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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세계사 , 기타 전쟁사, 문화사, ) 사건, 전투 , 등

프랑스혁명 5

by 자한형 2024.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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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5/ 누들스[8/10]

나폴레옹(1799~1804) 쿠데타, 종신통령까지

2차 총재정부의 총재 5, 왼쪽부터 앙투안 메루란 드 두에, 마리 드 라 루붸 에르, 폴 바라스, 루이 프랑수아 드 누후샤토, 프랑수아 루베루

혁명 정부(총재 정부, 5명의 총재가 통치하고 있던 기간)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음.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 17985월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부수고 카이로에 입성하여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음.

이때 나폴레옹이 대동한 180명 가량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비롯하여 이집트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풍속 등을 조사.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 비문해석은 1822년에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완벽하게 해석. 이 비석은 영국군에 의해 1802년에 대영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음.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프랑스를 위협. 이때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 8월 프랑스 해군이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고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 이 승리로 영국 해군이 해당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됨. 프랑스 해군 전열함들이 전멸당하고 두 척만 남게 되어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고립. 한편 프랑스가 대불동맹군에게 연패하며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클레베르 장군에게 원정군을 맡기고,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10월에 프랑스로 귀국.

나폴레옹의 행위는 탈영에 해당되었으나 당시 총재정부는 이를 처벌할 힘이 없었고, 정국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 나폴레옹은 혁명정부의 권력자 시에예스와 함께 쿠데타를 공모한 후, 동생인 오백인회 의장 루시앵과 탈레랑의 도움으로 1799119일 의사당에서 자신의 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였음. 오백인회가 이를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음.

의원들의 저항을 받는 나폴레옹 장군 François Bouchot - www.histoire-image.org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장 군인이 의사당을 점령. 총검이 500인회 의원들을 쫓아냄. 저녁 7시경 원로원은 앞서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집정정부의 조직을 공포했음. 총재정부는 폐지되었고 새 집정들에게 행정권이 위임되었음. 루시앵은 30~40명의 500인회 의원들을 긁어모아 놓고, 원로원의 결정을 승인한 후 62명의 자코뱅파 의원을 제명하고, 1222일까지 6주간의 휴회를 결의함. 2, 세 집정이 의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서.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고 함.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음.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음. 귀국 직후 시에예스와 손잡고 179911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뒤엎고 3명의 집정에 의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도니 것임. 물론 나폴레옹이 제1집정을 맡았음.

오백인회를 해산시킨 후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180027일에 국민투표에 부쳤음. 찬성 300만 표, 반대 1,567표가 나와 통과. 물론 재산제한선거에 유권자수 약 700만 명중 다수가 기권하였고 비밀투표가 아니었으며 투표 결과는 내무장관이었던 루시앵에 의해 조작된 결과였음.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로서 불과 30세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음. 통령 정부는 3명의 통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제2통령과 제3통령은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있었음. 2통령은 법무, 3통령은 재정을 책임지는 반면, 1통령은 내정과 외교, 군사 등을 책임졌으므로 그 권한은 다른 통령에 비하여 더욱 막강하였음.

<브뤼메르 18. 생 클루의 오백인회가 모인 방>_자크 사블레

'쿠데타(coup d'Etat)'란 용어의 기원

동일 체제 내에서 지배자의 교체를 목적으로 하며,

혁명과는 달리 민중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음.

국가에 대한 일격 또는 강타라는 뜻으로,

영어의 ‘stroke of state’ ‘blow of state’에 해당.

179911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디렉투와르(統領政治) 폐지 위해 의회에 대하여 쿠데타

192210B.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 의한 정권 획득

19333월 히틀러에 의한 나치스의 정권 획득

통령으로서 대불동맹 전쟁, 알프스를 넘다

1통령이 된 후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국에 강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함. 이에 나폴레옹은 원정대를 이끌고 해발 2.469m에 달하는 알프스의 산베르나르 고개(Great St Bernard pass)를 직접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 부관들은 나폴레옹의 계획을 극구 만류. 과거 한니발이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은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가 이 고개를 넘어간 역사가 없었으며 너무 험준한 협곡이라 군대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그는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말하며 밀어부쳤음.

