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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by 자한형 2024.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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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The kiss / 구스타프 클림트/ 차일피일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The kiss, 1907-08)

구스타프 클림트, 아르누보, 빈 분리파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키스" (Der Kuss)1907-08년에 그려졌다.

그림은 가로 180센티미터, 세로 180센티미터의 크기이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벨베데레 미술관 (Galerie Belvedere)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 1)

(사진 1) 벨베데레 미술관 (Belvedere Gallery)

클림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새로운 예술 사조 아르누보와 연계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빈 분리파' (Wiener Secession) 운동을 주도했다.

아르누보(Art Nouveau)는 불어로 '새로운 미술' 을 뜻한다. 각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젊은 양식' (youth style)을 뜻하는 유겐트슈틸 (Jugendstil)이라고 하였다. 유겐트(Jugend) 잡지에서 유래하였다.

순수 예술과 응용 예술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무너뜨리며, 미적 다양성을 추구하였다. 인테리어 디자인, 그래픽 아트, 가구, 유리 예술, 직물, 도자기, 보석 및 금속 공예 등 예술 분야 전반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첫 아르누보 실내 장식은 벨기에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의 타셀 저택(Hôtel Tassel)을 흔히 예로 든다. (사진 2)

(사진 2)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의 타셀 저택(Hôtel Tassel)의 실내 장식(1893)

프랑스에서는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 1867-1942)가 파리 지하철(Metro) 입구를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었다. (사진 3)

(사진 3)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의 파리 지하철(Metro) 입구(1900)

그래픽 아트에서는 체코 화가이며 장식 예술가인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의 그림, 포스터, 광고, 삽화 등이 큰 호평을 받았다. (사진 4)

(사진 4)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의 샹프누아(Champenois) 출판사 포스터 (1898)

유럽 각국의 아르누보의 영향 하에, 1897년 클림트는 혁신적인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예술인 협회를 탈퇴하였다. 전통적 예술 양식을 강요하는 기성 예술인들에 반발하여 '빈 분리파' 를 결성하였다.

'빈 분리파' 는 전통적이고 고식적인 오스트리아의 예술적 관행을 타파하고, 그림, 조각, 건축, 공예 등 폭넓은 분야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양식을 추구하였다.

1898년 요제프 올브리히가 설계한 '빈 분리파 회관' (Secession Building)은 이들 정신을 잘 상징한다.

회관 정문의 상단에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 5)

(사진 5) 빈 분리파 회관 (Secessionsgebäude)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1862년 빈 근교에서 34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이민자로 금세공사였으나, 가정 형편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클림트는 14살에 빈의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하여 7년간을 다녔다. 초기 그의 그림은 보수적 화풍을 따르고 있었다.

이듬해 동생 에른스트도 같은 학교에 입학하였다. 클림트 형제와 동창 프란츠 마치는 나중에 '예술가 회사' 공방을 설립하고, 당시 유명한 건축회사로부터 일감을 받아 일했는데,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1879년에는 빈 미술사 박물관의 벽화를 그리는 작업에 참여했다. 1886년에는 신축한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 극장의 장식화를 그리는 일을 수주하였다.

1888년에 클림트는 폐쇄되는 옛 부르크테아터 극장의 내부 홀 전경을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림 1)

(그림 1) "빈 부르크테아터 극장의 관람석" (Zuschauerraum im Alten Burgtheater in Wien, 1888)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국왕으로부터 '황금 십자가 공로상' 을 받았고, 클림트에게 큰 영예를 가져다주었다.

당시의 클림트는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찬사를 받던 그의 그림 스타일이 근본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클림트가 30살 때인 1892년 그의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가 죽었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동생 에른스트가 죽은 후 상업적 이해를 추구하는 동료 프란츠 마치와 더 이상 함께 일할 수가 없어 헤어졌다. 당분간 공식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이 추구하려는 그림에 대해 숙고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빈 대학 천장화와 교수들의 반발

클림트는 1894년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빈 대학 대강당의 천장화를 의뢰받았다.

1907년에 완성된 '철학', '의학', '법학' 의 세 그림은 최종 완성될 때까지 숱한 논란을 야기하였다.

보수적 교수들과 언론에서는 그림의 선정성과 불명확한 메시지를 강력히 비난하였다. 이 논란은 국회로까지 비화되었고, 이를 계기로 클림트가 바라던 교수직 임명은 거부되었다.

클림트에게 그림을 의뢰한 빈 대학 측은 계몽주의의 전통을 따라,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상징하는 그림을 원했다.

