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 가는 배 -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ㄴ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시인과 문학평론가, 번역가, 연극운동가로 활동했던 박용철朴龍喆(1904~1938)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호남은행에서 근무했던 박하준씨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두 형들이 요절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장자가 되었다. 아버지 박하준은 2~3천석 쯤 짓는 시골 부자였다. 용아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긴 했으나, 체질은 선천적으로 허약한 편이었다.
그는 1911년 광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다녔다.
1921년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공부한 후 20세이던 1923년 동경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한다. 그해 여름방학 때 귀국해 집에 돌아와 있는 동안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도시가 잿더미로 변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학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살포하고, 건물에 불을 지른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동경의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로 올라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반년 만에 중단하고 말았다. 고향으로 내려 온 그는 시골집에 칩거하며 문학과 철학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아내와의 불화까지 더해 힘든 시기였다.
16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했지만 가정생활이 원만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혼한 뒤 누이의 친구였던 임정희와 재혼했다.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박용철은 이때부터 스스로 방황에서 벗어나 눈부신 문학 활동을 전개한다. 김윤식金永郞(1903~1950)과는 일찍이 일본에서 만나 친교를 맺어온 터였고, 그 외 정인보鄭寅普(1893~1950), 변영로卞塋魯(1897~1961) 등 몇몇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시전문지인 『시문학』을 1930년 창간하게 된다. 용아는 『시문학』에 시 「떠나가는 배」, 「비내리는 날」, 「싸늘한 이마」,「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들어섰다. 이어 『시문학』 2호와 3호에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한 조각 하늘」 등의 시편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후부터 『시문학』 발간에 참여한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등을 시문학파로 부르게 되었고, 순수시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
이들은 임화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으로 대표되는 경향파 리얼리즘 문학, 김기림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문학과 대립해 순수 문학이라는 한 흐름을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에 착안, 시어의 조탁에 힘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의 음악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영롱하고 섬세한 서정성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문학파의 순수시는 본래적인 의미의 순수시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 상징주의에서 비롯된 순수시는 말의 뜻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미묘한 정신의 상태를 시어의 음악적 기능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한국문단의 순수문학을 대변했던 시문학파의 시는 시의 음악성에만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시문학』은 1931년 3호 발간을 끝으로 종간을 하게 된다.
1931년 박용철은 다시 사재를 털어 『문예월간』을 창간한다. 『문예월간』은 『시문학』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소설, 영화 등으로 장르의 폭을 넓히는 등 문예종합지로서 성격이 강했다. 특징적인 점은 해외문학파의 활동을 뒷받침하였으며, 이는 서구문학을 번역하여 지면을 할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괴테 100주년을 맞아 괴테 기념특집을 마련하는 등 필진도전보다 많이 끌어들였다. 그러나 『문예월간』도 그 수명이 길게 가지는 못하였고, 제4집을 마지막으로 종간을 하게 된다.
한국의 순수시론 개척해온 비평가, 번역가로도 활동
이 무렵 박용철은 시작 활동보다는 비평가로서 활동에 더 치중하는 면모를 보인다. 박용철은 『문예월간』 창간호에 실은 「효과주의적 비평 논강」을 발표하였으며, <조선일보>에 시단의 월간 평을 싣는 등 순수 문학비평가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뿐만 아니라 1933년에는 개인이 출자하여 다시 『문학』을 창간한다. 그리고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유치환을 끌어들여 대외에 시문학파가 아직 건재함을 알렸다. 시론에도 계속 힘을 기울여 1934년 하우스먼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강연을 번역한 「시의 명칭과 성질」을 발표하면서 구체적인 이론을 펼쳐나간다. 순수시론을 대변하는 대표적 시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박용철이 펼친 순수시론은 물론 시문학파의 이론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어 이전의 언어, 즉 음악으로서 시언어를 생각하였으며 순수서정시의 궁극적인 형식으로 간주하는 시론을 펼쳤던 것이다.
『시문학』의 「후기」를 잠깐 들여다보면 박용철의 생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매침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시는 지나는 걸음에 슬쩍 읽어치워지기를 바라지 못하고 우리의 시는 열 번 스무 번 되씹어 읽고 외어지기를 바랄 뿐 가슴에 느낌이 있을 때 결코 읊어 나오고 읊으면 느낌이 일어나야만 한다. 한말로 우리의 시는 외워지기를 구한다. 이것이 오직 하나 우리의 교만한 선언이다. (중략) 한 민족의 언어가 발달의 정도에 이르면 구어로서의 존재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문학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언어를 완성시키는 길이다.
한마디로 “열 번 스무번 되씹어 읽고 외어지기” 위해서는 시가 음악과 같이 리듬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임화는 박용철 등 시 문학파의 이런 시 의식을 기교주의로 단정 짓고, 예술인식의 부재와 예술의 편향이라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기도 했다.
박용철은 이 무렵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다. 박용철이 간접적으로 지지해 오던 해외문학파의 방계 단체인 ‘극예술동인회(1931년 결성)’에도 직접 참여하여 신극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934년에는 이 단체의 동인지인 『극예술』을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서 활동을 한다. 『극예술』지는 통권 7호까지 발간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문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박용철은 이 무렵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같은 희곡작품 번역에 주력했다. 또한 괴테, 하인리히 만, 하이네, 실러 등 주옥같은 70여 편의 시를 번역하였으며, 미국과 영국의 영시 300여 편을 번역하는 등 그가 번역에 쏟는 열정은 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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