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by jinphil
현실에 대한 객관적 비판력의 詩人
194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한 김광규 시인은 1975년에 문학과 지성사에 [유무] [영산] [시론]을 통해 등단했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반달곰에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등의 시집과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등이 있다. 녹원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詩 제목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멕시코 그룹 ‘Los Tres Diamantes’가 불러 세계적으로 히트한 멕시코 민요인 ‘Luna Llena(滿月 / 보름달)를 1969년에 우리나라 남성 사중창단인 블루벨즈가 번안하여 부른 노래 제목이다.
연 구분 없이 총 49행의 자유시 형식으로 구성된 이 詩는 시인의 초기 대표작이며, 첫 시집(1979년)인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 후 시선집(1988년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표제작이 되었다.
서사적 줄거리로 전개되는 이 시는 화자가 과거와 현재의 삶을 비교하며 4·19 혁명세대의 자의식과 자기성찰을 주제로 소시민적 중년의 안주하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야기했다. 특징은 평범한 일상어 사용과 구체적인 표현으로 하여 현실적 이해가 쉽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의 맥락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던 젊음의 열정(1~18행)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 세밑 ; 한 해가 끝날 무렵(설날을 앞둔 음력 12월 말 경)
* 대포 ; 별 안주 없이 막걸리를 큰 그릇에 따라 마시는 술
* 로우터리 ; 로터리(교통이 복잡한 네거리에 원형으로 만들어 놓은 교차로)
(4·19 혁명 관련 시대적 상황)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권이 12년간 장기 집권을 하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급기야는 1960년,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대적이고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간단한 정리는 다음과 같다.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①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사상자 많이 발생했음
② 무고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공산당으로 몰려 심한 고문까지 당함
1960년 4월 11일
①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됨
② 이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2차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남
③ 시위를 끝낸 여학생들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크게 다침
1960년 4월 19일
① 분노한 전국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혁명적인 투쟁을 함
② 이승만 독재정권은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 선포함
1960년 4월 25일~29일
① 25일, 각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 시민들이 모두 시위에 동참함
② 26일, 대대적인 시위군중은 무력에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함
③ 26일,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를 내놓음(하야)
④ 29일, 이승만 하와이 망명(도망갔음)
이렇듯 시국이 혼란스러울 때 청년기를 보낸 화자는 그 시절의 순수함과 열정에 대하여 회상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오후 다섯 시’에 만났다는 것을 명료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화자에게 있어 그 시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대학생이었던 사람은 사실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다. 화자는 ‘불도 없이~열띤 토론을 벌였던’ 4월 혁명 당시의 순수한 열정에 패기가 충천했던 젊은 날의 모습을 회상한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지명수배로 쫓기거나 암암리에 모여 시국을 토론하고 인쇄물을 만드는 등등,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냈다.
중년이 된 화자는 그 당시를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라고 회고한다. 어리석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 판단이자 자조적인 심상이다. 현재 시점인 7~8행에는 다음과 같은 중의적 의미가 함의돼 있다.
첫째 ; 이상적 가치를 좇는 신념이 변할 줄 몰랐다는 허탈감
둘째 ; 젊은 패기에 세상을 잘 몰랐다는 자조적인 심상
셋째 ; 젊음을 상실한 중년의 삶에 대한 자괴감
화자는 청춘일 때도 삶의 문젯거리들이 있었음을 회상한다. 사랑과 아르바이트, 병역 문제 등등, 현실적인 문제들에 봉착해 있었지만 그때의 고민은 ‘때 묻지 않은 고민’이었다고 토로한다. 이는 어떤 잇속이나 계산을 하지 않고 순수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 운동권 학생이었던 ‘우리’가 불렀다는 노래는 분노와 울분을 토해내는 의미이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자신들의 혁명 의지를 억압하거나 무관심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순수한 열정으로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를 목청껏 불렀다는 것은 ‘불’도 없는 ‘차가운 방’, ‘열띤 토론’을 했지만 ‘결론 없는 모임’ 등의 구절들과 함께 암울한 시대 상황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뜻한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어떠한 대가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열망하는 이상을 상징한다. 따라서 ‘우리’의 노래가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는 것은 이상에 대한 절망과 좌절을 뜻하며 젊은 날의 순수함과 열정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내재돼 있다.