18005월에 프랑스 원정대는 험준한 산베르나르 고개를 넘었음. 그리고 같은 해 6월에 오스트리아 군대와 맞붙은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수용하여 라인강의 절반을 프랑스측에 할양하였으며, 북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양도. 이 강화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전쟁을 지속. 그러나 소 피트가 사망하자 18023월 양국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10년 만에 안정을 맞았음.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자크루이 다비드

개혁 작업

나폴레옹은 내정 면에서도 일대 개혁을 실시.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혁명기에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공업 생산력의 회복을 실시하여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음.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 안정을 도모. 1802년에는 유명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 , 교육 개혁에도 힘써 공공 교육법을 제정. 국내법 정비에도 임하여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 이것은 각 지역의 여러 가지 관습법과 봉건법을 하나로 통일한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 활동의 자유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한 획기적인 것이었음. 그 밖에도 교육 및 교통망 정비에도 진력하였음.

대미 관계 개선

지난 수년간 프랑스는 미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 1793년에 1차 대불동맹 전쟁이 벌어진 후 입장이 난처해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1794)을 체결하며 동맹국인 프랑스를 배반했기 때문. 대불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해상 봉쇄하여 프랑스의 전쟁물자 조달을 방해. 1778년에 미국과 프랑스간에 체결된 통상동맹조약에 따라 미국에게는 프랑스와 공동방위에 나설 의무가 있었음. 그러나 미국은 신생 독립국으로 아직 국가의 기초가 확고하지 않았고 군사력도 약한 상태에서 유럽의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을 선언하였음.

그러나 영국으로서는 미국이 중립적 지위를 이용하여 프랑스와 교역을 할 경우 해상 봉쇄망에 빈틈이 생기는 만큼 이를 용납할 수 없었음. 영국은 미국을 자극하여 미국과 프랑스간에 동맹 관계를 분쇄하기 위해서 미국 상선 수백 척을 나포해버렸음.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이 다소 굴욕적인 '제이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자 동맹에게 배신당한 프랑스 총재정부는 외교적인 보복을 가했음.

유사전쟁 기간 동안 미불간에 가장 치열하게 다툰 카리브해

프랑스는 신임 공사의 부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관계 개선을 위해서 미국이 파견한 대표단에게 1778년에 체결한 조약의 폐기를 전제로 막대한 금액의 차관과 뇌물을 요구하였음. 이것이 일명 'XYZ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양국은 준 전시 상황으로 치달았음. 선전포고 행위가 없는 상태에서 양국의 해군은 해상에서 산발적으로 충돌하였으며(유사전쟁), 상대국의 상선을 포획하기도 하였음. (유사 전쟁 사진)

나폴레옹은 북미 루이지애나를 인수하여 새로운 프랑스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티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원정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이 있었음. 나폴레옹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음. 1800년에 미불 양국은 지난 1778년에 체결한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몰트퐁텐 조약(Treaty of Mortefontaine)을 통해 사태를 원만하게 마무리 지었음.

유사전쟁(Quasi war)중 교전중인 양국의 전함

아이티 침공

나폴레옹은 180111월에 3만여 명의 원정대를 아이티(산도밍고)에 파견하여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음. 카리브해의 아이티는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설탕과 커피를 생산하는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프랑스 혁명(1789)의 영향으로 흑인 노예들이 1791년 투쟁을 시작하여 1794년 흑인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낸 후 1801년에 독립을 선언했었음. 프랑스 원정대의 초기활동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180311월에 최종적으로 아이티 점령을 포기하고 철군.

