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丹楓)> - 이제하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生鮮)처럼 뒤채며 살려던 목숨이
어째 볼 수도 없는 허공(虛空)에서 아으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잎잎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상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에서 하늘 끝에서
되돌아 아뜩아뜩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군데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잽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청하,1982)-
【해설】
가을이 오면 누구나 잠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가을에 느끼는 감흥은 봄의 신록과 여름의 무성함 그리고 가을의 조락(凋落)이라는 자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가을철 단풍의 온통 화려한 색채는 더욱 시인의 시정을 자극하는 듯하다. 단풍은 화려한 외양과 달리 머지 않아 잎으로서의 한 생애의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분명한 징후이다. 생의 종말적 징후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불편하다. 붉은 단풍에서 고달픈 몸부림과 쓰라린 상처를, 그리고 유한한 삶의 시간을 보기 때문이다.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는 이제하의 <단풍(丹楓)>은 예사 단풍과는 다른 정서를 지니고 있다. 1연의 `가을이로다'라는 거듭된 외침부터가 심상치 않다. 시인은 단풍을 보며, 생선처럼 뒤채며 살던 고단한 목숨이 나무마다 붙어 토하는 핏줄기라고 비유한다. 물 밖으로 나온 생선이 괴롭게 뒤척이는 것처럼 삶은 괴로운 허덕임으로 비추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단풍의 붉은 색채는 피의 강렬함과 통한다. 피는 몸 안에 감추어진 채 생명의 유지에 기여하지만 겉으로 노출된 피는 생명력의 소모이거나 상처이다.
시인은 단풍을 토하는 핏줄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 쇠잔해가는 생명의 마지막 몸짓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단풍은 가을의 낭만이나 추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피맺힌 삶의 괴로움과 아쉬움이나 회한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물이다. 단풍색이 짙을수록 토해낸 핏자국 역시 강렬한 것으로 인식되며 핏빛이 환기하는 정서 또한 강렬해진다. 단풍잎을 `핏줄기'로 보아 목숨의 스러짐으로 비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못 다한 숨결이 마지막 숨결을 허덕이며 바작바작 긁어대는 생채기로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삶의 유한성을 환기시켜주는 단풍은 달음박질하듯 욕심을 쫓아 사는 다급함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시인은 한 생애를 살고 가는 나뭇잎의 마지막 남은 시간과 색채에서 회한 많은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다. 단풍의 색깔은 울음조차 제대로 울 수 없었던 마음이 회한과 슬픔을 간직한 채 마지막으로 처연히 타오르는 불길에 비견된다.
시인은 단풍의 붉은 색감을 강렬한 이미지로 구사하여 한 생애를 마치고 소멸하는 나ant잎 그리고 인간에게 던지는 안타까움을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대상에서 삶에 대한 강렬한 절규를 얻어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지현: <한국의 현대시>)
[출처] 이제하 : 시 <단풍(丹楓)> |작성자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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