하지만 클림트의 그림에는 빛이 어둠을 정복하는 광경이나 상징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선정적인 누드와 기이한 형태의 사람들과 해골들이 그려져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철학' (Philosophy)은 세 그림 중 첫 번째 그림이다. (그림 2) 1900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공개되었다.

(그림 2) "철학" (Philosophy, 1907)

대학 측은 철학도 과학을 진리의 모델로 하며, 사회 발전에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해 줄 것을 클림트에 기대했었다.

하지만 클림트의 그림은 모호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과학으로서 분명하고 신뢰받아야 할 학문을 몽상적이며 기괴한 형태로 표현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교수들은 반발하였다.

빈 대학교수 87명이 그림에 반대하는 청원에 서명하고, 그림을 거부하도록 문화부에 요청하였다.

교수들이 비난한 '철학' 그림은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클림트는 이 그림에 대하여,

"왼쪽은 생명의 시작, 성장, 사멸의 과정을 보여주는 군상이며,

오른쪽에는 신비의 우주,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지식의 빛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두 번째 그림은 '의학' (Medicine)이다. (그림 3) 1901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그림 3) "의학" (Medicine, 1907)

'의학' 에서도 클림트는 주제를 생소하고 충격적인 환상적 이미지로 나타내었다.

반쯤 꿈꾸는 듯한 인간들이, 무력하게, 수동적으로 운명에 체념하는 군상으로 뒤엉켜 있다.

해골 모습을 한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의 가운데에서 서로 뒤엉켜 있는 몸뚱이들을 검은 베일로 휘감고 있다.

전면에 꿋꿋하게 서 있는 여성은 히게이아(Hygeia)이다. 그리스 신화의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며, 건강과 위생을 관장한다.

그림의 오른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강을 상징한다. 왼쪽에는 한 여자의 누드가 허공에 떠있다. 생명을 상징하는 갓난아기가 그녀의 발치에 놓여 있다.

히게이아는 그녀 팔에 감긴 뱀에게 망각의 강 레테(Lethe)의 강물을 마시게 하고 있다. 망각의 강은 죽은 사람이 건너는 저승의 강으로, 강물을 마시면 이승의 모든 것을 다 잊게 된다.

히게이아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이 그림에도 대학 측이 바라는 의술이나 의학의 진보를 찬미하는 메시지를 찾기 어렵다.

이 그림은 '법학' 보다 더 격렬한 반발을 야기하였다. 왼쪽에 골반을 앞으로 내민 자세로 허공에 떠 있는 여성 누드와 오른쪽 위에 있는 임산부의 모습 때문이다.

세 번째 그림은 '법학' (Jurisprudence)이다. 1901년 그리기 시작한 이 그림에서도 몽환적 이미지의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그림 4)

(그림 4) "법학" (Jurisprudence, 1907)

전면에 문어처럼 보이는 괴물의 발에 묶여, 절망에 빠진 듯한 늙은 남자가 보인다. 법망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을 상징한다.

저 멀리 뒤편에는 법학의 이상을 상징하는 '진리, 정의, 법률' 의 세 자매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에 빠진 희생자를 구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고귀한 낙원에 안주하며, 고통받고 공포를 겪는 희생자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은 허울만 갖춘 법률을 상징한다.

절망하고 있는 남자 가까이 있는 것은 세 명의 복수의 여신(Furies)이다. 이들이 실제의 '법 집행관' 을 상징하며, 그들의 주된 관심은 '형벌' 에만 있다.

빈 대학의 천장화를 둘러싼 논란은, 클림트가 간절히 바라던 교수직 임명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였다.

1904년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개최되는 만국박람회에 '법학' 을 출품하려고 했지만, 정부 허가가 나지 않았다.

논란을 야기한 클림트의 다른 그림 '금붕어' (Goldfish, 1902)'희망 1' (Hope 1, 1903)의 전시도 거부되었다. (그림 5, 그림 6)

(그림 5) "금붕어" (Goldfish, 1902)

(그림 6) "희망 1" (Hope I, 1903)

이에 클림트는 빈 대학에 천장화를 그리기로 한 정부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을 반환하였다. "이제 검열은 지긋지긋하다... 모든 국가의 지원을 거부하며, 일체 원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말했다.

