대통령 네 명의 면면을 볼 때 서로의 밥맛을 돋워줄 만한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고, 이래저래 만찬의 밥맛은 미각이라기보다는 급양의 수준에 머무를 것 같다. 내 밥 먹기도 힘든 세월에 청와대 밥맛을 걱정하는 까닭은 전직 대통령 네 명이 현직 대통령의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그 장관(!)을 보아야 하는 국민들의 밥맛을 염려하는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