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6& 누들스[10/10]
나폴레옹(1811~1821년) 몰락
1811년 당시의 유럽의 상황
진한 푸른색: 프랑스 제1제국
옅은 푸른색: 프랑스의 위성국 및 점령지
희미한 푸른색:프랑스에 의해 대륙봉쇄령에 강제 참여한 국가들
나폴레옹의 몰락은 대륙봉쇄령(1806년)으로부터 시작되었음.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야기된 물자부족과 생필품 부족은 유럽 민중들을 고통스럽게 하여 반나폴레옹 감정을 고조시켰음. 봉쇄령 위반을 응징하기 위해 시작한 이베리아 반도 점령 실패와 러시아 원정(1812년) 실패로 인해 프랑스 육군은 큰 손실을 입었음.
러시아 원정 개시
1806년에는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시켰음.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1810년부터 대륙봉쇄령을 위반. 이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1812년 5월 당시로선 유례 없는 61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 정벌에 나섬.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옴. 스페인 전역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침공함으로써, 동시에 두 개의 전선을 만들어 메우기 힘든 틈이 생겨버린 것.
1812년 5월 9일 나폴레옹은 생클루 궁을 출발하여, 15일에 독일의 드레스덴에 이르러 오스트리아 황제, 프로이센 왕, 라인 연방의 통치자들과 회합하여 그들의 충성을 다짐받았음. 러시아 황제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에서 철수하기만하면 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최후통첩을 나폴레옹에게 보냈음. 이 통첩에 대한 나폴레옹의 응답은 비스툴라 강까지의 진격 명령이었음.
그는 드레스덴에서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진출하여 5월 31일에는 자신의 대군에게 리투아니아로 진격할 것을 명령. 그의 대군은 6월 23일 러시아의 국경 네만 강에 이르렀으며, 그런 뒤 코브노에서 강을 건너 러시아로 침입. 이렇게 해서 러시아군은 초기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후퇴만 거듭하는 것으로 보였음.
나폴레옹의 대군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60만을 넘어섰는데, 그중 20만이 후비군으로 독일에 남고 실질적으로 진격한 병력은 40만 명이었음. 대군의 중핵을 구성한 프랑스군은 20만 명이 채 안됐고, 나머지는 전부 나폴레옹 정권 지배하의 다른 나라의 군인들이었음.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라인 연방의 독일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크로아티아인, 폴란드인 등으로 구성되었음.
9월 7일에 보로디노 근처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승리. 이후 프랑스군은 모스크바로 진격. 러시아의 쿠투조프 장군은 전투를 피하고 퇴각하면서 곡식과 건물에 불을 지르는 청야전술을 통하여 프랑스군의 군식량의 현지조달을 방해했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프랑스군의 막사로 이용할 만한 시설물을 파괴해버렸음.
9월 15일, 프랑스는 쉽게 모스크바를 점령.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러시아군은 모스크바를 불태운 후 철수해버렸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음.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프랑스군은 결국 10월에 퇴각.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적 타격을 가하였음.
프랑스 화가 장 샤를 랑글루아의 그림으로,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중 일어난 스몰렌스크 전투를 묘사
청야(淸野)전술
방어군 측에서 자발적으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버려 적군이 보급의 한계를 느끼고 지치게 만드는 전술. 나폴레옹의 대군이 러시아를 공격할 당시 24만명이었던 러시아 국경수비군은 프랑스군에 맞서 방어했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음. 프랑스군은 그 여세를 몰아 1812년 8월에는 스몰렌스크까지 점령. 문제는 그 스몰렌스크라는 지역이 수도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쿠투조프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반격을 준비. 8월 말 쿠투조프 사령관은 모스크바의 근교인 보로디노에서 전투를 벌여 비록 어느 한쪽이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스군 5만 명을 섬멸하기도 했었음. 쿠투조프 사령관과 알렉산드르 1세는 마침내 모스크바를 비우고 후퇴하는 작전을 사용하기로 결정. 이전까지 프랑스에 맞서 수없이 전투를 치렀던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청야전술을 펼쳐서, 러시아 국토 내부로 프랑스군을 깊숙이 끌어들이며 꾸준히 반격을 가해 차츰 프랑스군의 희생자를 늘렸음.