현재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중년의 삶(19~36행)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이상적 가치를 꿈꾸며 순수한 열망을 갖고 있던 ‘우리’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18년 되던 해, 중년의 나이로 만났다.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된 것이다. 즉 이상을 좇으며 순수한 열정으로 혁명 의지를 불태우던 젊은 날의 모습은 사라지고 세속적인 일상을 사는 중년의 소시민이 된 것이다.
그 대신 ‘넥타이’를 매고 ‘회비’를 걷는다. 넥타이는 정장을 입을 때 목을 옥죄어 매는 것으로 현재의 삶에 속박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가장으로서 중년의 삶에 속박돼 있음과 현재에 순응하여 안주하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누가 돈을 낼 것인지 따지지 않고 ‘대포’를 마시던 젊은 날과는 달리 공평하게 만원씩의 회비를 걷는다.
‘우리’의 관심사도 달라졌다. 소시민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이재(理財)에 밝아져 서로의 월급과 물가에 관심이 크다. 세상과 사회에 참여적이지 않다. 도덕적 열정이 없어 적당히 무관심하게 남의 세상을 이야기하듯 ‘즐겁게’ 개탄하고, 그저 그런 가십거리를 나누는 중년으로 변해 있었다.
젊은 날의 패기와 순수한 열정은 찾아볼 수 없다(우리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다들 젊은 날의 이상과 꿈을 상실한 채 일상에 속박되어 중년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중년의 삶과 소시민의 일상은 젊은 날과 현저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화자는 일행과 헤어져 ‘동숭동’ 거리를 걸었다. 혜화동부터 동숭동 길은 지성과 문화예술의 거리이자 청춘을 상징하는 거리였다. 지금은 소비와 오락의 거리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문인들과 연극인들이 넘치는 예술적 공간이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이 줄지어 있는 그 거리를 화자는 걸었던 것이다.
무비판적인 소시민의 삶에 대한 성찰(37~48행)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적 화자는 젊은 날(옛사랑)의 추억(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을 안고 동숭동 거리를 걸으며 상념에 젖는다. ‘달력’은 세월을 상징한다. 화자는 이상적 가치를 위해 순수한 열망을 치열하게 바쳤던(피 흘린 곳) 그 거리에서 자기성찰을 하며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자 매개체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플라타너스’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은 어떤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참여의식 없이(혁명을 두려워하는) 세속적인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에 잠재돼 있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일깨운다(고개를 떨구게 했다).
‘플라타너스’는 과거에도 그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가 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다 알고 있는 증인과 같은 대상이다. 그런데 세상의 변화를 원하지 않으며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는 기성세대가 된 자신들과는 달리 여전히 제자리에서 겨울에도 마른 잎을 흔들고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자 반성적인 부끄러움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아닌 척 마음을 숨기며(짐짓) 건성으로 건강 이야기를 하고는 이미 안주하여 길들여진 삶,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소시민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늪으로 발을 옮겼다). 세대를 막론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 침묵하는 것은 결국 혼자 부끄러워지게 된다. 침묵은 곧 무관심이고 방관이자 말없는 수긍과 동조가 되기 때문이다.
이 詩는 ‘옛사랑’이 되어 기억 저편에 있는(희미한) 열망적 신념으로 패기 넘치던 젊은 날을 추억하며(그림자) 중년이 된 현재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윤리의식과 도덕적 의무감에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모든 기성세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청년들은 훗날 젊은 날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떠올리며 부끄러워하는 기성세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
2012 - 굳은 신념은 세월과 함께,
김광규 시인의 다른 작품 감상하기
늙은 소나무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어린 게의 죽음
어미를 따라 붙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 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오래된 물음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으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 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 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 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 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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