아이티 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노예제 부활에 대한 현지인들의 강한 저항과 황열병 그리고 영국의 해상 봉쇄 때문이었음. 황열병은 모기에 의해 전파되며 남미 지역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질병인데 이 병으로 인해 프랑스 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음. 초기 파병 군인 33,000명 가운데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3,000명뿐이었음. 또한 영국군이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선박에 대해 강력한 해상 봉쇄에 나서자 기세가 위축되면서 요청받은 추가 파병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음.

아이티(산도밍고)180411일 정식으로 독립했으며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되었음. 이로써 아이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되었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음. 아이티의 독립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만들었으며 훗날 중남미 지역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강한 영향을 주었음.

푸른 부분이 당시 매각한 루이지애나 영토

나폴레옹의 본래 계획은 아이티를 점령한후 이곳 을 바탕으로 하여 북미 대륙 루이지애나에 식민지 제국을 건설할 계획이었음. 그러나 아이티 점령에 실패하면서 차질이 발생하였고 점차 서반구 사업에 관심을 잃어 가고 있었음. 그러던 중 나폴레옹은 1803년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미국에 매각. 그 당시 미국은 통상물량의 1/3을 미시시피 강을 통해 수송하고 있었는데 뉴얼리언스 기항에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프랑스에 사절단을 보냈음. 루이지애나는 본래 스페인 소유였으나 1800년 산일데폰소 조약(Treaty of San Ildefonso)을 비밀리에 맺고 프랑스가 소유권을 인수하였음.

그러나 아직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인수작업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감독 중인 스페인 관리가 미국 선박의 뉴올리언스 기항을 갑자기 금한 것. 지난 1795년에 미국은 스페인과 맺은 핑크니 조약을 통하여 미시시피 강의 운항권과 뉴올리언스 기항권을 보장받은 적이 있었음. 18034, 제임스 먼로가 이끄는 미국 사절단을 접견한 나폴레옹은 골치 아프게 된 루이지애나의 매입을 제안하였음. 양측의 협상 끝에 1,500만 달러라는 헐값이 책정되었고 미국의 영토는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음. 이로인해 미국에는 본격적으로 서부 개척시대가 시작되었음.

로마 가톨릭과 정교 협약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정부의 탄압을 받던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화해도 모색한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황 비오 7세와 정치 및 정교협약을 맺었으며, 개신교도 인정하여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시켰음.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가톨릭교회는 당시 프랑스 전체 토지의 10~15%를 차지하고 있었고, 게다가 프랑스 전체 GDP10%를 십일조로 받아가고 있었음. 국민공회는 1790년의 성직자기본법을 제정하고 십일조를 폐지하고 교회의 자산을 몰수한 데 이어 성직자들에게도 일종의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했었음.

국민공회의 '반가톨릭 정책'으로 예배는 금지되어 있었음. 모든 교회 재산은 몰수되어 매각되었음. 이 때문에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교황청과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된 이후에는 부서진 교회를 약 400만파운드를 들여 재건했고 교황 비오 7(Pius VII)와 정교협약을 맺어, 예배의 자유는 다시 확립되었고,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보호했음.

졍교협약 문서에 서명중인 나폴레옹 프랑수아 제라르

1802년 종신 통령

왕당파와 자코뱅 파 등의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국내 정치를 융화로 이끌었음. 한편으로는 현 체제를 뒤집으려고 시도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탄압하였음. 그리고 180282일에 그는 종신통령(종신 집정)이 되어, 자신의 독재권을 한층 더 강화하였음.

황제 즉위 위한 사전 정지 과정

왕당파의 위험이 사라지고 입법부에는 반대파가 없고 자신의 개인 인기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니 나폴레옹이 이제야말로 제위를 향한 전진을 시작할 때라고 판단한 것은 당연.

56일 호민원이 공화국 제1통령에게 평화와 국가 재건의 위해한 사업에 대한 '국민의 감사'를 결정하고, 이틀 뒤에는 이 결정 보고를 받은 원로원이 제1통령의 임기를 10년 더 연장하기로 결의. 이 결의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문제에 관하여 협의를 받은 참의원은 국민투표의 의제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종신통령으로 함이 어떤가?”로 고쳤음. 호민원도 원로원도 아무 이의가 없었음. 8월 초 국민투표의 결과는 찬성 3568,885표에 반대 8,374표였음. 이틀 뒤 84, 보나파르트가 직접 기초한 새 헌법이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공화 10년 테르미토르 16일 헌법에 관한 원로 원령으로 공포되었음.

