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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글(수필, 여행기, 편지글, 일기 등)

적기에서 죽었다2

by 자한형 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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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기에서 죽었다 2

한편 동생 B군은 서울역에서 구두를 닦으며 생활하던 것이 이어지고 있었다. 변변찮은 환경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1975년에는 월남전이 종전된 해이기도 했다. 우리는 32만 명의 국군을 파병했고 자유수호를 위해 헌신했다. 참전 용사 중5,099명이 사망했고1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16만 명이 고엽제로 인해 죽거나 고통을 받았다. 충북 오창에 베트남전 참전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해에는 박대통령이 H사의 회장을 불렀다. 중동 건설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니 오랫동안 공사를 진행할 수 있어 유리한 점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기온이 내려간 서늘한 시기에 휴식을 취하고 많은 모래 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 유리한 점도 있다고 적극 환영의 뜻을 표했다. 소양강댐이 1973년에 건설되기도 했고 73년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 현대건설이 가장 주력의 회사로 각광을 받고 있는 때였다. 국내 사정은 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추진되고 있었고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기도 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난 비방 등은 곧바로 구속되는 중대 범죄인 시대였다. 서울대 김상진열사의 할복사건이 있었다. 자유성토대회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뒤 할복했다. 서울대생 4000명이 추도회에서 행진을 하기도 했다. 12월에는 대규모 연애인 대마초 사건이 붉어졌다. 구속수감되거나 출연제한 조치를 받았다. 서울의 고속터미널이 개장되기도 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도 개원했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중동건설붐은 기폭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역만리에서 건설공사에 매진하는 사이 한국에서는 제비족이 홀로 사는 부인들을 유혹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63년부터 1977년까지 이어진 파독 광부는 우리나라의 외화벌이에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7,936명이 파견되었고 파독광부의 자격은 나이 20세 이상에서 30세 미만 사이였으며 학력은 중졸 이상이었다. 애국가를 외워서 쓰는 것도 있었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목적으로 독일로 간호사를 만여 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남해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위한 독일마을을 건설하기도 했다.

동생 B군은 정규적인 학교생활도 교육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의 생활은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애로였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꽃피는 봄이 왔고 그리고 곧이어 무더운 여름철이 왔다. 얼마후에는 가을이 왔고 추석을 보낸 후에는 금세 겨울이 왔다. 겨울을 나는 것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한국 경제는 서서히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세월은 흘러 흘러10여 년이 지났다. 79년도에는 10.26사태와 12.12 사건이 있었고 805월에는 광주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고 정의사회 구현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국가재건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8888 올림픽을 유치했다. 대한민국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었다. 그전 84년 올림픽이 공산권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이었던 대회였는데 서울 올림픽은 온전한 올림픽으로 뜻깊은 대회였다. 올림픽 도로가 개통되고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도 건립되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1996년에 우리나라는 OECD가입국이 되었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구두를 닦는 일도 이젠 어느 만큼 능숙해졌고 더불어 구두를 수선하는 것도 일거리 중의 하나였다. 구두 뒷굽을 갈거나 구두 안쪽에 깔개를 판매하는 것도 있었다. 조그만 박스로 된 구두 가게를 갖게 된 것은 20살이 되었던 87년이었다. 고아원을 나와 서울로 상경한지 12년 지난 때였다. 이제 B군 앞에 놓인 과제는 군복무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20세사 되었던 88년에 신체검사를 받았고 무학이었음에도 현역복무대상자로 선정되어 내년에는 입대를 해야 하게 되었다. 군은 89년부터 92년까지 3년간의 군복무를 이행했다. 군복무는 강원도 화천에 소재한 27사단 38연대 4대대에서 복무를 했다. 전방 경계부대의 예비대로서 훈련이 강도 높게 실시되었다. 전술훈련 등 공격 방어훈련이 주기적으로 실시되었다. 신체강건한 군인이라면 모두 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급식수준은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었다. 혈혈단신이었던 그에게는 편지를 보낼 대상도 없었고 마땅히 면회를 올만한 이도 없었다. 오로지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 했고 어려움을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팔도에서 모인 병사 전우들과 전우애를 쌓아가야 했다. 인생을 배우고 인간관계를 터득해 가는 초석이 군생활을 통해 마련되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고 홀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 형에 관한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미국에 살고 있을 것이란 어렴풋한 기억만이 유일했다. 그곳의 정확한 주소나 양부모의 이름 등은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군생활을 통해 어느정도 처세술을 익힐 수 있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고 어떤 사리분별을 가지고 처신해야 하는지를 터득할 수 있었다. 천차만별의 인간이 있는 곳이 군이라는 조직사회였다. 조선팔도에서 모인 사람들이라 각기 성격이 달랐고 학력도 초등학교졸에서 대학원졸업까지 다양했다. 부모의 배경이 있고 재산이 있는 집 아들들은 뭔가가 달라도 달랐다. 면회를 오는 것도 가족이 오고 경제적인 여유에 따라 면회의 질이 달랐다. B군은 가족이 없으니 면회도 없고 편지도 오지 않았고 올 곳도 없었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고 혈혈단신의 외로움을 톡톡히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형이라도 있었으면 편지도 하고 면회도 하고 전화도 할 수 있으련만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3년 가까운 군복무를 마치고 드디어 전역의 날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사회생활의 시작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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