3점의 그림은 모두 후원자에게 팔렸다. 이 그림들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 독일에 의해 압수되었고, 1945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군이 철수할 때 불태워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누다 베리타스 (Nuda Veritas)

빈 대학 천장화의 논란의 와중에서 클림트는 변했다. 전통만을 고수하는 고식적 빈 학계와 예술계 주류와 결별하고, 그림에 대해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젊은 세대의 혁신을 옹호했다.

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8981월에 분리파의 잡지 "베르 사크룸" (라틴어 Ver Sacrum / Sacred Spring, 신성한 봄)을 발간하였다.

18983월에는 제1회 빈 분리파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 포스터는 클림트가 디자인하였다. (그림 7)

(그림 7) "1회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1898)

포스터 상단에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있다. 오른 편에는 아테나 여신이 지켜보고 있다.

빈 분리파가 주창하는, 예술을 전통과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상징한다.

빈 분리파가 추구하는 또 다른 목표는, 현대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클림트는 "베르 사크룸" 창간호에 이러한 정신을 담은 그림을 실었다. (그림 8)

(그림 8) "누다 베리타스" (Nuda Veritas)

누다 베리타스(Nuda Veritas)는 라틴어로 '벌거벗은 진실' (naked truth)을 뜻한다.

그림 속의 처녀는 거울을 들고 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인지는 알 수 없다. 아래 발 옆에 피어 있는 꽃은 새로운 출발과 재생을 상징한다.

그림 속의 글은, 독일 시인 레오폴트 셰퍼의 인용이다. 빈 분리파의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진실은 불이고, 진실을 말하는 건 불을 밝히고 태우는 것이다.'

(Wahrheit ist Feuer und Wahrheit reden heisst leuchten und brennen.)

라고 적혀 있다.

베토벤 프리즈

클림트는 1898년부터 1905년까지 8년간 23회의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빈 분리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1902년에 개최된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회는 베토벤을 주제로 하여 관심을 끌었고,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였다.

독일 상징주의 조각가로 명성이 높았던 막스 클링거(Max Klinger, 1857-1920)의 베토벤 조각상이 전시회에서 제막되었다.

클림트는 전시회장의 벽면 상단부분을 가로지르는 그림인 프리즈(frieze)를 그려 전시회를 빛나게 하였다.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 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이 "베토벤 프리즈" (Beethoven Frieze)는 전시가 끝나면 철거하는 일시적인 작품이었으나, 빈 분리파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70년 많은 경비를 들여 이를 복원하고, 1984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현재 빈 분리파 회관의 지하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 6)

(사진 6) 빈 분리파 회관의 베토벤 프리즈

베토벤 프리즈의 왼쪽 벽에 있는 첫 번째 패널은 "행복에의 갈망" 이다.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힘없는 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나, 기사는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림 9)

(그림 9) 베토벤 프리즈 - "행복에의 갈망" (Longing for happiness, 1902)

베토벤 프리즈의 중간 벽에 있는 두 번째 패널은 "적대적인 힘" 이다. 거대한 고릴라 티폰(Typhon)과 그의 세 딸 고르곤(Gorgon)이 보이고 있다.

세 딸은 정욕, 음탕, 무절제를 상징한다. 인류의 염원과 희망이 그들을 지나, 머리 위로 날아간다. (그림 10)

(그림 10) 베토벤 프리즈 - "적대적인 힘" (Hostile forces, 1902)

베토벤 프리즈의 왼쪽 벽에 있는 세 번째 패널은 "" (Die Poesie)이다. 시와 음악의 신 뮤즈를 상징한다. (그림 11)

(그림 11) 베토벤 프리즈 - (Die Poesie, 1902)

베토벤 프리즈의 왼쪽 벽에 있는 네 번째 마지막 패널은 "행복에의 갈망은 시에서 안식을 찾네" (The longing for happiness finds repose in poetry, 1902)이다.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가운데 배경에는 여자 합창단이 '환희의 송가' (Ode to Joy)를 부르고 있다. (그림 12)

(그림 12) 베토벤 프리즈 - "행복에의 갈망은 시에서 안식을 찾네" (The longing for happiness finds repose in poetry, 1902)

예술이 인류를 이상적 낙원으로 인도하며, 예술 속에서만이 우리는 진정한 기쁨, 진정한 행복,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베토벤은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시 "환희의 송가" (An die Freude)를 자신의 합창 교향곡 마지막 4악장에 도입하였다. 위 그림은 아래 시구에 해당한다.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이것은 온 세상을 위한 키스이니!'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클림트의 "황금 시기" 와 초상화

빈 대학의 천장화 논란 사건 이후 클림트는 더 이상 철학적이고 우화적인 그림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 이후 공식적인 정부 기관의 일은 맡지 않았으나, 빈의 상류 사회로부터의 그림 주문은 끊이지 않았다.