이 공화 10년 헌법은 호민원의 의원 수를 100명에서 50명으로 줄이고, 호민원을 3부로 나누어 그 힘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회의를 비공개로 하게 하였음. 원로원은 의원 수를 늘리고 증원된 의원의 임명권을 제1통령에게 주었음. 특기해야 할 것은 참의원 의원들과 장관들 가운데서 선임되는 추밀 원(Conseil prive)이 신설된 점. 추밀원은 조약의 인준권과 원로원에서 심의되지 않은 문제들의 제안권이 있었는데,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고 제1통령의 전제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였음. 요컨대 공화 10년 헌법이 수립한 정부는 명목상으로 공화제이나 사실상으로는 군주제였음. 그러므로 2년 뒤 제정이 선포되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음.

종신 통령제는 제정에 이르는 2년간의 구멍 마개에 불과한 것이었음. 나폴레옹은 이 기간을 제정 준비에 집중하였음. 극소수의 자코뱅 과격파와 왕당파 골수분자 외에는 모든 계층의 국민이 국내 질서의 회복과 대외 평화의 실현을 쌍수로 환영. 극소수의 공화파는 나폴레옹 암살 미수 사 건을 계기로 철저히 탄압되어 이제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음. 아직도 반보나파르트 의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극소수의 맹목적인 왕당파뿐이었음. 왕당파가 영국에서 나폴레옹 암살 계획을 꾸며 프랑스로 침입했을 때 나폴레옹은 그들의 두목 카두달(Georges Cadoudal)과 피슈 그뤼 및 이들과 접촉한 모로 장군을 체포하였음. 18042월의 일.

앙갱 공작의 처형

모로는 공화주의자로서 왕당파와의 관계를 극력 부인. 그는 해외로 추방되었음.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기 에게 비협조적인 장군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독일에서 활동하는 왕당파의 세력도 일소하였음. 바덴에 망명하고 있는 앙갱 공작(Duc d'Enghien)을 몰래 납치해다가 320일 하룻밤 사이에 약식 재판을 거쳐 총살한 후 그 시체를 미리 파놓은 무덤에 묻어버렸음.

나폴레옹의 아첨꾼들은 나폴레옹 암살 계획 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가 암살로 급사할 경우 무서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과대 선전을 하면서 보나파르트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음. 그들은 보나파르트만이 혁명의 혼란을 막고 프랑스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한다고 주장했음. 사실 나폴레옹의 수법과 야심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혼란의 방파제로서의 보나파르트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

임시통령(1799, 1110~121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통령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2통령

로저 뒤코

3통령

통령(17991212~1804518)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통령

장 자크 캉바세레스

2통령

샤를 프랑수아 레브런

3통령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려 한 이유

부르봉 왕가의 왕족들이 루이 16세 의 어린 아들을 루이 17세라고 칭하였고, 그가 일찍 죽자 루이 16세의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 이 18세라고 자칭하면서 왕정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왕정을 부정하면서 다른 왕 정을 창업한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었던 것. 그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 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음.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음.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 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음.

프랑스혁명9

나폴레옹(1804~1810) 황제 시대

제정 실시

18038, 나폴레옹을 반대하며 부르봉 왕정복고를 희망하던 조르주 카두달과 왕당파들이 영국과 손을 잡고 나폴레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밈. 프랑스의 피슈그뢰와 모로 장군 등도 이 계획에 가담. 그러나 1804년 초에 발각되어 카두달 등은 처형. 배후에 영국이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고 나폴레옹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 측근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 암살 음모 발각은 권력 항구화에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헌법상 세습 황제가 되면 부르봉 왕실에 의한 왕정복고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

이에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함. 18047월의 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 그러나 당시 선거는 비밀선거가 아니었으며, 각 선거인이 선택내용을 선거대장에 올리고 서명하는 방식이라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 아무튼 나폴레옹은 180412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

황제 대관식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교황으로부터 축성받기 위해 교황을 초대. 교황 비오 7세는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관을 씌어주기 위해서 즉위식에 참석. 그러나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썼으므로 교황 비오 7세는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음.