다만, 이 후퇴작전을 총지휘한 것은 쿠투조프가 아니라 스코틀랜드계 조상을 둔 발트태생 바클라이 드톨리였고, 쿠투조프는 보로디노 전투 전부터 러시아군을 지휘했음. 청야전술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게 현재 중론이고 초기 경질된 '바클라이 드톨리'의 공이 컸지만, 외국계라 쿠투조프만 민족영웅이 된 것.
19세기 독일의 화가 아돌프 노르던이 그린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퇴각’(1851). /위키피디아
10월 모스크바 퇴각
1812년 9월 초 나폴레옹은 남은 11만의 군대를 이끌고 텅 빈 모스크바를 점령. 9월 16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하늘을 찌르는 것과 같은 불타는 도심을 보게 됨. 사실 모스크바 시는 그 전날부터 붙기 시작한 불길이 꺼지지 않은 상태였고, 나폴레옹의 한 부관은 이에 대해, 우리는 불의 대지 위, 불의 하늘 아래, 불의 두 벽 사이를 걸었다고 기록. 이 불은 4일 동안 지속됐고, 모스크바는 잿더미가 됐음. 이 잿더미의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에게 평화 교섭을 제의했으나 러시아 황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
거기다 러시아의 추위는 나폴레옹이 예상했던 것 보다 일찍 다가왔음. 모스크바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은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었음. 군대에는 겨울옷이 없었으며, 추위와 허기에 지친 군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모스크바 교외에 나타나면 잠복하고 있던 러시아군이 이들을 습격했음. 나폴레옹은 이후 한 달 동안이나 모스크바에서 차르가 항복해오길 멍하니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10월 18일에서야 퇴각을 시작했고, 이 후퇴는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가장 유명한 퇴각이 되었음. 이후 식량도 없고 보급품도 떨어진 상태로 11월의 추위 속에서 게릴라와 싸우며 수많은 병력을 잃고 말았음.
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 들어간 저녁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가 6일 동안이나 큰불에 휩싸였고, 그 바람에 모스크바 대부분의 폐허로 변해버렸음. 동시에 이 절대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의 반격 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이후 베레지나 강을 건너면서 수천 명이 익사하는 등 실패를 거듭하며 퇴각한 뒤에 12월에는 파리에서 모스크바 입성 당시 10만 명이었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음.
결국 40만이 전투 & 비전투 손실로 희생되고 10만여가 포로로 잡히면서 대육군은 이름만 남게 됨. 노명식이 쓴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에 따르면, 총 병력 60만 중 25만이 전사하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15만 명이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고 함. 러시아 원정은 이렇게 대실패로 끝났음.
불타는 러시아를 뒤로 하고 퇴각하는 나폴레옹
반도 전쟁 실패 = 스페인 독립 전쟁
1807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대륙 제패 체제에 가입시켰고, 1808년에는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위에 즉위시켰음. 그러나 이 조치는 두 나라의 민족적인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스페인의 게릴라 활동을 촉발시켰음. 이 게릴라들은 적극적인 활동으로 전성기에 있던 나폴레옹의 군대를 교란하고, 해방 전쟁의 발단을 열었으며, 이것은 곧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되었음. 1812년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 스페인의 연합군은 살라망카에서 승리를 거두어 마드리드를 점령한 다음, 프랑스인을 축출하였음.
영국이 혁명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상군을 유럽 대륙의 이베리아 반도로 파병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시작. 프랑스군은 게릴라군과의 싸움에 끝없이 시달리게 됨. 나폴레옹은 최대한 빨리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마무리지으려 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평원에서 나폴레옹의 군대가 지금까지 이겨왔던 방식은 험난한 산지로 가득한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이렇게 시작된 스페인·포르투갈과의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약 30만 명의 병력을 잃음.
대불동맹 재결성 : 트라헨베르크 작전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反)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음.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과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도 참가하였음.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 등이 동맹을 맺었고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까지 동맹에 가입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음. 이 동맹에 맞서 나폴레옹은 고작 몇 달 만에 새로운 군대 양성을 시도했고, 일부 병력은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성장했음.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음. 이를 통해 초반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점차 전쟁은 피차의 소모전으로 흘러가며 나폴레옹의 입지를 좁혔음. 더군다나 대불동맹군은 워낙 강한 나폴레옹 본인과의 교전을 피하고 다른 장군들을 각개격파하며 프랑스군의 총 전력을 약화시켜 나갔음. (트라헨베르크 작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후퇴했음. 1813년 8월 반불 동맹군과 나폴레옹군은 마지막 결전 준비를 마쳤고, 현재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에서 맞섰으며, 드레스덴에서의 전투는 어느쪽에도 승리를 주지 않았음. 그러나 승패를 가르는 결전은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발생했음.
