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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글(수필, 여행기, 편지글, 일기 등)

슬픔에 대하여

by 자한형 2021.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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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다보면 슬픔없이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의 온갖 슬픔을 다 뒤집어 쓸 수도 있고 세상이 다 없어지는 것 같은 상실감이나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통감하기도 한다 인생사를 표현하는 생노병사라고 하는 것에서 기본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슬픔일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에서 늙는 것에서 병드는 것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슬픔속에 빠져 있다보면 절망의 나락으로 침잠되기도 하고 영혼의 정화됨을 느끼게 되는 카타르시스의 정수를 맛보기도 한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슬픔이란 자신, 또는 남의 불행이나 실패의 경험, 예측 또는 회고(回顧)를 수반한 억울한 정서를 말한다. 혈액순환 약해지고, 호흡이 완만해지며, 안색이 창백해지고, 흔히 눈물을 흘린다. 그 발생은 먼저 우울증이 있거나 저항력이 약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경우로 특별한 불행이나 실패의 경험이 없는데도 가을에 비애를 느끼고 울기도 하는 것은 이에 속한다. 다음에 운명, 죽음, 마음의 깊은 상처 등 자극이 너무 강하여 감당할 수 없는 경우는 비통이라고도 한다. 울거나 몸을 트는 신체적 반응을 수반한다. 슬플 때 사람은 자기 내부로 빠져들어 심한 경우는 자살까지 한다. 슬픔은 자기의 무력감이므로 인간에게 부정적(否定的)인 감정인 동시에 사물에 대한 허무감을 갖게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표현한 천붕이라는 것도 부모님이나 임금의 죽음을 맞는 슬픔을 표현한 것으로 묘사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극도의 슬픔내지 환란을 당했을 때의 반응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힘든 순간이고 감내하기 힘든 슬픔일 것이다 왜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업이 있었는가를 후회하기도 하고 절대자에게 원망의 화살을 보내기도 하며 오랫동안 그 근원을 찾고자 하기도 하지만 쉽게 용인되고 납득될 만한 이유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구만리 같은 청춘이 푸른 꿈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영면하게 됨은 더할 나위없는 슬픔의 절정이요 진수라 할 것이다 자식을 앞에 보냈던 많은 성현들은 그 아픔 속에서 정화된 영혼의 참 목소리를 들었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쳤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독교에서 믿음의 화신이라 칭송되는 아브라함은 그의 금쪽 같은 자식을 구덩이 속에 집어 넣으려 했던 엄청난 믿음의 힘을 보여주었다 또한 농업발전의 선구자 이셨던 농민운동가 유달영님은 자식을 앗아간 절대자에게 기원을 올렸다 더할 나위없는 슬픔으로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시길 갈구하는 장엄하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도꾸가와 이예야스는 자식의 자결을 명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인내해가면서 혼란했던 전국을 모두 평정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도 한다.

오십여년을 살면서 슬펐던 세가지 경우를 되돌아 본다. 첫 번째의 것은 절대자와의 결별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어렸었던 때였고 코앞에 닥친 입시관계로 인해 부모의 간곡한 권고가 있었기에 하는 수가 없었다 의지의 작용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눈물겨운 설득에 의해 결별할 수 밖에 없었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잡고 전념해야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선택이었다 하는 수 없었고 선택의 여지도 남겨 있질 않은 듯 했다 일주일정도를 비통해 했고 안타까워 했고 가슴아파했다 그렇게 처절하게 그 순간에는 비감해 했고 애통해 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것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대학을 들어가니 그것에 심취해 있는 친구들을 몇몇 만날 수가 있었지만 무덤덤했다. 두 번째는 연인과의 별리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해야할 것 같지 가 않은 데 그때에는 그렇게 마음 아팠고 삶 자체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실의에 빠져 버려져 있었다 어떻게 일상사를 영위할 수 있었는지 신기해 할 만큼 그렇게 질곡의 순간과 시간을 견뎌내었던 듯 했다. 오랜시간이 지난 후 그니는 날 찾아왔고 그것으로 인연의 끈은 다시 이어진 듯 했지만 끝내 좋은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또다시 결별의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삶을 무기력함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다른 것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시간은 8개월여였다.마지막의 이별은 일방적인 통보로 조용하게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쉽게 극복되어지진 않았다 오랫동안 하나의 앙금으로 남았고 언제나 회한으로 기억저편에 밀려나 있을 뿐 이었다 그니의 보름여를 거의 실신한 듯이 그렇게 아프게 그 고통을 삼켜내었다고 들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게 잘 지내리라 기원해본다 마지막은 혈육과의 결별이었다 부음을 듣는 순간의 고통과 아픔을 진하게 느끼게 되었고 울음을 울었다. 세상을 살면서 부닥쳐왔던 인연의 끈이 끊어짐에 대한 아픔이었고 연민이었으리라. 추상같은 위엄을 지니신 분이었던 듯 했는데 그분의 음성 모습이 그대로 고스란히 연상되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아련함이 묻어 나왔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렇게 결별되고 떠나가는데 대하여 무상함을 느끼고 덧없음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었다.교육받고 배울 때에 사나이는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한다 나라를 잃었을 때, 부모님을 잃었을 때, 나랏님을 잃었을 때가 그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그렇게 슬픔을 이겨나가고 그것 만을 겪도록 놔 두질 않는 듯하다.

 

한없는 슬픔과 고통과 비통과 비감함을 겪으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 굳건하게 만들가면서 인간의 완성에로의 길로 나아가야할 듯하다 어떤 작가는 지아비를 잃고 자식을 잃고 절필을 감행하기도 하고 자신이 그렇게 슬픈데 세상이 온통 축제에 흥겨워함에 비통해하는 절망을 감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 슬픔을 한번씩 겪고 나면 그 영혼이 카타르시스되고 정화됨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슬픔의 극복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게 되고 세상사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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