대관식에서 조제핀에게 직접 황후관을 하사하는 나폴레옹, 다비드, 루브르 박물관 소장

파리 정비 사업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 그는 가구의 새로운 계산법(짝수법, 홀수법)을 마련하고,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 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음. 또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위인들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세워지고, 교량이 건설되었음.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나폴레옹

황제 시절의 나폴레옹. 근위기병 대령 복장을 하고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베토벤 교향곡 영웅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주었음. 베토벤은 1802년에 빈 주재 프랑스대사로부터 나폴레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 그래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작곡 중인 교향곡 제3번을 보나파르트라고 명명. 그러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탄식하며 '보나파르트'라고 적혀있던 악보의 표지를 찢어서 내팽개친 것으로 전해짐. 헌정 또한 포기했으며 제목도 영웅으로 변경.

아미앙 조약 풍자화. 제임스 길레이, 10년만의 첫키스 또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시민의 만남 (1803)

3차 대불동맹 전쟁

얼마 후 아미앵 조약은 영국 측이 파기하여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다시 전쟁 상태로 들어감. 1805,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위해 도버 해협을 접한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음. 이에 대항하여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등을 끌어들여 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중립국으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서 영국에게서 빼앗은 하노버를 프로이센에 양도한다는 약속을 했음.

프랑스 육군은 10월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빈을 점령.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구원하러 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즉위 1주년인 122일에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를 치렀음. 나폴레옹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완승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 조약을 체결하여 항복을 선언.

이 전투는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3황제 회전이라고도 불림. 나폴레옹은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혼자서 능히 제압한 프랑스 육군의 위광은 곧 전 유럽에 떨치게 되었음.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나폴레옹, 프란시스 제라드 작(). 1805122일 프랑수아 제라르

에투알 개선문.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서 영감을 받은 이 개선문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1806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승리한 뒤 프랑스 군대의 모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게 한 것으로, 이후 전 세계에 국가나 승전 기념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트라팔가 해전

18051021일 넬슨의 영국함대가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에스파냐 남서쪽 끝의 트라팔가르에서 격파한 해전. 이로써 제해권 차지에 실패하자 영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포기했음. 나폴레옹은 1805년 여름, 영국 본토 상륙군 15만을 집결시키는 한편 해군에게 영국 함대를 견제하라고 명하였으나 시일에 맞추지 못하여 815일 넬슨의 함대가 영국해협에 집결하였음.

나폴레옹은 체념하고 상륙군을 동쪽으로 옮기게 하고 에스파냐의 카디스에 있던 빌뇌브 제독의 연합함대를 이탈리아로 움직이려고 하였음. 카디스 남방 트라팔가르곶의 앞바다에서 연합함대 33척은 넬슨의 함대 27척의 습격을 받아, 침몰 5, 포획당한 함선 17, 전사자 8,000명이라는 참패를 당하였음. 영국측의 전사자는 넬슨 이하 1,663명이었음. 나폴레옹의 울름, 아우스테를리츠(Austerlitz)의 승리는 그 전야였으나 영국의 제해권은 이때 확립되었음.

신성로마제국 해체

유럽 대륙의 중앙부를 제압한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는 나폴리 국왕으로, 18066월에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에 각각 앉히고 자신은 라인 동맹을 발족시켜 이를 보호국화함으로써 독일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음. 이로써 샤를마뉴 대에서부터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압승은 무엇보다도 신성 로마 황제와 동로마 황제의 후예를 자처했던 러시아 황제를 모두 누른 전투로 의미가 깊음. 결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모두 동시에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섬나라 영국과 나폴레옹을 대륙에서 홀로 맞붙어야 하는 프로이센만 남게 되었음.

