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과 김영한)
(길상사, 김영한)
(말년 북한의 백석과 남한의 나타샤)
블로거가 선택한 이詩의 뒷이야기
짧은 만남 긴 이별
시인 백석,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930~40년대 한국 문단을 풍미했던 모더니즘 시인이다.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였던 아버지 덕에 오산중학교를 거쳐 일본 아오야마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시집 <사슴>을 비롯하여 약 백여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문단 내 최고의 미남(美男) 시인으로 통했다. 1936년 함흥에 있는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운명의 여인, '나타샤'를 만난다.
어느 날 학교 교직원들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가는 교사를 위해 요정(料亭)으로 송별식을 하러 갔다. 백석 옆에 문학을 이해하는 인텔리 출신의 '진향'이라는 기생이 앉았다. 둘은 보자마자 문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빛의 속도로 가까워지며 불꽃 같은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진향이 들고 다니던 이태백의 시집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뒤적거리다가 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다. 머잖아 닥쳐올 그들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자야오가는 전쟁터에 나간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여인, 자야의 애타는 심정을 담고 있는 시다.
서울에서 태어난 자야(본명 김영한 1916~1999)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할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32년 일제 강점기 때 기생 조합인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당시 조선 정악(正樂)의 대부, 하규일의 문하에서 궁중무와 가곡을 배웠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김영한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고, 훗날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하규일 선생 약전>과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남겼다.
백석과 자야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은 소주처럼 쓰디썼다. 함흥 제일의 명문가 집안에서 기생 출신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일은 만무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다. 서울에서 3년 동안 동거하며 사랑을 불태운다. 이때 백석은 여러 편의 서정시를 발표한다. 그중에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와 관련된 시다.
백석의 부모는 백석과 자야를 갈라놓을 심사로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두 번이나 결혼을 시켰지만 그때마다 백석은 자야 곁으로 돌아온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자야는 백석의 구만리 같은 인생길에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해 거절한다.
결국 백석은 1939년 홀로 만주로 떠났고 자야는 서울에 남게 된다.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두고 먼 길 떠나는 백석의 흉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렇게 두 사람은 3년간의 꿈같은 사랑을 뒤로 한채 영영 만날 수 없는 긴 이별의 시간을 맞이한다.
대원각 시주하고 백석문학상 제정한 자야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고 서울에 홀로 남은 자야는 성북동에 있는 한식집 청암장을 사들여 요정으로 바꾼다.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제3공화국 시절 '요정 정치'의 본산인 대원각은 그렇게 탄생한다.
자야는 빼어난 미모와 수완으로 정·재계 거물들을 상대하며 많은 돈을 벌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백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북에 남게 된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한 자야는 그가 그리울 때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애송하며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1980년대 후반 자야는 법정(法頂, 1932~ 2010)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받아 법정 스님에게 "아무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달라"라고 부탁한다. 평소 무욕을 강조하던 법정 스님은 "나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이를 사양한다. 이후에도 자야는 뜻을 굽히지 않고 시주 의사를 밝히자 법정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여 1997년 '길상사(吉祥寺)'가 창건된다.
자야가 대원각을 시주한 대가로 받은 건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었다. 낙성 법요식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시주하셨는데 아깝지 않으십니까?" 길상화는 "그까짓 천억 원,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거야"라고 한 말은 유명한 일화가 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남북 분단 이후 평양에 남아 있던 백석은 당 충성심이 약한 인민들을 숙청하는 이른바 '붉은 편지'를 받고 양강도 협동농장으로 쫓겨갔다. 백석은 그의 천재적 문학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1996년 84세를 일기로 양강도에서 쓸쓸히 삶을 접었다.
'천억 원의 돈도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며 백석과 그의 시에 무한한 사랑을 보였던 자야도 백석이 이승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999년 겨울, 첫눈이 푹푹 나리던 날 순백의 길상사 뒤편 언덕에서 흰 당나귀 타고 평생 그리워하던 연인, 백석의 곁으로 돌아갔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백석과 자야의 아팠지만 아름다웠던 문학적 사랑은, 시가 되고 연가가 되어 차디차고 황량한 겨울밤의 밑바닥을 훈훈하게 덥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