클림트의 말년 15년의 최대 업적은 여성의 초상화 분야이다.

여성들의 대부분은 실물 크기에, 심미적, 관능적으로 그려지고, 장식적 요소로 배경을 구성하여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였다. (그림 13, 그림 14, 그림 15)

(그림 13)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Portrait of Fritza Riedler, 1906)

(그림 14)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2"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I, 1912)

(그림 15)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Portrait of Emilie Flöge, 1902)

클림트의 '황금 시기' (Golden Phase)는 금박과 금빛 장식을 두드러지게 사용하는 시기를 말한다. 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이 확고하고 경제적 여유를 누리고 있을 때와 일치한다.

클림트는 '황금 시기' 이전 그림인 "팔라스 아테나" (Pallas Athena, 1898)"유디트 1" (Judith 1, 1901)에서도 금을 사용하였다. (그림 16, 그림 17)

(그림 16) "팔라스 아테나" (Pallas Athena, 1898)

(그림 17) "유디트 1" (Judith 1, 1901)

하지만 클림트의 본격적인 '황금 시기' 1907년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비잔틴 예술의 모자이크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후의 그림을 말한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1, 1907)"키스" (The kiss, 1907-08​​)를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들 수 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 2006년에 13,500만 달러(현 시가로 2,000억원 이상)에 팔려 당시 미술품 최고 거래 가격을 경신하였다. (그림 18)

(그림 18)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 1"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클림트는 많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자신의 자화상은 그리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예술가로서 클림트를 알고 싶다면 내 작품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라'

라고 클림트는 말한 적이 있다.

키스

"키스" (Der Kuss)는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의 하나이며 빈 분리파의 걸작이다. 유화에 금박, , 백금을 가미하여 그렸다. (그림 19)

(그림 19) "키스" (The kiss, 1907-08)

클림트의 '황금 시기' 1907-08년에 그려지고, 1908년에 '연인들' (Liebespaar)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키스는 클림트의 황금빛 스타일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그림이다. 사실주의보다는 상징주의적 색채를 강조함으로써 감성적, 관능적 효과를 높였다.

황금색 벽을 배경으로 서로를 포옹하며 키스하는 두 연인을 그렸다.

남자는 기하학적 무늬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포도 넝쿨 화관을 쓰고 있다. 여자는 다양한 색의 둥근 꽃무늬 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꽃을 꽂고 있다.

남자 옷의 네모 무늬와 여자 옷의 둥근 무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자는 여자 얼굴을 감싸며 키스하려고 다가가고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팔로 남자 목을 감싸고, 눈을 가만히 감고 있다. 평온하면서도 두 사람이 긴밀하게 하나가 되며, 여자는 황홀감에 빠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몽환적 분위기 속에 관능적, 감성적으로 두 연인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편 미학적으로 눈여겨볼 것들이 있다. 정교한 장식 무늬, 황금색 주조 속의 현란한 색, 섬세한 필치 등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첫째, 아르누보 양식의 다양한 무늬들을 볼 수 있다. 직사각형, 크고 작은 원, 동심원 등 여러 형태의 무늬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20 / 상세)

(그림 20 / 상세) 아르누보 양식의 정교한 무늬

둘째, 황금색이 주조를 이루지만, 세부적으로 화려하고 선명한 색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여자의 머리 꽃 장식과 풀밭의 꽃들에서, 보라, 하양, 파랑, 초록, 빨강, 주황 등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21 / 상세)

(그림 21 / 상세) 다양하고 화려한 색

셋째, 그림에서 압도적인 황금빛의 대담한 무늬 장식이 우선적으로 눈을 끈다. 하지만, 인물을 그리는 섬세한 필치의 아름다움도 놓칠 수 없다.

특히 여자의 얼굴 윤곽, 눈썹, , 부드러운 손의 곡선 등이 클림트의 그림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림 22 / 상세)

(그림 22 / 상세) 섬세한 필치의 인물 묘사

'키스' 는 빈 대학 천장화가 완성된 직후 그려졌고, 1908년에 일반에 전시되었다.

그림은 일반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전시할 당시 미완성이었음에도, 정부(벨베데레 미술관)에서 이를 구입하였다.

'키스' 에 대한 호의적 반응은 빈 대학 천장화 논란으로 적지 않은 마음의 고통을 겪은 클림트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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