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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by 자한형 202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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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 장 프랑수아 밀레/ 차일피일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1857)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75)는 프랑스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화가이다.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진솔하고 경건한 느낌이 들게 그린 그림들로 유명하다.

가난한 농부들을 그림의 중심인물로 '경건하고 고결하게' 부각시킨 그의 그림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격동하는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보수세력의 반발을 야기했다.

'사회주의 혁명 선동가' (Socialist revolutionary)로 비난받았지만, 밀레 자신은 예술의 인도주의적 측면을 중시했다.

'사람들이 날 사회주의자로 생각하지만, '예술의 인간적 면' (the human side of art)에 감명을 받을 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표제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 Le semeur, 1857)은 밀레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1857년 파리 살롱전에 이 그림을 출품했을 당시에는 사회 하류 계층인 농민을 부각시켜 미화하였다고 혹평을 받았다.

그림은 가로 112센티미터, 세로 84센티미터이다.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 1-2)

(사진 1)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사진 2) 오르세 미술관 내부

밀레 - 고단한 농민의 삶을 인간적 존엄성과 경건함으로 그려낸 화가

밀레는 1814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이었기 때문에 집안 농사일을 도왔으며, 모 심기, 씨 뿌리기, 건초 만들기 등의 농촌 일에 익숙하였다.

농부로서의 경험은 뒷날 그의 예술 작품의 주된 모티프가 되고 있다. 한편 어릴 때 가톨릭 사제로부터 라틴어와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배운 것이 그의 그림에 깊이 깔려 있는 종교적 경건함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183319살 때 밀레는 셰르부르(Cherbourg)에서 초상화가 봉 뒤무셸(Bon Dumouchel)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여, 1835년 뤼시앵 테오필 랑글루아(Lucien-Théophile Langlois)에게서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았다.

1837년에는 파리의 명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국립 미술학교에서 역사화가로 유명한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1839년에 밀레는 파리 살롱전(Salon)"성모 마리아를 가르치는 성녀 안나" (Saint Anne instructing the Virgin)를 처음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파리 살롱전에의 입선과 파리 생활

다음 해인 1840년에 출품한 그의 초상화 그림이 파리 살롱전에 입선하게 되자, 밀레는 셰르부르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활동하였다.

1841년 결혼하였으나, 2년 후에 부인과 사별하고 잠시 프랑스 북부 르아브르(Le Havre)에 머물다가 1846년 이후 파리에서 살았다.

이 무렵 그가 그린 초상화로는,

"루이즈 앙투아네트 푀아르당의 초상화" (Portrait of Louise-Antoinette Feuardent, 1841),

"발몽 백작부인" (The Comtesse of Valmont, 1841),

"루이 알렉상드르 마롤의 초상화" (Portrait of Louis-Alexandre Marolles, 1841)

등을 들 수 있다. (그림 1-3)

(그림 1) "루이즈 앙투아네트 푀아르당의 초상화" (1841)

(그림 2) "발몽 백작부인" (1841)

(그림 3) "루이 알렉상드르 마롤의 초상화" (1841)

한편 밀레는 사별한 첫 번째 부인 폴린 오노(Pauline Ono)의 초상화도 여러 점 남겼다.

"푸른 옷의 폴린 오노의 초상화" (Portrait of Pauline Ono in blue, 1842),

"오노 부인의 초상화" (Portrait of Madame Ono, 1844),

"평상복의 폴린 오노의 초상화" (Portrait of Pauline Ono in morning dress / Pauline Ono En Déshabillé, 1844)

등을 들 수 있다. (그림 4-6)

(그림 4) "푸른 옷의 폴린 오노의 초상화" (1842)

(그림 5) "오노 부인의 초상화" (1844)

(그림 6) "평상복의 폴린 오노의 초상화" (1844)

1843년 파리 살롱전에 재차 낙선하여 실의에 빠져 있던 밀레는 1847년에 그린,

"나무에서 아래로 내려지는 오이디푸스" (Oedipus taken down from the tree, 1847)

가 입선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림 7)

(그림 7) "나무에서 아래로 내려지는 오이디푸스" (1847)

그다음 해인 1848년에 살롱전에 전시된 밀레의 첫 번째 농민 그림인,

"키질하는 사람" (The winnower, 1948)

은 높은 평가를 받으며, 정부에서 그림을 구입하였다. (그림 8)

(그림 8) "키질하는 사람" (1948)

당시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제2공화국을 수립한 1848년 혁명의 주요 원인의 하나가 흉작과 농촌 생활의 피폐였다. 그런 점에서, 비평가들은 밀레의 이 그림을 정치적 시각에서 보기도 하였다.

