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제국 건설(2)/이철형
자수성가 변호사의 와인 제국 건설기(1)
와인 제국 건설기 1편의 주인공의 부고 기사는 이런 타이틀로 시작된다.
‘애호가 와인 메이커, 와인 분야 거인이 되다! (From dilettante winemaker to a giant in the field)’
그리고 그에 대한 세인들의 한 줄 평은 ‘자수성가한 변호사 출신 와인 제국 건설자’이다.
그는 미국에서 대공황기(1929~1940년대까지)시작 즈음(1930년 2월)에 LA에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금주령(1919~1933, 마지막 해제한 주가 1960년)이 해제되기 시작하는 때(1933년)에 만3살이 된다.
교사인 아버지를 두었으나 공황기이다 보니 아버지가 실직하자 5살에 신문팔이를 하기 시작해서 아동기와 청소년기에는 동네 슈퍼마켓 구석에서 닭과 달걀을 파는 장사를 하는 사업가(?)가 되고 여름철 방학 때는 콜로라도에 있는 할아버지 농장에서 옥수수 밭 농사일과 온갖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고 종마 사업을 하는 삼촌 집에서 말 키우는 일도 하며 당시 최고로 유명한 경주마 대회 참관 기회도 갖는다.
학기 중에는 캔디 제조원, 소다수 판매점 점원, 벌목군, 우체국 임시직원, 소노마 밸리에서 맥주 원료인 호프 수확원 등의 일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에이브라함 링컨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UC 버클리 대학 학부에서 인문학과 과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을 법대에 진학하여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 그 동안도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두 하역 노동자, 트럭 운전자, 버클리 경찰, 경호원, 앰뷸런스 운전자 등의 일들을 닥치는 대로 했고 1955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토지 개발과 재산권 전문 변호사업을 개업한다.
1950년대 후반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법무법인을 설립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변호사 협회 창립 멤버가 되고 1970년대에는 법률 활동뿐 아니라 IBM 컴퓨터를 기업에 리스해주는 회사(Decimus)의 창업 멤버 네 명중 한 명이 되기도 할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을 갖는 그였다.
법무법인을 운영하던 그는 변호사 일이 지겨웠는 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늘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것이 무의식 중에 몸에 배서 그런 지 44살이 되던 1974년에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이때 그가 어릴 때 일했던 할아버지의 농장이 생각나서 그는 그의 부인과 함께 나파 밸리 위쪽에 있는 레이크 카운티(Lake County)의 레이크포트(Lakeport)에 82 에이커(33ha=10만평)의 배와 호두 과수원을 사들인다.
처음에는 휴가 때 이용하는 주말 농장처럼 사용하다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좋은 품질의 포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이 배와 호두 과수원을 갈아엎고는 10대의 두 딸들과 함께 포도나무로 바꾸어 심어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원을 만들고 이 포도를 외부 와인 회사들에게 판매한다. 포도생산자를 겸업으로 하게 된 것이다.
5~6년 사이에 많은 포도재배자들이 생겨난데다가 1981년 포도가 풍작이 되면서 포도 공급 과잉현상이 생겨 원가도 못 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그는 차라리 자기가 와인을 만들겠다며 당시에 유명한 양조가 2명을 스카우트하여 1982년부터 와인을 양조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포도가 아무리 노력해도 발효가 제대로 완료되지 않고 기존의 다른 샤르도네 와인들과는 달리 단맛이 좀 더 나는 화이트 와인이 생산되고 만다.
양조가 2명은 양조 실패(?)로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이런 스타일의 와인이 소비자의 기호에 더 맞을 것이라는 역발상을 하고는 시장에 출시한다.
그리고는 그 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맏딸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인 뉴욕으로 날아가 유명한 레스토랑과 와인 소매점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한 잔씩 시음을 시키고 나서 무명의 자신의 와인을 병당 5달러인데 몇 박스를 살거냐고 물어보며 판매를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하여 첫날 100케이스를 판매하는 성과를 얻는다. 당시 미국 와인 시장은 해외산 고가 명품시장과 자국산 저가 데일리 시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여기에 소매가 15~20달러짜리 프리미엄 시장이라는 신규 틈새 시장을 만들며 블루 오션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자국 생산 무명의 와인으로.