나폴레옹은 4일간의 격전에서 6만 5,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전투 개시 2일째인 18일 나폴레옹 휘하의 작센 부대가 동맹군 쪽으로 전향하면서 전세가 순식간에 나폴레옹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렀음. 결국 나폴레옹은 전면 후퇴를 명했고, 라인 강 쪽으로 후퇴하던 나폴레옹군은 하나우에서 또 다시 바이에른군의 요격을 받아 큰 손실을 받았음.
라이프치히 전투 바라디미르 모스코프 1815년 그림Vladimir Moshkov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프랑스 제국은 1814년 1월쯤에는 이미 라인강을 넘어 프랑스 파리까지 밀리고 있었음.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여전해서 갓 징집한 15만 명 남짓의 병력으로 동맹군의 38만 병력과 맞서며 3만 명의 기동대로 러시아 제국군 5000명 병력을 덮쳐서 전멸시키고 이후 2만 명 남짓 병력으로 블뤼허가 이끄는 12만 명의 프로이센군을 3차례에 걸쳐 일시적으로 격파해 퇴각시키지만, 사방팔방에서 밀려드는 동맹군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음.
라이프치히의 나폴레옹과 포니아토프스키, January Suchodolski그림.January Suchodolski - 미상
라이프치히 전투
파리 함락과 퇴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한 동맹국들은 나폴레옹을 황제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파리로의 진격을 서약하였음. 1814년 2월의 마지막 주에 프로이센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이끄는 군대가 선봉으로 파리로 진격. 나폴레옹의 두 육군 원수인 에두아르 모르티에와 오퀴스트 마르몽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부대를 파견. 하지만, 단지 10,000명의 병력으로 블뤼허의 대부대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 마른강에서 블뤼허가 책략에 걸려들길 바라면서 나폴레옹은 약 30,000의 부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서둘러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음.
2월말에서 3월초까지 블뤼허 군대가 모르테이와 마르몽의 군대를 공격한 우르크강에서의 전투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나폴레옹의 군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북으로의 후퇴 명령을 내렸음. 프로이센 군대는 물이 불은 엔강을 건넜고, 3월 4일에 수아송에 도착. 증원군이 도착하여 블뤼허의 부대는 100,000에 달했음. 3월 7일 슈멩데담을 따라 서쪽에서 나폴레옹이 블뤼허 부대를 공격해 크라온 전투에서 승리.
블뤼허의 책략은 먹이지 않았고, 프로이센의 군대는 랑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음.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랑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하였음. 나폴레옹을 도와주기 위해 조아생 뮈라는 톨렌티노 전투를 야기시켰으나 뮈라 역시 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붙잡혀서 총살당했음.
퐁텐블로에서 퇴위하는 나폴레옹폴 들라로슈폴 들라로슈 -
1814년 4월 6일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한달 후,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즉위.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추방되었고, 승리한 군사동맹국들은 빈 회의에서 유럽의 재편을 모색하고 있었음. 이상의 1814년 2~4월 파리 함락과 퇴위 상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음.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 명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 명이, 남쪽에서는 웰즈리 장군의 10만 명의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음.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음. 3월 31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함락.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부대의 승리 기념 퍼레이드가 파리에서 열릴 정도로 굴욕을 당하게 됨. 나폴레옹은 아직 싸울 생각이었으나 거기에 동의할 사람이 없었음.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4월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대불 동맹국에게 투항함.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음.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William Milligan Sloan의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삽화
엘바 섬 유배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코르시카를 프랑스에서 분리 독립시켜 나폴레옹을 코르시카의 영주로 보내버리려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불침무적의 요새로 만들어 재차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다시 동맹국에 도전할 것이라는 우려로 포기. 당시 동맹국은 나폴레옹에 대한 극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음. 그리하여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추방지로 샤르데냐, 미국, 세인트 헬레나, 심지어 호주 쪽까지 고려하였으며 결국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엘바 섬(고향 코르시카와 가깝다.)를 유배지로 선택함.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음.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음.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음.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음.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음. 프랑스 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1살 아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로 왕좌에 앉게 되는데 프랑스를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평판이 매우 안 좋은 왕이었음. 거기다 혁명으로 쫓겨났던 왕당파들이 귀국해서는 보상을 챙기려드는 통에 프랑스는 어수선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왕당파는 나폴레옹에게 약속했던 연금을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암살자를 고용해 끊임없이 그를 암살하려 했고 영국은 이를 조장하거나 방관했음. 게다가 그가 다스리던 엘바 섬은 고향 코르시카와는 다르게 황제 나폴레옹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 모욕적인 언사는 물론 나폴레옹이 내리는 명령도 다 거부하거나 반항하기 일쑤였음.
