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죽음 The death of Marat / 자크 루이 다비드/ 차일피일 ・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The death of Marat, 1793)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는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이다.
"마라의 죽음" (The death of Marat)은 1793년에 그려졌다.
그림은 가로 128센티미터, 세로 162센티미터의 크기이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립 미술관(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 1-2)
(사진 1) 벨기에 왕립 미술관
(사진 2) 벨기에 왕립 미술관 내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마라의 공방에서 제작된 복사본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다비드는 회화에 있어 신고전주의의 대가이다. 신고전주의는 과도하게 화려한 장식의 바로크 양식에 반발하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 양식이다.
18세기 중반에 새로이 발굴된 폼페이 유적은 유럽에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의 이성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 1789년 프랑스 혁명도 신고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고고학자이며 미술사가인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68)은 그리스 로마 고대 미술의 역사를 연구하여 학문으로서의 기틀을 세움으로써, 신고전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빙켈만은 그리스 예술을 찬미하고, 예술은 "고귀한 단순함과 평온한 장엄함' (noble simplicity and calm grandeur)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는 다비드를 비롯하여,
프랑스 화가 앵그르(Jean-August-Dominique Ingres),
독일 화가 멩스(Anton Raphael Mengs)를 들 수 있다. (그림 1-2)
(그림 1)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La Grande Odalisk, 1814)
(그림 2)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의 "파리스의 심판" (Judgement of Paris, 1757)
정치적 격동기의 삶을 산 자크 루이 다비드
다비드는 1748년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죽은 후 부유한 삼촌들의 도움으로 파리 대학에서 좋은 미술 교육을 받았다.
또한 로코코 화가 프랑수아 부세(François Boucher)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 다비드는 그 후 왕립미술아카데미를 다녔으며, 거기서 '로마 상' (Prix de Rome)을 획득하여, 부상으로 이탈리아 유학 기회를 얻었다.
1775-80년 이탈리아에 체재하면서,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와 라파엘, 프랑스 화가 푸생 등의 그림을 공부하였으며, 새로이 발굴된 폼페이 유적을 방문하였다.
1784년 파리에 돌아온 그는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 (Belisarius begging for alms, 1781)를 그려,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림 3)
(그림 3)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 (1781)
벨리사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말년에 황제로부터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을 받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1784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그에게 프랑스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그림을 주문하였다. 이에 따라 그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Oath of the Horatii, 1784-85)는 신고전주의의 걸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에게 큰 명성을 가져왔다. (그림 4)
(그림 4)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85)
이 그림은 BC 7세기 경 로마와 알바 롱가(Alba Longa) 두 도시 간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두 도시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각기 세 명을 선발하여 서로 싸워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로마에서 호라티우스의 3형제가 뽑혔다. 출정하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칼을 받으며, 로마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서약하고 있다.
오른쪽 끝에 슬퍼하고 있는 여자는 여동생 카밀라(Camilla)이다. 그녀의 약혼자가 반대편의 전사로 뽑혔다. 따라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
나중에 살아남은 한 명의 오빠가, 카밀라가 적을 위해 울었다고, 그녀를 죽인다.
이 그림은 국왕의 요청으로 그려졌고, 가족이나 교회에 대한 충성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보 진영에서도 왕실이 아닌 혁명을 대변하는 그림으로 해석되어 많은 인기를 누렸다.
1787년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The death of Socrates, 1787)을 그렸다. 중앙이 소크라테스이며, 왼쪽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림 5)
(그림 5)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아래 그림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에 그려진 "아들의 시체를 받는 브루터스' (Brutus receiving the bodies of his sons, 1789)이다. (그림 6)
(그림 6) "아들의 시체를 받는 브루터스' (1789)
브루터스(Brutus)는 로마 공화정을 수립한 로마의 지도자이다. 그의 두 아들은 왕정을 복고하는 반란에 참석하여 포로가 되었고, 그는 두 아들의 처형을 직접 지시했다.
아들의 시체가 전달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어머니와 두 딸이 슬퍼하고 있다. 브루터스는 죽은 아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왕정에 반대하는 프랑스 혁명과 공화정을 옹호하는 상징이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결과 왕정이 무너졌다.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에 서명하였다. 공포정치를 편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인 그는 혁명정부 하에서 예술 정책을 총괄하였다.
