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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해설

21. 님의 침묵

by 자한형 2021.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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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沈默)과 그 해설 송 욱 (宋稶)

 

 

 

 

 

님의 沈默(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읍니다.

 

黃金(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盟誓(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微風(미풍)에 날어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追憶(추억)은 나의 運命(운명)指針(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읍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해설(解說)

3·1운동(三一運動)을 지도(指導)했지만, 민족(民族)의 독립(獨立)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도 있으리라.

모든 물질적(物質的)인 존재(存在)는 서로 상대방(相對方)과 관계(關係)를 맺고서 변화(變化)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現象)으로서는 있지만, 실체(實體)로서 혹은 주체(主體)로서는 - 이를 불교(佛敎)에서 자성(自性)’이라 한다. - 붙잡을 수가 없다. , ()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물질적인 존재는 이를 불교에서 ()’이라 한다. - 이라고 말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함은 이 뜻이다. 한편, 그러한 공()은 모든 존재, 곧 색()에게 가치(價値)를 주며 그것을 긍정(肯定)한다. 그래서, ‘공즉시색(公卽是色)’이라고 말한다. 또한, 모든 존재는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은 모든 존재와 다르지 않다고도 한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이라 함은 이 뜻이다. <이상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에 의함.>

존재(存在)와 무()에 관한 이러한 사상(思想)님의 沈默이 지닌 뜻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만해(萬海)는 유() 혹은 존재를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 실은 무() 혹은 공()을 말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는 만해의 미학(美學)이 의지하고 있는 기둥의 하나이기도 하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공()으로 정화(淨化)된 자연(自然)을 볼 수도 있다. ‘참어 떨치고 갔읍니다.’는 존재가 무로 변화하는 순간(瞬間), 이러한 순간은 흔히 극적(劇的)으로 묘사(描寫)된다.

존재를 넘어선 것이기에 黃金(황금)의 꽃이다. ‘빛나는 옛 맹서는 불법(佛法)에 대한 맹세이기도 하고 민족(民族)의 독립(獨立)을 쟁취(爭取)하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맹세 역시 티끌’, 곧 공()을 바탕으로 한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追憶(추억)’은 민족에 대한 참된 사랑을 깨달은 순간(瞬間)도 되고, 견성(見性)의 진리(眞理)를 깨친 찰나(刹那)도 된다. ()이 존재와 접촉(接觸)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감미(甘味)로운 첫 키쓰가 아니고, ‘날카로운 첫 키쓰’, 이렇게 표현하였으리라.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곧 진리를 말하는 목소리는 보통 귀로는 들을 수 없고, 따라서 말을 초월(超越)한 것이며, 혹은 너무나 뚜렷하고 어마어마하여 귀먹을 지경의 것이다. ‘귀먹고’, ‘눈멀고’, 모두가 긍정(肯定)과 부정(否定)을 지니고 있어서 강렬(强烈)한 효과(效果)를 낸다.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이렇게 극적(劇的)인 표현의 이유(理由)는 이제 쉽게 알 수 있지만, ‘새로운 슬픔에는 주목(注目)해야 한다. 새로운 존재를 준비(準備)하기 때문에 새로운 슬픔이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읍니다.’ 역시 극적인 표현. 슬픔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면 진리를 가리키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와 무(), 기쁨과 슬픔, 성공(成功)과 실패(失敗), 이들은 서로 연결(連結)되어 있다.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읍니다.’, 독립 운동(獨立運動)을 계속(繼續)하는 것과 불법(佛法)을 깨닫는 것이 모두 자기의 마음에 달려 있으며, 상황(狀況)에만 책임(責任)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만유(萬有)의 바탕인 공()은 한없는 의지(意志)와 주체성(主體性)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 노래를 넘어선 노래. 따라서 아주 훌륭한 예술(藝術)은 진리가 침묵(沈默)의 깊이에서 드러내는 것을 꾸준히 표현한다. 이루어지지 않은 독립 운동을 일제하(日帝下)의 극한 상황(極限狀況)에서도 쉬지 않는다. 불도(佛道)에 대한 정진(精進)을 계속한다.

그러나, 인간(人間)이란 존재는 항시 침묵에게 묻고 대답을 얻기 마련이다.

[출처] ‘님의 침묵과 그 해설 (송욱)|작성자 타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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