이 와인은 출시 다음 년도인 1983년에 전미 와인 경진대회에서 미국와인 최초로 플래티넘 상을 거머쥔다.
그가 이 와인을 만들 때 목표는 명품 부르고뉴 와인의 맛과 향을 가진 그러면서도 가격대는 소비자들이 구매할만한 합리적인 가격대의 샤르도네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양조 실패(?)로 그것과 아주 유사하게, 근사한 오크향이 나면서 과일향과 아로마는 오히려 부르고뉴 와인보다 더 풍부하고 단맛은 약간 좀더 있는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이, ‘말로는 드라이한 와인을 찾지만 실제로는 단맛이 있는 와인을 찾는다’는 진부한 와인업계의 말을 입증이나 하듯 소비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즉 이것은 당시 미국 와인 시장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하는 초입이어서 ‘명품 부르고뉴 스타일의 와인이면서 가격은 착한 와인’을 찾던 소비자들의 소소한 허영심(?)을 충족시켜주었기에 당시의 소비 패턴과 시기적으로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당시에 프랑스에서도, 신맛을 더 내기 위해 완숙하기 전에 미리 수확하여 와인을 만들던 전통 양조 스타일을 지양하고 완숙한 포도로 과일향과 꽃향이 풍부한 와인을 만드는 양조 스타일이 권장되던 시기였는데 지구 반대편의 그는 그 사실을 몰랐음에도 실패(?)한 양조 덕분에 본의 아니게 그런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 셈이니 운도 따른 셈이다.
여기에 당시 레이건 대통령(1911~2004 : 대통령재임기간 1981~1989)의 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도 이 와인의 열렬한 팬이 되는 운까지 따랐다.
이 와인을 양조하면서 그는 본업인 변호사업을 멀리하면서 점점 와인사업에 빠져들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부인은 이혼을 선언한다.
잘나가는 변호사업을 그만두고 포도 농사와 양조라는 막노동도 불사해야 하는 일에 미친 듯이 열정을 불태우며 빠져드는 남편이 싫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녀가 와인사업이 그에게는 (변호사 일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치 정부(情婦)와 같았다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을까? 그는 이혼을 하면서 전부인이 소유한 와이너리 소유권을 전부 사들인다.
그리고는 1984년부터 동업 관계에 있던 여성 변호사와 1986년 재혼을 하고 1987년부터는 아예 와인업에 올인한다.
재혼한 부인은 1992년까지 변호사업을 계속하면서도 남편의 와인 사업을 음으로 양으로 돕다가 그녀도 1995년부터는 변호사업을 접고 와인사업에 올인하게 된다.
그녀는 1980년 경쟁사의 보조 변호사로 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는데 1984년부터 법무법인에서 동업을 할 때만 해도 그가 와인사업을 취미로 한다고 생각했지 거기에 올인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드디어 2000년에 포브스지에 미국 부자 서열 218위로 등재되면서 와인이 아니라 부자로서 더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 때까지 그는 변호사 경력으로 캘리포니아 변호사 협회 창립 멤버이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와인 사교계에도 잘 나타나지 않아 와인업계는 물론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주목을 끌었다.
2000년에 그의 나이가 70이 되면서 그는 와인업도 실증이 났는지 은퇴를 꿈꾸었으나 벌려 놓은 와인 사업이 너무 방대해져서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올인하면 미친 듯이 모든 것에 전력투구하며 진두지휘하여, 스스로는 물론 조직원들까지도 숨막히게 할 정도로 너무 소소한 것까지도 신경쓰는 그가 걱정이 되어 취미생활로 여행을 하든 뭐든 다른 일을 해보라고 권하는 부인의 조언을 듣고 그는 어릴 적 경험을 살려 경마와 종마 사업을 하기로 한다.
총 2억 달러 가량이 투자되었다고 추정되는 이 사업에서 그는 초기 3년은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만(이것도 결국은 변호사답게 원금을 회수했다.) 결국은 지금까지도 미국 경마사상 최대 상금 수령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이 분야에서도 대성공을 이룬다. 그리고 그는 2011년 3년간의 암투병 생활 끝에 세상과 이별을 한다.