엘바섬의 나폴레옹 /위키피디아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백일천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음.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 그 와중에 차츰 유럽 제국들의 밥그릇 싸움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유리한 패를 가지기 위해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는 것을 방조함. 그 틈을 타 나폴레옹은 탈출에 성공. 1815년에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 데 성공함.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음.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전쟁을 하게 되었음.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 공격으로 패하여 나플레옹의 백일천하는 끝남.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빠져나와 파리에서 도착한 1815년 3월 20일부터 루이 18세가 복위된 7월 8일까지까 100일 천하. 이 기간에 워털루 전투와 나폴리 전쟁이 있었음. 백일천하(프랑스어: les Cent Jours)라는 문구는 파리의 경찰청장인 사브롤 백작이 왕을 맞이하는 연설에서 처음 사용되었음.
1815년 2월 26일 엘바섬을 떠나는 나폴레옹 /위키피디아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워털루 전투
1815년 6월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1세가 이끈 프랑스군이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Waterloo)에서 벌인 전투로,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나폴레옹 1세의 지배가 끝나게 됨. 나폴레옹(1769~1821)이 이끈 프랑스군은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후 각 지역의 민족주의적 반란에 부닥쳤음. 그리고 마침내 1814년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파리를 점령당했음.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되었음(1814.5.4). 그리고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1755~1824)가 황제로 즉위하여 왕정이 복고되었음. 하지만 프랑스 시민들은 무능한 루이 18세에 실망하였고 나폴레옹을 다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음.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칸느(Cannes)에 상륙하였고 충직한 부하 1000여 명과 함께 파리로 북상하였음. 루이 18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관군을 보내 진압하게 하였음. 하지만 관군은 오히려 나폴레옹에 합세. 루이 18세의 왕정은 영국으로 도망가고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자와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20여 일 만에 파리에 입성해 다시 권력을 장악했음.
하지만 당시 각국은 나폴레옹을 타도하기로 협약되었고 그들 동맹국의 병사는 70만 명을 넘었음. 나폴레옹은 초전에 이들을 각개격파하면 정치적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관계가 와해될 것으로 판단했음. 그 해 6월, 나폴레옹은 12만 500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웰링턴(1769~1852)이 지휘하는 약 9만 5000명의 영국군과 블뤼허(1742~1819)가 지휘하는 약 12만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기로 결심했음.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 남방 교외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6월 16일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해 퇴각시키고, 6월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음.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지만, 퇴각했던 블뤼허의 프로이센군 6만 명이 다시 기습을 하여 전세가 역전되었음. 프랑스군은 결국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영국군의 공세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하였음. 프랑스군의 전사자는 4만 명에 이르렀으며, 영국군 전사자는 1만 5000명, 프로이센군은 7000명 가량이었음.
전투개시 직전 쏟아져 시간지연을 야기한 폭우, 당일 너무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 영국 동맹군으로 참전해 전장 각종 요지를 끈질기게 방어해 시간을 끌어준 네덜란드군, 참모장 술트의 무능함, 영국군이 총퇴각하는 것으로 오인해 기병 단독돌격을 감행해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네 원수, 3만의 병력으로 엉뚱한 곳을 헤메고 다녀 영국군 조차 배신했다고 착각하게 한 그루시 원수. 하지만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그루시의 3만 기병대가 프로이센보다 먼저 도착했다면 승리는 프랑스에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았음.
재퇴위
그렇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끝이 났고, 프랑스 의회가 온통 적들로 가득찬 상태에서 그는 퇴위할 수 밖에 없었음. 많은 평민들은 여전히 '황제폐하 만세'를 외쳤지만 워털루의 그 끔찍했던 킬링 필드의 모습은 그를 모든 재기의욕을 상실한 정신적 방전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으로 보임.