1793년 혁명 지도자 마라(Jean-Paul Marat)가 암살당했을 때 그린 "마라의 죽음" (The death of Marat)은 또 하나의 그의 걸작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어 처형되자, 다비드도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린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The intervention of Sabine women, 1799)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 7)
(그림 7)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1799)
이 그림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Romulus)의 아내 헤르실리아(Hersilia)가 로물루스와 사비니의 지도자인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뛰어들어 싸움을 중지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녀의 아이들이 그 사이에 있고, 창을 든 로물루스는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갈등을 사랑으로 극복하고, 아이들을 보호하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고 서로 화해하기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감옥에 갇힌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자, 궁정화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을 모델로 하는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나폴레옹을 미화하여 그린 "알프스를 건너는 나폴레옹" (Napoleon crossing the Alps, 1805)이 유명하다. 나폴레옹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델로 앉아 달라는 다비드의 요청을 거부하였다.(그림 8)
(그림 8) "알프스를 건너는 나폴레옹" (1805)
다비드는 "황제 복장의 나폴레옹" (Napoleon in imperial costume, 1805)도 그렸다. 나폴레옹은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9)
(그림 9) "황제 복장의 나폴레옹" (1805)
1812년에 그린 "튈르리 궁전 서재에서의 나폴레옹 황제" (The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uileries, 1812)의 초상화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림 10)
(그림 10) "튈르리 궁전 서재에서의 나폴레옹 황제" (1812)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추방되자, 다비드도 벨기에로 망명하였다. 1825년 사망하였다.
마라의 죽음
장 폴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는 정치가, 언론인, 의사였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 노선의 자코뱅당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793년 7월 13일 혁명 노선을 달리하는 지롱드(Gironde)당의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에 의해 암살되었다.
코르데는 마라가 1792년 발생한 "9월 학살" (September Massacre)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그를 죽였다. 9월 학살은 왕당파와 외국군의 프랑스 침공을 우려하여, 감옥에 수감된 1,200명 이상을 처형한 것을 말한다.
그녀는 암살 후 도망치지 않고 잡혔으며, 곧 처형되었다.
코르데는 칼을 옷에 숨기고, 마라에게 처형될 반혁명분자 명단을 전달한다는 구실로 마라에게 접근하였다. 마라는 그녀에게 감사하고, 그들은 내주에 처형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코르데는 곧바로 칼을 뽑아 그를 죽였다.
마라는 당시 피부병을 앓고 있어, 욕조에서 임시 책상을 놓고 종종 일하였다.
다비드는 마라 암살의 참혹한 광경을 그리면서, 경찰 기록을 참고하였으며, 가급적 실제 일어난 상황에 충실하게 그리려고 하였다. (그림 11)
(그림 11) "마라의 죽음"
하지만 마라에게 순교자의 고귀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기 위해, 필수적이 아닌 상세는 생략하고 단순함을 추구하였다.
마라가 앓는 피부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상체는 잘 균형 잡힌 그리스 조각의 고전미를 연상시킨다.
또한 이 그림은 흔히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Pietà, 1498-99) 조각상에 비유되기도 한다. (사진 3)
(사진 3)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Pietà, 1498-99)
십자가에서 죽은 후, 성모 마리아의 품 안에 안겨 팔을 늘어뜨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마라의 팔이 욕조 밖으로 나와 있는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마라의 이름이 적힌 나무 책상은 마치 묘비명을 연상시키며, 검은 벽을 배경으로 마라의 몸 위로 밝게 비치는 빛은 순교자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이전 종교에 대해 적대적이나, 다비드의 그림은 마라의 죽음에 대해 '신성한'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려 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 그림은 마라를 프랑스 혁명의 순교자로 격상시켰으며, 다비드의 명성을 다시 한번 드높였다.
'회화, 미술사, 서양화가, 작품 등 한국화가 한국화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1) | 2024.12.16 |
---|---|
시녀들 (3) | 2024.11.29 |
이삭 줍는 여인들 (2) | 2024.11.29 |
키스 (7) | 2024.11.28 |
비너스의 탄생 (3) | 2024.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