하지만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사업의 열정을 버리지 않고 포도원이 바라다보이는, 1995년부터 살던 저택에 살며 와인 사업에 조언을 하고 죽기 1주일 전에 조차 새로운 말을 구매할 정도로 평소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의 사망 당시 자녀들은 전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56세 제니, 54세 로라와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25세 케이티, 23세 줄리아, 22세 크리스 등 5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 경영 사업이 680여년간 이어진 이탈리아의 안티노리 가문처럼 후대에도 이어지기를 바랐기에 재혼한 부인을 포함한 6명 및 사위들이 공동 소유주가 되는 와인 회사를 2명의 신탁인에게 회사 자산 관리를 맡긴다.
가족 중 한두 명의 욕심으로 인해 회사가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각자에게도 적절한 회사의 지분을 배분하고, 각자에게 독립적이지만 마케팅은 공동으로 하는 와이너리와 농장들을 상속해주어 향후 있을 분쟁과 갈등의 소지를 없앴다. 그의 와인 제국이 지속되고 확장될 터전까지 닦아 놓았던 것이다.
과연 이 와인 제국 개국의 초대 황제는 누구일까?
창업주 제스 잭슨.
그리고 이 와인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스 스톤스트리트 잭슨 주니어(Jess Stonestreet Jackson Jr.(1930~2011)다. 그는 오늘날 ‘미국 프리미엄 와인의 대부’로 불리운다.
이 와인 제국은 켄달잭슨(Kendall Jackson)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이 브랜드를 포함하여 35개의 브랜드와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칠레,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5개국에 걸쳐 와이너리를 가진 잭슨패밀리와인즈(Jackson Family Wines)가되었다.
이 와인 제국 건설의 초석이 된 와인은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브 샤르도네이고 두번째로 주춧돌이 된 와인은 카멜로드 샤르도네와 카멜로드 피노누아이다.
이 두 브랜드는 2011년 잭슨 사망 당시 이 회사의 연간 5백만 케이스 총 생산량 중 약 4백만 케이스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회사 와인의 중심축이자 효자 브랜드다.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브는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의 와인 리스트의 필수 아이템이었고 레이디 가가가 대기실에서 반드시 한 잔하고 공연 무대에 오른다는 와인이 되었다.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스 샤르도네 (Kendall Jackson Vintner's Reserve Chardonnay)
지금까지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스테디 베스트 셀러 와인라는 전설의 와인이 되었다.
이 가문의 첫 딸과 이 회사의 부회장이기도 한 사위(Don Hartford)가 소유한 하트포드 와이너리가 생산한 부띠끄 와인인 하트포드 파 코스트 피노 누아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방미시에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찬주이기도 하다.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첫부인은 제인 켄달(Jane Kendall)이고 그래서 켄달 잭슨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재혼한 부인은 바바라 방케(Barbara Banke)이고 그녀는 현재 이 회사의 회장이자 제국의 계승자로 2대 황제인 셈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 회사의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되었고 앞으로 가훈이 될 기본 정신과 제국 건설 못지 않게 중요한 2대 황제의 업적과 경영 스타일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와인 제국 건설(3)
2대 여제의 와인 제국 계승 발전기
켄달잭슨 센터 와인 가든.
지난 칼럼 1편이 제국 건설기(建設記)라면 이번 칼럼은 미국 소노마에서 시작하여 5대륙으로 뻗어나간 와인 제국의 확장기(擴張記)에 해당된다.
2017년 11월호 와인 스펙테이터의 표지 모델로 나온 이 제국 확장기 주인공에 관한 타이틀은 ‘잭슨 패밀리 와인즈에서 제국을 확장시키고 있는 000(이름)’이다.
그 서브 타이틀은 ‘유산 위에 축성(築城) (Building on a Legacy)’.
세계적인 와인 전문 잡지가 승계 후 6년을 지켜보고 한 인터뷰 기사의 표제이니 와인업계가 그녀를 여제로 인정한 셈이다.
그녀는 우주공학자인 영국 웨일즈 지방 출신의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196,70년대에 LA 남부의 산 페드로 반도 지역에서 4남매 중 장녀로 자랐다.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그녀는 아버지가 집에서도 2인승의 작은 우주캡슐부터 대형 우주선까지의 열 방어막 장치 실험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성장한다.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음에도 아이들에게 대부분의 집안 일을 시키는 스타일이라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요리와 집안 청소 등을 하면서 자란다.
