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중추절
올해 갑진년 중추절은 아주 특별했다. 왜냐하면 한 달 전에 모친의 소천(召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우리 가족이 선택의 여지없이 모두 귀향해야 했었다. 나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명절 제사를 처음을 모시게 된 것이다. 어렵사리 KTX 열차표를 세 장 구해서 가족이 명절을 맞아 부산으로 귀성을 하게 되었다. 명절 하루 전날 오후 한 시에 차로 서울역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 내외가 차를 타고 서울역 근처의 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KTX 열차에 올랐다. 우리 내외와 둘째 아들은 각각의 좌석에 떨어져 앉아가는 모양새였다. 손가방 두 개를 들고 열차에 올랐는데 무거운 짐은 아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들고 가는 가방 속에는 갈비를 재워서 갖고 가는 것이 있었고 오징어무침 반찬을 아내가 만들어서 가는 것이었는데 이는 모친이 잘해 드시던 반찬의 일부분이었다. 나는 가지고 간 노트북을 켜고 열차가 달리는 동안 영상편집 작업을 잠깐 동안 했다. 서울역을 출발한지 정확하게 3시간 20분이 경과한 뒤 부산역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 셋은 택시를 타고 부산집에 들어갔다. 부산집에는 부친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집의 정리 정돈 작업에 돌입했다. 좁은 집안을 깨끗이 청소를 하고 다음날 제사를 모시기 위한 만반의 정비 작업을 한 셈이다. 두 시간쯤의 작업 후 저녁식사를 했다. 부친께서는 미리 회를 준비해 두었다. 제철인 전어회도 맛볼 수 있었다. 새롭게 장만한 제기를 큰아들이 깨끗이 닦아서 제기함에 넣었다. 큰아들은 그제 전주의 처갓집에 갔다가 오늘 오후에 버스로 이동해서 집에 온 것이다. 교자상을 펴놓고 제기를 놓아보았다. 좌우에 촛대를 놓고 중앙에 지방함을 놔두고 제기를 나열했다. 제물로 황태포와 과일 배만 세팅을 해두고 제례를 연습했다. 향을 피우고 재배를 했다. 밤바다를 보고 싶다던 작은 아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 홀로 광안리를 다녀왔다. 막냇동생은 내일 아침에 올 것이라고 통지를 했다. 큰아들은 차를 끌고 귀성을 했는데 중간에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정체구간이었던 청주IC 근처에서의 추돌 사고였다. 정비업소에 차를 맡겨두고 차를 렌트해서 전주로 귀성했다. 밤늦도록 가족 간에 정담을 나누는 시간이 명절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큰집에는 문자로 제사에 참례하지 못하게 된 사정을 간략하게 적시하고 양해를 구했다. 제사 음식 등은 모두 아내가 전체를 주문하고 배달을 시켜서 준비했다. 제례에 관한 부분 등도 책자로 같이 배달이 되었다. 책자에는 지방 쓰는 법, 축문 쓰는 법 제사 절차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좋은 세상임을 새삼스럽게 느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코로나19로 몇 년간은 명절 때에도 귀성하는 것조차 어려웠었다. 이렇게 부산으로 귀성하고 가족 간의 만남을 갖는 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보인다. 구태의연한 옛 예법과 절차 등에 따른 풍속이 계속되는 것도 디지털시대로 변화하는 시대에는 불투명해지리라. 우리가족 삼 형제와 여동생 그리고 며느리들 손자 손녀들이 생애 최초로 고인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여태까지 옆에서 제사 모시는 것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막상 이렇게 내가 제주가 되어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드디어 갑진년 중추절의 날이 밝았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아침 6시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아내는 제물들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을 굽고 생선도 프라이팬에 굽고 과일 등의 제물은 씻고 닦아서 제기에 올려 제사상에 놓았다. 밥도 짓고 탕국도 끓였다. 병풍을 치고 제물을 모두 준비했다. 조율이시(棗栗梨柿),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좌포우혜(左脯右醯),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어려운 사자성어에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아침 9시가 되자 모든 가족이 다 모였다. 우리 가족은 생애 최초의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먼저 향불을 피우고 술을 올리고 재배를 드렸다. 