"키질하는 사람" 은 세 버전이 있다. (그림 9-10)

(그림 9) "키질하는 사람" (1948)

(그림 10) "키질하는 사람" (1948)

밀레는 이 그림을 시작으로 1849년 프랑스 북중부의 퐁텐블로 숲 인근에 있는 바르비종(Barbizon)으로 옮겨가, 농민의 삶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밀레는 1848년 살롱전에 다른 한 점의 그림,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 (The Captivity of the Jews in Babylon, 1848)도 함께 전시하였다.

이 그림은 구약성경 시편(The Book of Psalms)을 근거로 전통 고전 양식에 의한 밀레의 야심찬 역사화이었으나, 비평가와 대중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 그림은 곧 자취를 감추었는데, 예술사가들은 밀레가 이 그림을 폐기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1984년 미국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은 소장하고 있는 밀레의 그림,

"젊은 양치기 소녀" (Young Shepherdess, 1873)를 엑스레이 검사하던 중, 그 그림이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 그림 위에 그려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림 11, 사진 3)

(그림 11) "젊은 양치기 소녀" (1873)

(사진 3) "젊은 양치기 소녀" 그림 바닥에 그려진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 의 엑스레이 영상

예술사가들은 밀레가 1870-71년 프랑스-프러시아(현재의 독일) 전쟁 당시 물자가 귀해, 그렸던 그림의 캔버스 천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르비종 (Barbizon)

1840년대 중반 파리에 머물 당시 밀레는 많은 화가들을 사귀었다. 나중에 바르비종 화파의 화가로 불리는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콩스탕 트루아용(Constant Troyon), 나르시스 디아즈(Narcisse Diaz),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등과 친하게 지냈다.

도미에의 인물 소묘 기법은 밀레의 농부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49년에 밀레는 혁명 후의 공화정 정부에서 위탁한 그림,

"건초 만드는 농부들의 휴식" (The rest of haymakers / Le repos des faneurs, 1949)

을 그렸다. (그림 12)

(그림 12) "건초 만드는 농부들의 휴식" (1949)또한 그 해 1849년 살롱전에,

"숲가에 앉아 있는 양치기 소녀" (Shepherdess sitting at the edge of the forest, 1849)

를 전시했다. (그림 13)

(그림 13) "숲가에 앉아 있는 양치기 소녀" (1849)

가로 24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작은 이 그림은 양치는 목동을 목가적인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그렸던 전통적 양식에서 벗어나, 평범한 한 소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 해 6, 밀레는 바르비종으로 가서 정착하였다. 함께 간 두 번째 부인 카트린 르메르(Catherine Lemaire)와는 이미 동거하고 있었지만, 결혼식은 1853년에 올렸다. 그녀와 아홉 자녀를 두며 죽기까지 바르비종에서 살았다.

1850년 살롱전에 밀레는 두 점의 그림을 전시하였다.

"건초 묶는 농부들" (The haymakers / Les bottleurs de foin, 1850),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 / le semeur, 1850)

의 두 그림을 말하며, 전형적인 농부의 삶을 담고 있다. (그림 14-15)

(그림 14) "건초 묶는 농부들" (1850)

(그림 15) "씨 뿌리는 사람" (1850)

"씨 뿌리는 사람" ,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 Le semeur, 1857),

"만종" (The angelus, 1857-59)

과 함께 밀레의 3대 걸작의 하나이며, 가장 먼저 그려졌다. (표제 그림, 그림 16)

(그림 16) "만종" (The angelus, 1857-59)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 은 열심히 일하는 농부를 화폭을 가득 채우는 역동적인 '영웅' 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이 때문에 찬사도 받았지만, 당시 보수 세력은 사회주의 선동의 저의가 있는 과격한 그림으로 비난하였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밀레의 농촌 풍경과 농부 그림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씨 뿌리는 사람" 의 많은 모작을 그 특유의 밝은 색깔로 그렸다. (그림 17-18)

(그림 17)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 1888)

(그림 18)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 1889)

1850년부터 1853년까지 밀레는 구약성경의 '룻기' (The Book of Ruth)에 나오는 룻(루스, Ruth)과 보아스(Boaz)의 이야기를 그리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성경에서 과부인 루스는 시어머니 나오미(Naomi)를 극진히 모시며 살다가, 자비로운 농장주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들 사이에 난 아들의 손자가 이스라엘 왕이 되는 다윗(David)이다.