하지만 그녀는 설거지 보다는 요리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시칠리아 출신이니 당연히 어릴 때부터 와인에 친숙한 환경에서 자란다.
그런데 아버지가 우주공학자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소련이 스푸트닉 1호를 쏘아 올리면서 시작된 냉전시대의 우주 개발 경쟁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주 개발 계획 초창기라서 미국 정부의 투자 지원 계획이 갈팡질팡하면서 아버지의 수입이 들쭉날쭉하여 2~3번 실직자가 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그녀의 부모는 수입의 안정성을 도모하고자 작은 아파트 몇 채가 있는 빌딩을 구매한다.
그리고는 이 건물의 페인트칠 같은 유지 보수 작업까지도 주말마다 자녀들로 하여금 돕게 하는데 이때 그녀는 부동산 투자가 수입에 안정성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할아버지의 농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땅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 와인 제국의 창업주인 그녀의 남편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의 토지에 대한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둘은 토지와 건물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어릴 때부터 갖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의 장래희망이 교사나 간호사이던 당시에 그녀는 13살 때 이미 변호사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 이유는 추리소설을 좋아했고 즐겨보던 TV 추리 드라마 주인공의 직업이 변호사였기 때문이란다.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논쟁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적성에도 맞았다. 그래서 그녀는 1975년 UCLA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1978년에 법대를 졸업하고 거기서 토지 개발 전문 변호사로 개업을 한다.
당시만 해도 캘리포니아 법원이 토지 개발자들에 대해 반감이 증가하던 시기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토지 개발과 이용에 관한 소송에서 공격적으로 대응하여 유능한 소송변호사가 되어 명성까지 쌓게 된다.
그녀가 동종 분야 전문 변호사인 장래의 남편을 만난 것은 1980년 그녀가 보조 변호사로 남편과는 경쟁 관계에 있는 토지개발 전문 법무법인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랬던 그녀가 1984년에 와인사업과 변호사업을 겸업(?)하고 있던 창업주가 설립하는 법무 법인에 동업자로 참여하게 되는데 이 창업주가 전부인과 이혼한 후인 1986년에는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때는 변호사인 창업주가 전부인과 배와 호두 농장을 주말 농장 삼아 샀다가 포도나무로 바꾸어 심고 이 포도를 와인 양조장에 납품하다가, 과잉생산으로 포도 가격이 급락하자 아예 자신이 직접 와인을 만들어 첫 출시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그녀는 남편이 와인 사업을 그저 취미로 한다고 생각했지 거기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 황당한 것은 전부인과의 이혼 사유가 그가 와인사업에 점점 몰입하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 남편이 자기와 결혼한 이듬해인 1987년에는 변호사업을 접고 아예 와인사업에 올인하고 만다.
그런데 그녀는 전부인과 달리 그냥 이것을 용인하는 것은 물론 1992년까지 자신은 변호사업에 종사하면서 남편이 와인 사업에 올인하면서 와이너리를 구매할 때마다 자금조달부터 구매까지의 법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내조를 한다. 그리고는 1995년도에 소노마 와이너리에 저택을 짓고 온가족이 정착하면서 그녀 역시 와인사업에 남편과 함께 올인하게 된다.
변호사 시절에도 그랬지만 그녀는 변호사업을 접고 나서도 늘 남편 뒤에서 동업자로서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조용히 내조를 한다. 남편이 2009년 피부암 선고를 받고 3년 후인 2011년에 사망하자 그녀는 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한다. 그것도 남편과 전부인 사이에 낳은, 자기보다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 차이도 그다지 많이 나지 않는 두 딸과 그들의 남편이 함께 상속받은 회사의 회장으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바로 지난 칼럼의 주인공이었던 자수성가한 변호사출신으로 잭슨 패밀리 와인즈라는 와인 제국의 터전을 닦은 초대 황제 제스 잭슨이 3여년의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면서 이를 승계받은 당시 58세이던 바바라 방케 (Barbara Banke) 여사다.
바바라 방케.
여제가 탄생한 것인데 왜 하필 후계자가 그녀였을까?