한편 나폴레옹은 독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주장하며 라인 동맹을 구성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는 18068월 사실상 반 강제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음. 이에 사실상 유일하게 반발했던 프로이센이 180610월 나폴레옹을 상대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벌이나 참패를 당하며 사실상 나라가 멸망 직전에 몰리게 됨. 여러모로 나폴레옹은 유럽 최고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음. 하지만 이 시기에 잠재 되어있던 여러 문제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을 만들어내게 됨.

오스트리아의 황제로서의 프란츠 2세를 그린 그림, 날짜 미상, 잘츠부르크 박물관

대륙 봉쇄령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프로이센은 결국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어, 1806년 영국·러시아·스웨덴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조직. 나폴레옹은 10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으로 도피하였음.

180611월에 베를린 칙령을 통해 대륙봉쇄령을 내렸음. 영국과의 통상 및 통신의 금지, 영국선박의 대륙 내 항구 출입 금지와 위반 선박의 몰수 등이 대륙봉쇄령의 주요 내용. 이를 통해 대불동맹의 주도국인 영국을 고립하여 경제적으로 굴복시키고자 했으며 프랑스의 대륙경제 지배력을 확대하려 하였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역효과가 발생. 산업혁명으로 품질이 우수한 영국 제품의 공급이 차단되자 물자 부족현상이 발생하며 밀수가 성행. 나폴레옹 자신도 군용 외투와 군화를 영국에서 밀수해 와야 할 형편. 영국은 대륙봉쇄령에 맞서 면화, 향신료, 설탕, 커피 등을 싣고 대륙으로 향하는 선박의 이동을 해상에서 차단하였음. 영국의 역봉쇄 조치로 인해 생필품 부족 현상이 극심해지자 대륙 내의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었음.

바르샤바 대공국

1807,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격. 같은 해,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을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격파하였음.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키고 폴란드 지역들을 하나로 묶어 바르샤바 대공국을 형성시켰으며, 남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베스트팔렌의 왕으로 임명하여 두 나라를 프랑스 제국의 위성 국가로 지정하였음.

바르샤바 공국 Księstwo Warszawskie 1807~1815

포르투갈 침공

포르투갈이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 선박들의 리스본 항구 출입을 허용하자 프랑스는 180711월에 포르투갈을 침공. 먼저 스페인과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에 대한 분할통치를 협약한 나폴레옹은 앙도슈 쥐노 장군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포르투갈로 진군을 명했음.

침공이 시작되자 포르투갈 왕실은 귀족과 관리, 부유한 상인등 약 1만여명과 함께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도피. 프랑스 군은 손쉽게 포르투갈을 정복했으나 점령통치에는 어려움이 많았음. 포르투갈에 상륙한 영국군과 재결집한 포르투갈 군대 그리고 포르투갈 민중의 강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 여러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이듬해 8월에 포르투갈에서 퇴각하였으며 이후 1809년과 1810년에 포르투갈을 재차 침공하였음.

반도전쟁(이베리아 반도 독립전쟁) Louis François Lejeune - en:wikipedia

스페인 점령

1808, 스페인에는 포르투갈 침공의 명분으로 10만명의 프랑스 군이 진주해 있었음.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스페인 지배를 노리던 나폴레옹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음.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고도이 내각으로 인해 지쳐 있었음. 그러던 중 외국 군대가 상주하게 되자 강하게 반발하였고 1808318, 왕세자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개혁파가 아란후에스(Aranjuez)에서 반란을 일으켰음. 카를로스 4세가 319일에 퇴위를 결정하였고 왕세자가 페르난도 7세가 즉위했으나 며칠뒤 카를로스 4세가 퇴위를 번복하며 나폴레옹에게 지지를 요청했음.