조제핀이 말년에 기거했던 말메종에 잠시 머물며 옛 추억을 회상하던 나폴레옹은,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파리 외곽으로 접근해 오자 서둘러 피할 수 밖에 없었음.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해상을 봉쇄한 영국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음. 이에 영국에 명예롭게 항복하기 위해 6월 22일 영국 전함 벨레로폰 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지만 영국은 그의 영국 상륙 자체는 허가했으나 계속 그를 항구에 묶어 놓았고, 결국 세인트헬레나 유배라는 조치를 취함.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조그마한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지가 결정되었다는 통보에 나폴레옹 본인도 탄식을 금치 못했고, "그런 격오지에 가서 뭘 하겠냐'라며 낙담했음. 그런데 이 말이 "그런 곳 갈 바에 차라리 죽겠다"로 와전되어 영국 측에서 난리가 났음. 영국군은 나폴레옹 측근들에게 황제가 자살하면 '당신들에게 책임을 물어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를 했으며, 그들은 나폴레옹을 설득해야만 했음.
측근들은 시간이 흘러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수도 있을 거라고 황제에게 간청하였고, 결국 나폴레옹은 "나의 운명을 완성하겠다."라고 말하며 1815년 8월 7일, 순순히 아메리카급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올라 아프리카 적도 근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기약 없는 두 번째 유배길을 떠남. 100일이 넘던 항해 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음. 1815년 10월 15일 섬 도착.
그는 거의 독서를 하거나, 항해에 관련된 기술적, 과학적 지식들을 물어보거나, 자신들이 거쳐가는 지리에 대한 정보를 탐독. 저녁에는 측근들과 카드놀이를 하거나 체스를 두었음. 함장도 최대한 나폴레옹을 배려해주었고 영국 해군 장병들도 황제와 그 일행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함.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자 황제는 답례로 모든 승조원들에게 금화를 나눠주려고도 했음.
나폴레옹은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롱우드의 저택에서 생활하였음. 그 저택 주위에는 많은 보초병들이 지키고 서서 나폴레옹의 행동을 실시간 감시하였음. 또 집밖으로의 외출도 제한되어 실질적으로 감금 생활이나 다름없었음.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은 수행원에게 구술 필기시킨 방대한 회상록을 남겼음. 에마뉴엘 라스 카즈의 세인트 헬레나의 회상 등. 이것들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관과 역사관, 인생관을 총망라한 것이어서 나폴레옹 전설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음. 세인트헬레나에 유폐된 동안 나폴레옹은 체스와 영어 공부에 매진하였음.
나폴레옹은 특히 세인트헬레나섬의 총독인 허드슨으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음. 그는 무례하게도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영화에선 포도주에 파리) 나폴레옹을 철저하게 조롱했음. 또, 나폴레옹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켰음.
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매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세상을 떠났음. 공식적인 사인은 위암이라고 알려져 있음. 그의 유해는 1840년 5월에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음.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났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도 끝이 났음.
파리 엥발리드 박물관에 있는 나폴레옹의 무덤 (출처: 위키피디아)
결혼과 자녀
1793년에 코르시카를 떠나 마르세유에 정착하면서 그곳에 유복한 상인 집안인 클라리 가와 친해짐. 형 조제프는 1794년 8월에 클라리 가의 마리 줄리와 결혼하였고, 나폴레옹은 마리 줄리의 여동생 데지레 클라리와 연인 사이가 되어 95년 4월에 약혼식을 올렸음. 그러나 데지레와 파혼하고, 귀족의 미망인으로 바라스의 애인이기도 한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1796년 3월 9일에 결혼함.
황제에 즉위한 이후 항후 조제핀이 세습을 위한 2세를 낳지 못하자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은 14년 동안 함께 살아온 황후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음. 마리 루이즈는 이듬해인 1811년에 로마왕 나폴레옹 2세을 낳게 됨. 하지만 장인 프란츠 1세는 사위인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나폴레옹 역시 장인을 망국의 군주로 비루하게 여겼기 때문에, 훗날 프란츠 1세는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였음.