당시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10대 때인 1970년대 중반부터 포도원 조성에 참여하고 1982년 켄달 잭슨 빈트너스 리저브 샤르도네 첫 출시부터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 많은, 전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두 딸들과 법대 졸업 후 첫 딸과 결혼하면서 변호사직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와인업에 종사한 맏사위 같은 창업 공신도 있었는데...
아무리 창업주가 나름 가족 경영 기업이 되도록 안전 장치를 미리 마련해두었다고 해도 대개 드라마는 이럴 경우 후계자 경쟁으로 암투가 벌어지면서 권력 다툼과 재산 싸움이라는 막장으로 치닫도록 되어 있는데.
현실에서는 다른 기업들의 예나 역사적으로 제국들의 승계 작업을 보면 오히려 승계 작업이란 것이 드라마보다 더 순탄치 않다.
그녀는 전부인과 남편의 공동 이름으로 1982년 탄생한 켄달 잭슨 브랜드가 막 미국 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1986년 결혼 후 남편이 사망한 2011년까지 줄곧 무대 뒤에서 25년간을 내조를 통해 실질적으로 제국의 기반을 닦고 제국이 본격 성장하는데 기여를 했기에 전부인의 두 딸이나 사위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창업 공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제국 태동기 직후 본격적인 성장기에 돌입할 때 그 성장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그녀였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이 낳은 아이들은 승계 당시 아직 20대 초,중반이어서 아예 승계 경쟁에는 낄래야 낄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 이외에도 그녀가 정신적으로나 실질적 업무에서나 그들 전체를 포용하는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통상 제국의 주인이 바뀌면 대내외적으로 리더십을 보여주어야만 제국이 안정화된다. 그래서 대개 후계자들은 일단 일정기간 과도기를 가지면서 수성(守城)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2인자로서 오랜 세월 준비를 했다고 해도 막상 1인자가 되면 또 다른 세계가 심적 부담감을 주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이 경우는 여성인데다가 그녀 역시 창업주인 제시 잭슨처럼 사교계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내성적이었으니 주변의 금융권, 경쟁자들, 와인 전문 언론사들은 당연히 현상 유지를 하면서 수성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제국의 매출액은 달리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매년 10%씩 신장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여제는 달랐다.
그녀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다른 경쟁사들이 포도원을 팔거나 양조 설비를 판매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승계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3년에 걸쳐 1억 달러 이상을 소노마, 나파, 멘도치노 카운티는 물론 호주(2012년)와 오레곤 주(2013, 2016, 201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2014년)에 와이너리와 땅을 사들이는 아주 공격적 투자를 감행한다. (괄호 안은 와이너리 투자 년도)
왼쪽부터 라 크레마 오레곤 윌러맷 밸리 피노누아 (La Crema Willamette Valley Pinoir Noir), 양가라 GSM (Yangarra GSM), 아방트 샤르도네 (Avant Chardonnay).
왼쪽부터 라 크레마 오레곤 윌러맷 밸리 피노누아 (La Crema Willamette Valley Pinoir Noir), 양가라 GSM (Yangarra GSM), 아방트 샤르도네 (Avant Chardonnay).
더구나 창업주인 제스 잭슨은 오레곤 와인의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하여 투자를 망설였었는데 반대로 그녀는 피노 누아 와인 생산을 위해 오레곤에 집중 투자하여 현재 오레곤에서 가장 큰 싱글 빈야드를 가진 회사가 되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오레곤에 투자한 그녀의 이유를 보면 그녀가 완벽하게 준비된 후계자였다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피노 누아 와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오레곤 주가 이에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 당시 오레곤의 와이너리 토지 가격이 에이커당 나파의 30만달러, 소노마의 12만5000달러에 비해 3만5000달러로 터무니 없을 정도로 쌌다는 것.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와이너리를 조성하려면 허가 받고 하는 데만 7년 가까이가 소요되는 반면 오레곤 주는 2달이면 해결된다는 것이 그녀가 투자한 이유다.
이 오레곤 주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인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아 명품 피노 누아 산지로 명성을 높여가고 있으니 그녀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또 호주의 경우에는 2012년에 207에이커(=약 25.3만평)에 달하는 맥라렌 밸리에 있는 와이너리(Hickinbotham Clarendon Vineyard)를 사들이는데 이 와이너리는 호주와인을 세계에 알린 그 유명한 펜폴즈 그랜지(Penfolds Grange)와 다른 고급 유명 와인들의 포도 공급원이었다.