처음 제목을 "루스와 보아스" (Ruth and Boaz)라고 하였으나, 1853년 살롱전에 출품할 때 제목을,

"휴식하고 있는 추수꾼들" (Harvesters resting / Moissonneurs au repos, 1850-53)

로 바꾸었다. (그림 19)

(그림 19) "휴식하고 있는 추수꾼들" (1850-53)

이야기는 성경에서 빌려 왔지만, 밀레가 그린 것은 당시 프랑스 농부들의 모습이다. 비록 가난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그리려 하였다.

이 그림으로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2등 상을 타는 영예를 얻었다.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하기 이전인 1830년대부터 시작하여 1870년대까지 퐁텐블로 숲 인근의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에 모여 주로 풍경화를 그린 화가들을 바르비종 화파의 화가로 지칭한다.

그들은 화실 내에서 상상과 매너리즘에 의해 웅장하고 아름답게 그린 고전주의 풍경화에 반발하였다. 야외에서 실제 보이는 풍경을 생동감 있게 그릴 것을 주장하고 실천하여, 당시 화단에 혁신을 가져왔다.

바르비종 화파의 야외(plein air) 사생 기법은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등에게 영향을 미쳐 인상주의를 낳았고, 유럽 각국과 미국의 풍경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밀레 - 가난한 농부와 농촌의 삶에 인간적 존엄성을 부여한 화가

풍경을 주로 그린 다른 바르비종 화가들과 달리, 밀레는 그림 속의 인물을 중시하였다.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와 농촌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1857)을 비롯하여,

"일하러 가는 농부" (Going to work, 1853),

"빵 굽는 여인" (Woman baking bread, 1854),

"감자 수확" (The potato harvest, 1855),

"실 잣는 여인" (Woman spinning, 1860)

"감자 심는 농부" (Potato planters, 1861)

등의 그림들은 농촌의 전형적인 일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20-24)

(그림 20) "일하러 가는 농부" (1853)

(그림 21) "빵 굽는 여인" (1854)

(그림 22) "감자 수확" (1855)

(그림 23) "실 잣는 여인" (1860)

(그림 24) "감자 심는 농부" (1861)

한편 "만종" (The angelus, 1857-59)을 비롯하여,

"들판에서 태어난 송아지를 농가로 운반하며" (Bringing home the calf born in the fields, 1860)

"양 떼를 돌보는 목자" (Shepherd tending his flock, 1860년대 초)

"소들을 집으로 부르며" (Calling home the cows, 1866)

등의 그림들은 농촌 삶의 사실적 묘사와 함께 종교적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그림 25-27)

(그림 25) "들판에서 태어난 송아지를 농가로 운반하며" (1860)

(그림 26) "양 떼를 돌보는 목자" (1860년대 초)

(그림 27) "소들을 집으로 부르며" (1866)

밀레의 걸작인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은 한결같이 농부의 가난한 삶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선동적이라고 보수세력과 중산층의 비판을 받았다.

밀레가 1862년에 살롱전에 전시한 그림,

"괭이를 가진 남자" (Man with a hoe, 1860-62)에 대한 보수층의 비난도 격렬하였다. (그림 28)

(그림 28) "괭이를 가진 남자" (1860-62)

한 지친 농부가 척박한 밭을 일구는 고된 일에 지쳐 괭이에 기대 서 있다. 메마른 땅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노동에 분노한 듯한 그의 모습은 정부와 사회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과격함으로 비치었다.

이 그림은 이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권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그림에 감명을 받고 시인 에드윈 마컴(Edwin Markham)은 같은 제목의 시 "괭이를 가진 남자" (The man with the hoe)를 썼다.

마컴의 시는 미국 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미국 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짧은 영시 (135-1) 에드윈 마컴 / 괭이를 가진 남자 The man with the hoe

괭이를 가진 남자 에드윈 마컴1 밀레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을 본 후 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blog.naver.com

밀레는 "괭이를 든 남자" 를 끝으로 흔히 그에 대해 말하는 '사회주의 선동적인'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1864년 살롱전에 전시한, "양치는 소녀와 양 떼들" (Shepherdess with her flock, 1864)

의 그림은 일반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림 29)

(그림 29) "양치는 소녀와 양 떼들" (1864)

양 떼를 뒤로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목가적 농촌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가난과 비참함에의 집착을 극복하고 우아함을 찾았다고 밀레에 대해 한 비평가는 말했다.