나폴레옹의 약혼녀였던 데지레는 1798년 8월 장 베르나도트와 결혼하였음. 이듬해 아들을 낳은 그녀는 나폴레옹에게 아이의 대부가 되어 줄 것과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했음. 나폴레옹은 아이를 위해 '오스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음. 그녀의 남편인 장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 대해 비협조적이었기에 나폴레옹은 그와 매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음. 장 베르나도트는 1810년에 스웨덴 왕국의 섭정이 되어 스웨덴을 통치하면서부터 점진적으로 반-나폴레옹 정책을 펼쳤고 끝내 나폴레옹의 몰락에 앞장서는 인물이 되었음.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이혼
유럽의 재편 빈 체제
나폴레옹의 퇴진 이후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가의 왕정으로 돌아갔으며,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하였던 망명 귀족들이 다시 돌아와 잃었던 특권을 회복하였음. 승리한 연합국들은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 유럽을 재편하기 위한 회의를 하였음. 메테르니히(1773~1859)가 주도한 빈 회의의 성격은 반동 복고적이었음. 각국의 절대왕정은 군대와 비밀경찰, 검열 제도를 강화하여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확산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억압하려 하였음.
빈 체제(Vienna System)란 1814년에서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서 개최된 빈 회의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 사이에 약속된 복고적(復古的) 세력 균형 체제를 이름. 회의의 주요 주재자였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따 메테르니히 체제(Metternichsches System),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 또는 5두 체제(pentarchy)[1]라고도 함.
전후 개최된 빈 회의에서는, 온 유럽을 전쟁의 불바다로 만든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난 바탕에 프랑스 혁명, 더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이 있는 것으로 보았음.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권력층은 단순히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민들의 불만을 받아들이고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구(舊) 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다."라 결정하였고 그것이 빈 체제의 주요 골자였음.
때문에 만약 각국에서 이런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일어날 경우 유럽 국가들은 이런 운동을 진압해야 할 책임이 있었고 만약 진압되지 못 할 경우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들이 학살로 진압하였음. 각국은 비밀경찰과 언론 검열 등을 펼쳤고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정부 체제를 복귀시켰음. 빈 체제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럽 각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이 퍼져 있었음.
곧 유럽 각지에서 빈 체제에 대한 반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빈 체제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반발했고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내셔널리즘 열풍이 불었으며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가 폐위되었음. 또한 이 체제에서 중요 역할을 맡았어야 할 영국은 산업 혁명과 해외 식민지 진출에 골몰하느라 관심이 없었으며 러시아도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음.
또한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영국과 러시아는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빈 체제의 이념을 무시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했음. 게다가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유럽에는 다시 열병에 가까운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불기 시작.
샤를 10세의 뒤를 이은 것은 친(親) 혁명 성향의 루이 필리프 1세였으나 1848년에 프랑스 2월 혁명이 벌어져 프랑스에 공화정이 세워졌고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 혁명이 벌어져 메테르니히가 축출되면서 빈 체제는 막을 내렸음. 외교적으로 본다면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의 신성 동맹이 붕괴된 크림전쟁(1854년)이 결정타였음. 오스트리아가 정치 체제상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 확산 방지를 목표로 한 빈 체제로 인해 받는 수혜가 가장 큰 나라였기에 발칸 반도에서 이익을 지키겠다고 스스로 빈 체제를 무너트린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짓이었음. 그리고 기존의 유럽의 평화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하게 됨.
프랑스 루이 18세의 왕정 복고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북상하자 루이 18세는 다시 한 번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피신해야만 했음. 3월에서 6월까지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워털루 전투로 끝을 맺게 되자 그는 다시 파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이때부터 1824년까지 왕위를 유지하였음. 일단 왕위에 오른 그는 왕국의 질서유지와 안정에 온 힘을 쏟았고, 이때부터는 혁명의 정치적 유산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음.
그는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 극단적인 왕당파들의 정치적 움직임을 억제하였고, 대부분의 정책 결정들을 참사회와 의회에 일임하였음. 이러한 루이 18세의 온건보수적인 노선은 1789년 이후 정치적 격변을 겪어 온 프랑스에 외견상 안정을 가져다주는 듯했음. 하지만 그의 동생인 샤를 필리프(샤를 10세)가 주도하는 극단적인 왕당파는 구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에 대한 백색 테러를 감행하면서 정국을 공포 분위기로 몰어넣기 시작했음.