그녀는 이 와이너리를 사서 직접 와인 생산은 물론 자신들이 이미 투자해 놓은, 근처의 양가라 와인의 원재료 공급처로도 활용한다.
켄달 잭슨 빈트너스 리저브의 성공사례에서 터득한 좋은 원재료 확보가 최우선이라는 교훈을 그녀는 해외 투자에서도 결행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경쟁사의 좋은 원료 공급원 차단의 방책이기도 한 셈이다.
그녀의 이런 전략은 그녀가 승계 받은 다음 해인 2012년 연매출 5억 달러, 2013년 6.4억 달러, 2016년 7.5억달러 라는 성과를 낳는다.
그리고 2014년 9월 포브스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병당 15달러 이상의 프리미엄 시장에서 미국 최대 규모의 회사로 등극하고 2015년도에는 소유자산이 29억 달러로 창업주 사망 전 해인 2010년 대비 약 10억 달러 가까이 증가한 것이 된다.
그럼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공격적 투자를 감행한 것일까?
그녀는 승계 당시 5~10년 내로 큰 이변이 없는 한 세계적으로 중산층 시장의 수요 증가와 미국 내의 X세대(1960년대 중반~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세대)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새대로 IT에 익숙한 세대다)에 의한 와인 수요증가로 와인 공급 부족 현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따라 캘리포니아 내에서도 포도를 경작할 만한 땅을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이고 와인 수요 역시 미국 와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와인에 대한 수요도 증가할 것인 바 이런 좋은 포도 경작지 부족 현상은 다른 와인 생산국에서도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신세대인 밀레니얼 세대를 위해서는 기존의 미국 최고의 스테디 베스트 셀러 와인인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브 샤르도네와는 다른 컨셉의 아방트(Avant) 샤르도네를 2011년 출시하고 이어서 2014년에 소비뇽 블랑과 레드 블렌딩을 출시한다.
이 세대들이 기성세대보다 오크향은 적고 좀 더 산미가 있고 과일향과 과일맛이 더 풍부한 와인을 선호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출시한 것인데 로버트 파커는 병당 가격이 15달러 정도인 이 와인에 대해 이 가격보다 2, 3배 더 지불하더라도 마셔야 할 와인의 풍미라고 극찬까지 했다.
게다가 이 와인은 아예 마케팅 전략도 이 세대에 맞추어 컬러풀하면서도 친환경적이라는 메시지를 주도록 라벨 디자인을 하고, IT에 익숙한 이 세대에 맞추어 블로거나 인플루엔서들을 이용한 소셜 미디어 홍보를 통해서, 와인 친화적인 주제의 파티나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을 하게 하여 광고 같지 않은 광고를 적극 시도했다.
신세대를 향한 새로운 풍미의 와인과 신세대에 접근하기 쉬운 마케팅 방법으로 도전장을 낸 셈인데 현재까지는 순항을 하고 있다는 것이 와인 평론가들과 와인 전문 잡지들의 평가이다. 결국 그녀의 예측이 또 적중한 것이다.
그녀는 현재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남단에서 북단(소노마, 나파, 멘도치노, 몬트레이, 산타 바바라)까지를 넘어 오레곤 주까지 와이너리를 확장했고 해외에서는 프랑스, 이탈리아, 칠레, 남아프리카 공화국, 호주까지 진출하여 약 3만에이커 (약 36.7백만평)의 와이너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포츈지(Fortune)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The World’s Most Powerful Women)’ 중의 한 명이 되면서 ‘포도나무의 여왕(Queen of the Vine)'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2011년 당시 35개 브랜드에서 2017년에 47개 브랜드로 성장시킨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미 완벽한 것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그 다음의 완벽한 와인을 추구하고 완벽한 포도원을 찾고 있다. 진짜 위대한 것을 만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움직이는 동인이다.”
올해 66세인 그녀는 아직도 새로운 제국 영토 확장을 꿈꾸고 있고 그런 그녀 덕분에 그녀의 제국을 좋아하는 와인 애호가들은 새로운 완벽한 와인을 기대할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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