나폴레옹은 중재를 명분삼아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모두 바요나로 오도록 유도한후 이들을 협박하여 왕권을 양도 받았음.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위 찬탈은 정의롭지 못했으며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인정한 바가 있음. 새로운 국왕으로는 자신의 친형인 조제프를 임명한후에 스페인이 영국과 양모 밀무역을 하며 대륙봉쇄령을 어겼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정복하였음.

한편 마드리드에서는 나머지 스페인 왕실 가족이 프랑스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로 떠나려고 하자 52일 마드리드 주민들이 프랑스 군대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음. 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 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 이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에 저항하는 게릴라 전이 스페인 전역에 걸쳐서 거세게 일어났으며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음. 이후 영국군의 도움을 받은 스페인 게릴라들의 활동은 끓임없이 프랑스 군을 괴롭혔고 끝내 프랑스는 1813년에 스페인에서 철수하였음.

게릴라 Guerrilla 어원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대항하던 스페인의 비정규 무장집단들을 지칭하던 스페인어로 '전쟁'을 뜻하는 "Guerra"'작은(small)'을 뜻하는 접미사 "illa"가 합쳐진 이름인 게리야.

프란시스코 데 고야 1814'마드리드, 180853(El 3 de mayo en Madrid)'

프란시스코 고야, '전쟁의 참화' 36번 판화. 1812~1815, 스페인 국립도서관 소장.

중남미 지역의 독립

경제적 수탈과 차별, 불평등으로 얼룩지며 300년간 이어진 중남미 지역의 스페인 식민통치는 현지인들에게 많은 불만을 품게 만들었음.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루소나 몽테스키외 등에 의해 전파된 계몽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사상은 식민지의 지식인들에게도 이미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음. 가장 많은 불만을 품은 계층은 상류층에 속하는 크레욜로(식민지 출신 백인)들이었음.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으나 스페인 본토 출신인 페닌슐라(Peninsulares)들에 비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차별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 양측간의 갈등은 엘리트 계층에 속했던 크레욜로(Criollo)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였음.

스페인이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에게 완패하며 대서양 무역 독점권을 상실하자 남미 식민지에서는 스페인과의 무역 독점체제에서 벗어나 유럽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독립이 진행되었음. 정치적인 독립투쟁의 불길을 당긴 사건은 1807년 프랑스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침공이었음. 다음해인 1808년에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위를 찬탈한 후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책봉하자 중남미 식민지에서는 정통성을 문제삼아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런 권력의 공백은 1810년부터 중남미 지역에서 본격적인 독립 투쟁이 전개되도록 만들었음.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카를로스 4)으로부터 식민지 통치권을 양도받았으나 식민지 독립투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음. 지난 트라팔가 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대륙봉쇄령에 맞선 영국의 해상봉쇄와 방해가 있었기 때문.

중남미 독립 무장 투쟁 (1810-1825)

멕시코를 위시한 중미지역(누에바 에스파냐)의 독립운동은 1810916일 이달고 신부의 '톨로레스의 절규'를 계기로 시작되었음.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주축이된 이들의 봉기는 동조자가 10만명까지 불어나며 여러도시를 해방시켰음. 그러나 이들은 전투 경험도 없었고 훈련받지도 못했으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했음. 특히 상류층인 크리욜로들은 이들의 활동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오해를 하며 스페인군과 협력하였고 독립운동은 쉽게 진압당하고 말았음. 이달고 신부는 1811년에 생포된 뒤 처형되었음.

1810916일 횃불을 든 채 에스파냐에 맞서 민중 봉기를 이끌고 있는 이달고 신부(가운데 까만 옷)와 반란군 모습을 그린 벽화

이달고 신부에 이어 모렐로스 신부가 투쟁을 주도하며 독립정부를 세우기는 했으나 1815, 스페인군에 생포된 후 총살되었음. 이들의 순교는 이투르비테의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821년에 코르도바 조약을 통해 멕시코와 중미지역은 독립을 인정받았음.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의 남부지역(라플라타+페루)은 산 마르틴을 중심으로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고, 북부지역(누에바그라나다)은 시몬 볼리바르의 지도하에 15년간 진행된 무장투쟁을 통하여 1825년에 독립을 쟁취하였음.

