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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해설

32.돼지들에게

by 자한형 202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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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에게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나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꺾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 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블로거 의견:

 

 

 

조선시대 유명한 여류시인이자 홍길동전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 스물일곱에 죽으면서 남긴 후회 3가지

 

1) 조선朝鮮에 태어난 것

 

2) 여자로 태어난 것

 

3) 자신의 가치를 몰라준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한 것

 

 

 

허난설헌의 유시遺詩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조선시대 허난설헌과 오늘 최영미崔泳美 사이에 뭐가 다른가? 한국에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아직도 후회스럽지 않겠는가? 얼마나 세상이 더 험해졌는가?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나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포기抛棄 않는 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나는 언젠가 시인의 장농 깊숙한 곳의 구슬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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