1819년 총선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게 되자 이들과 왕당파 사이의 갈등은 점점 더 과격해져 갔고, 결국 1820년에는 샤를 필리프의 둘째 아들인 베리공작 샤를-페르디낭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음. 이는 자유주의자들과 왕당파 사이의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음. 1820년 같은 부르봉 왕조가 다스리는 에스파냐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이끄는 민중봉기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고 입헌군주정이 들어서게 되었음.
1822년에 총선이 실시되자 프랑스 왕당파는 에스파냐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1823년 4월 7일 에스파냐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국왕 페르난도 7세의 왕정을 복구시키고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음.
1824년 봄, 몸이 비대하여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던 루이 18세는 통풍과 괴저가 악화되어 걷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 같은 해 여름에는 동맥경화까지 겹치게 되었고, 결국 9월 16일 끔찍한 몰골로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사망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의 동생 샤를 필리프가 샤를 10세로 왕위를 이어받았음.
루이 18세 Louis XVIII of France in Coronation Robes프랑수아 제라르
샤를 10세와 1830년 7월 혁명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함. 국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많았는데 67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음. 초기에는 루이 18세에 비해 뛰어난 언변과 좋은 풍채, 또 정치범들을 사면시켜 주는 등의 유화 정책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으나 오래가지 않아 강경 왕정주의자이자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줌. 실제로 그가 즉위한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왕당파가 무려 400석 이상, 자유주의자들은 겨우 17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음.
1825년 5월 절대왕정 시절 전통을 따라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강경 왕정주의자 조제프 드 빌렐 백작을 수상으로 임명하는 등 강력한 복고 정책을 시행. 1829년 새로 부임한 폴리냐크 내각은 지난 1827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패하고 좌파와 입헌군주파가 승리한 것에 부담을 느껴 의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다시 선거를 치르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좌파의 의석이 이전보다도 더 늘어나며 왕당파와 입헌파 의석을 줄여버리는 결과를 낳음.
1830년 3월, 샤를 10세는 이에 대응해 폴리냐크 내각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처벌하겠다는 연설을 함. 결국 의원들과 시민들의 불만은 결국 극에 다다르고, 의원들은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221명의 청원서"를 발표한다. 샤를 10세는 이에 "나의 결정은 완고하다"라며 실책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의원들과 시민들이 반발해,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남.
외젠 들라크루아 작품 :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부제='1830년 7월 28일') 루브르 박물관 소장
루이 필리프 1세와 1848년 2월 혁명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쫓겨나고 그 뒤에 왕이 된 사람이 프랑스 대혁명 때 혁명파로 이름을 날렸던 루이 필리프 1세로, 입헌 군주로 즉위했음. 근데 말이 입헌 군주였지 실상은 소수의 부유한 지주층이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사실상 독재 왕정에 가까웠음. 7월 왕정에 대한 불만은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새로 등장한 산업자본가와 노동자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불만이 심해졌고, 이는 2월 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됨.
몇 년 동안, 루이 필리프는 그의 선임자들이 보여주었던 거만하고 막대한 지출을 하는 것을 피하며 겸손하게 국가를 운영했음. 처음에는 그는 시민왕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음. 그의 인기는 그의 내각이 점점 왕정주의와 보수주의로 변모하자 추락하기 시작. 일반 시민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었고 봉급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음.
1846년부터 1848년 사이의 경제위기는 공화당 당원들이 왕에 대항하는 새로운 혁명 모임을 야기시켰음. 그리하여 산업 자본가·공화파의 소시민층·노동자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어, 1848년 2월 혁명 때 왕위를 잃고 영국으로 망명하였음. 2월 혁명은 단순히 프랑스의 7월 왕정이 무너지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유럽으로 번져 그 해 3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이 실각하여 빈 체제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음.
덩달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통일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독일에서는 같은 해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소집되어 통일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이탈리아에서는 카르보나리당 중심의 통일 운동이 시작되었음. 또 계급적 관점에서도 이 혁명은 상당히 중요한데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의 갈등 구도가 이 혁명을 통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 기존의 프랑스 혁명과 7월 혁명의 경우에는 부르주아들과 대중들이 동맹 관계에 가까웠음.
부르주아들이 자유주의, 계몽주의와 같은 이념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역할이었다면 대중들은 정부를 전복시키는 물리력을 제공했던 것. 하지만 18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부르주아들이 이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두 세력 간의 결별이 시작된 것. 실제로 1848년 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서 실질적으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부르주아들은 기득권화되어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하는 데 몰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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