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에서 죽었다.
무릇 사람은 어떻게 성장하고 완성하는가. 혹자는 유전적 요소를 강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환경적 요인이나 여건 상황 등 외부적 요인을 강조하기도 한다. 과연 인간의 인생사를 지배하고 결정짓는 요인은 유전적인 요인도 있을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적 조건 상황 등 여러 여건이 삶의 형태 또는 삶의 유형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정복 또는 행복의 조건 등에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 우리는 행복추구권을 갖는 존재로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좋은 유전자와 더불어 그 유전자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고 그 능력치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나 상황 또는 환경 등 제반여건이 갖춰져야만 개인의 노력에 의해 삶의 방향이 설정되고 추진되어 제대로의 행복을 누리게 될 수 있으리라. 혹자는 그렇게 이야기 하기도 한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 불굴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 성공하고 출세하고 명예롭게 이름을 날린 이들이 있었던 시대는 이제 아니다는 식이다. 강남에서 더 많은 이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시골출신은 더 이상 출세하고 영광스럽게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는 시대는 아닌지 모를 일이다. 계층간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부의 대물림이 이어지고 부익부 빈익빈이 더 강화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우리의 삶의 질은 더 떨어지고 행복지수는 낮아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산의 변두리 쪽에 희망 고아원이란 곳이 있었다. 전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이 수두룩 했다. 전쟁이 끝난지 1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얼마전에는 월남이 패망해서 그 난민들이 일부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기도 했다. 서대신동에 소재한 부산여고의 교사가 월남난민 수용소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희망 고아원은 사설 고아원이었지만 정부의 지원과 독지가 또는 사회로부터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는 곳이었다. 많은 고아들을 양육하느라 애를 쓰고 있는 고아원이었다. 원장이 있었고 보육교사 관리인 등 종사원을 합하면 거의 20여 명이었다. 자체적인 식당도 있었고 숙소 관리실 등이 별도 건물로 되어 있었다. 한참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었고 3년 전에 있었던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 시험하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고 산업적으로도 농업국가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근대화가 추진 중에 있었다. 고아원의 원생 중에 한 형제인 두 명의 원생이 있었다. 형인 A군은 11세였고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동생인 B군은 8세로 초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둘은 오로지 형재로서 끈끈한 형제애를 갖고 있었고 서로를 위해주고 있었다. 언제나 먹을 것은 부족했고 옷도 변변치 않았다. 헐벗고 굶주려 있는 것이 항상 처해 있는 처지였다. 고아원에 보낸 세월이 6년에 이르고 있어 어느만큼 고아원 생활과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고아 중에는 부잣집에 입양되거나 운이 좋아 해외로의 입양을 통해 고아원 생활을 청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두 형제는 나이가 제법 든 상황이어서 입양이 되기에는 부적절했다. 형과 아우는 지옥같은 고아원생활을 벗어날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철저한 감시망으로 호시탐탐한 탈출기회를 갖는 것도 쉽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탈출을 한다 하더라도 호구지책을 어떻게 마련할지도 적절한 방법이 없었다. 일단 주먹방 등을 챙겨서 보자기에 쌌다. 고아원을 벗어난 후에는 부산역을 1차 목적지로 삼았고 그곳에 간 후 열차에 탑승해서 서울로 갈 작정이었다. 창문을 열고 그곳을 통해 숙소를 빠져나가고 그런 후에는 야음을 틈타 경계 철조망을 뚫고 신속하게 고아원을 빠져나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추적을 당할 경우도 대비를 해야 했다. 가급적 빨리 고아원으로부터 멀러 떨어져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부산역으로 가는 교통비나 필요한 경비 등도 갖고 있는 돈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빠듯했고 교통비로 버스비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의 경제적 여력은 없었다. 모든 탈주계획은 형인 A군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둘의 탈주는 성공적이었다. 고아원을 빠져 나온 후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탈주한 지3일이 지난 후였다. 서울의 공기는 부산과는 판이했다. 그래도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하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했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답게 모든 것이 좋아보였고 활력이 넘쳐났다. 대부분의 국민은 아직 농업이 주산업인 시대였다. 경제개발 계획이 추진되는 상황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72년도에 개통이 되었고 서울지하철도 1호선이 74년 8월 15일에 개통이 된 상황이었다.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의 구간만이었다. 그날에 육여사가 저격되고 양택식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다음으로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이는 구자춘 씨였다.. 지금으로서는 그물망처럼 이뤄진 서울지하철이고 이제는 천만 명의 도시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88 올림픽,올림픽 2002 한일월드컵 등을 통해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서울역에 도착한 형제는 서울역의 불량배들 손의 마수에 걸려 서울역 구두닦이가 되었다. 선배들로부터 구두 닦는 기술을 익힌 후 서울역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구두닦이에 나서게 되었다. 나란히 둘이 앉아 구두통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있는 손님의 구두를 닦는 식이었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에는 염천교 다리밑에 있는 판자촌의 숙소로 들어가 잠을 자고 그곳에서 거주문제를 해결했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두 형제에게 6개월이 지난 후 어느 날 한 미국인 부부의 눈에 두 형제가 띄게 되었다. 이것저것을 물어보던 미국인 부부에게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형인 A군이었다. 형제는 이제 이별하게 되었다. 형은 미국인 부부를 따라 미국으로 입양되게 된 것이었다. 이역만리 미국 땅을 밟게 된 형 A군은 이제 꿈의 나라 미국인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정식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고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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