가족들이 차례로 술을 따라 올리고 재배를 올리기를 서너 차례 한 후 최종적으로 수반물로 국을 갈고 밥을 세 번 떠서 물에 말고 첨주를 세 차례 했다. 10여 분이 소요되었다. 모든 제사 절차를 마치고 지방을 태웠다. 활활 잘 타올랐고 깨끗이 소진되었다. 음복술을 부친께 권했다. 연로하신 부친은 친견만 하시고 직접 제사에 참례하지는 않으셨다. 동생이 태운 지방을 물그릇에 넣었다. 명절제사를 마치고 가족이 한데 모여 아침식사를 했다. 부산으로 내려올 때에는 과연 제사를 잘 모실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었는데 무거운 어깨의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여태까지의 제사는 모두 큰집, 기타 친척 등의 제사였는데 이렇게 모친의 제사를 직접 모시게 되니 새삼스럽게 인간사의 생로병사와 관혼상제가 무겁게 다가왔다. 관혼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해주는 부분이고 상제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드리는 예식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제사를 지내보니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물도 있었던 듯하고 가족 간의 불협화음도 생겨 갈등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예전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의 제사는 집안의 가장 큰 중대사였고 잔치였던 점을 새삼 느껴지기도 하였다. 손부와 손자는 증조모의 첫제사임에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참석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너무 어린 탓도 있었고 아직 그렇게 장거리 여행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은 점도 있었다. 명절제사를 마치고 성묘행사 등도 하고 봉안당에서 제례도 진행함이 마땅하나 워낙 명절에는 추모공원이 혼잡한 탓에 개별적으로 식구들이 날을 잡아 찾아뵙는 것으로 정했다. 이제는 우리 가족에게는 귀경하는 일만 남았다. 혼자되신 아버님의 봉양도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미수를 앞두신 부친은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곁을 지켜야 하는데 배우자를 잃고 홀로 지내고 있으시니 마땅히 돌볼 사람도 마땅치 않은 셈이다. 일단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청소 빨래 등을 해 주는 가사도우미를 섭외해서 집안일을 맡기는 것으로 형제들 간에 협의를 했다. 요양보호사를 둘 수 있으면 최고로 좋은 부분인데 거동이 부자유스럽기는 하지만 홀로 거동이 가능한 것으로 판정되면 요양보호사를 보내줄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제약요소였다. 우리집인 하남의 집으로 돌아오는 열차 편은 저녁 6시 부산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ITX 편이었다. 5시간쯤이 소요되었다. 오후 11시쯤 서울역에 도착해서 차를 끌고 귀로에 올랐다. 중추절답게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음날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아들네 가족이 귀성했다. 손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큰절을 올렸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사임당 지폐 두 장을 주었다. 아직 경제 개념이 없는 손자는 지폐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금일봉 봉투를 주었다. 고맙게 잘 받았다. 갑진년 명절 연휴 5일간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아들의 교통사고가 있었지만 무난하게 명절을 보낸 것에 감사를 할 일이었다. 모친에 대한 첫 명절 제사를 무사하게 지낸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이다. 하늘 나라에 계신 모친도 즐거운 마음으로 흡족하게 제삿밥을 드시고 환하게 웃으셨으리라 상상해 본다.. 모친께서는 증손자를 위해 앙증맞은 수저세트를 한 벌 준비해 놓으셨다. 감읍해서 눈시울이 적셔졌다.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매사를 헌신하셨던 모친의 유지를 받들어 평안하고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리라 다짐해 본다.. 갑진년 중추절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준 듯하다. 올 한 해 남은 기간 동안 모든 가족이 무탈하게 잘 보내고 대망의 새해를 맞이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