이 그림으로 밀레는 살롱전에서 1등 상을 받았으며, 1860년대 이후 화가로서의 명성은 높아져갔다. 1868년에는 프랑스의 최고의 영예인 레종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으며, 1870년에는 살롱전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밀레는 1868년 이후에는 계절적 변화를 담은 농촌 전원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달빛 아래 양 떼들" (The sheepfold, Moonlight, 1856-60),

"그레빌 해안" (The coast of Gréville),

"건초더미: 가을" (Haystacks: Autumn, 1874)

등의 그림은 자연과 농촌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30-32)

(그림 30) "달빛 아래 양 떼들" (1856-60)

(그림 31) "그레빌 해안"

(그림 32) "건초더미: 가을" (1874)

밀레가 그린 마지막 그림은,

"야간 새 사냥" (Hunting birds at night 또는 Bird's nesters, 1874)

이다. (그림 33)

(그림 33) "야간 새 사냥" (1874)

밀레의 다른 정적이고 절제된 그림과 달리, 이 그림은 걷잡을 수 없이 강렬한 역동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의 네 명은 밤중에 야생 비둘기 사냥을 하고 있다. 횃불로 비둘기의 눈을 부시게 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비둘기를 몽둥이로 때려잡고 있다.

화면 뒤쪽을 보는 한 명은 횃불을 밝히고 있고, 앞을 보고 있는 한 명은 등에 횃불을 밝힐 건초를 지고 있다.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두 명은 땅에 떨어진 비둘기를 줍고 있다.

이삭 줍는 여인들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 Des glaneuses, 1857)은 추수 후에 땅에 떨어져 남은 밀 이삭을 줍고 있는 세 명의 농촌 여인을 그리고 있다. (그림 34)

(그림 34)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밀레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구약성경에서 언급한 추수 후 떨어진 이삭을 가난한 사람이 주워 가져갈 수 있도록 그대로 두라고 하는 전통이 남아 있었다.

이삭 줍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루스(Ruth)가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삭을 줍는 그림은 수없이 그려졌다.

하지만 이전 그림들은 대개 풍요로운 농촌과 이삭을 줍게 하는 자비로운 지주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정경을 담고 있다.

밀레의 그림은 거친 옷을 입고 버려진 이삭을 줍기 위해 등이 굽어질 정도로 일해야 하는 프랑스 농촌 여인의 가난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히 차이가 있다.

1857년 살롱전에 이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프랑스 상류 사회와 중산층은 즉각적인 반감을 표명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최근 1848년 혁명의 기억이 생생한 이들은 사회 하층 계급인 농민을 미화하는 이 그림을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 그림에 해당하는 가로 112, 세로 84, 센티미터의 대형 화폭은 전통적으로 종교적, 신화적 주제의 인물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밀레는 하층민인 농민과 가난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그림에는 세 명의 가난한 농촌 여인이 전면에 두드러지게 그려졌다. 두 여인의 팔은 땅 쪽으로 뻗어 있고 구부러진 등은 고된 노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림 32)

(그림 35)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세 여인의 일은 잘 분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여인은 떨어진 이삭을 찾고 있고, 한 여인은 그 여인이 가리키는 이삭을 줍고 있으며, 서 있는 여인은 주운 이삭을 모아 묶고 있다.

세 여인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고 있어 익명성을 상징한다. 개인적 특성을 배제한 이 익명성은 그들의 가난이 단순히 세 여인의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 농민 전체의 가난을 상징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세 여인의 앞에 드리운 어두운 색조는 그림 뒤편의 풍요로운 수확을 상징하는 밝은 색조와 대조된다. (그림 36 / 상세)

(그림 36 / 상세) 그림 뒷면의 밝은 색조는 세 여인 전면의 어두운 색조와 대조된다.

오른편에 말을 타고 있는 농장 관리인은 지주 계급을 상징하며, 농부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은 일하지 않는 특권을 상징한다.

땅에 떨어진 이삭들은 어두운 땅 위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림 37 / 상세)

(그림 37 / 상세) 땅에 떨어진 이삭은 어두운 땅 위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으며, 이들 여인들이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할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그림은 세 농촌 여인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부여하고 있다.

허름한 옷차림에 이삭을 줍는 단순한 동작의 세 여인에게서, 농촌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굴하지 않으려는 강인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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