브라질은 1822년에 포르투갈의 왕세자 동 페드루가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브라질 황제로 등극 후 독립을 선포하면서 브라질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시켰음.

중남미 국가별 독립연도

퐁텐블로 정교조약

교황 비오 7세가 전쟁에 반대하고 중립을 고수하며 대륙봉쇄령을 지지하지 않자 18082월에 나폴레옹은 로마를 점령한 후 다음해 5월에 교황령을 합병해 버렸음. 교황이 반발하며 1809610일에 파문을 선포하자 체포하여 사보나에 유폐시켰음. 18125월에 교황을 퐁텐블로로 강제 이송한 후 18131월 교황령에 대한 권리포기 등 광범위한 양도를 강요하여 '퐁텐블로 정교조약'에 서명을 받아내었음.

유럽에서 전쟁이 재발하자 교황과 나폴레옹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 교황은 중립을 고수하며 대륙봉쇄령을 지지하지 않자 18082월에 나폴레옹은 로마를 점령하고 다음해 5월에 교황령을 합병해 버렸다. 이에 반발하여 1809610일에 파문을 선포하자 즉시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제노바 인근 사보나에 구금되는 수모를 겪었다. 18125월에 퐁텐블로로 강제 이송된후 18131월 교황령에 대한 권리포기등 광범위한 양도 조항이 포함된 '퐁텐블로 정교조약'에 서명을 강요받았음. 쇠약하고 병든 교황은 이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음. 1814년 비오 7세는 로마에 재입성하여 예수회를 복구하였음. 교황령은 1815년 빈 회의에서 콘살비 추기경에 의해 회복되었음.

교황 비오 7Jacques-Louis David 자크루이 다비드

스웨덴 왕위 계승

1809년 스웨덴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새로운 국왕이 즉위. 그러나 신임국왕은 이미 연로하고 병약했을뿐만아니라 후사가 없었음. 더욱이 사고로 인해 추정 차기 왕위계승자가 사망하고 말았음. 그러자 스웨덴은 1810년에 프랑스 육군 원수 베르나도트에게 스웨덴 차기 왕위계승을 제의하였음.스웨덴은 러시아에게 빼앗긴 핀란드를 되찾을 수 있는 유능하면서도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군인출신이 차기 왕위 계승권자가 되길 원했음. 베르나도트는 평민출신의 일개 사병으로 출발하여 프랑스 원수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지난 1806년 뤼벡 전투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군에 대해 자비를 베푼 바 있어 군부는 그를 선호했음. 또한 베르나도트 장군은 나폴레옹 1세의 보나파르트 가문과 혼인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음.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와의 관계가 원만치는 못했으나 프랑스 육군원수가 국왕이 되면 스웨덴과의 동맹이 공고히 될것으로 보고 이를 승낙하였음. 그러나 이런 나폴레옹의 기대는 점차 깨어지면서 후회 하게 되었음.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왕국의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서 섭정(1810)이 되어 통치에 임하며, 점점 나폴레옹과 대립각을 세워나갔음. 결국 스웨덴은 1813년에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합류하여 나폴레옹 몰락에 앞장서고 말았음.

장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훗날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비난하면서 3번이나 그를 총살시킬 기회가 있었으나 관대하게 처결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옛 약혼녀였던 데지레의 남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음. 과거에 자신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데지레에게 느끼는 애틋한 감정이 베르나도트에 대한 악감정보다 컸던 것.

베르나도트는 1799년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중립을 표방하며 비협조적이었고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에도 형식적인 충성서약을 했을뿐 계속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1804년에 육군원수에 봉하면서까지 그를 중용하였으나 끝내는 배신 당하고 말았음. 한편 베르나도트는 1818년 칼 13세가 사망하자 칼 14세로서 스웨덴 국왕에 즉위하여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시조가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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