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인체의 사지(四肢)를 상지와 하지로 구분하고, 상지를 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상지를 팔과 손으로 구별하여 부르는 수가 많다. 해부학적으로는 손목의 앞쪽 부분을 손이라고 한다. 손목의 앞쪽에는 거의 사각형이면서 편평한 부분이 있는데, 다소 오목한 면을 손바닥이라 하고 볼록한 면을 손등이라 한다. 손은 약 30개의 뼈로 구성되어 있는데, 손목에는 8개의 수근골(手根骨)이 있고, 손바닥에는 5개의 중수골(中手骨)이 있다.
각 손가락에는 손가락뼈[指骨]가 있는데, 엄지손가락(제1지)은 2개, 제2지에서 제5지까지는 3개로 되어 있다. 다섯손가락 중 엄지손가락이 가장 짧고 굵다. 가운뎃손가락(제3지)이 가장 길고, 약손가락 (제4지)·집게손가락(제2지)·새끼손가락(제5지)의 순으로 짧아진다. 손가락 끝마디의 위쪽에는 피부의 일부가 변하여 된 손톱이 있다. 손목,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 손가락 마디 사이에는 관절(關節)이 있어 손의 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손가락에 대한 명칭으로는 첫째 엄지손가락, 무지(拇指), 벽지(擘指) 대지(大指) 거지(巨指)라 하고 둘째 집게손가락, 검지, 식지(食指), 인지(人指), 염지(鹽指), 두지(頭指)라 하고 셋째 손가락은 가운데손가락 중지(中指) 장지(長指) 장지(將指)라 하고 넷째 손가락은 약손가락, 약지(藥指), 무명지(無名指)라 하고 다섯째손가락은 새끼손가락, 소지(小指), 계지(季指), 수소지(手小指)라 한다.
몇년 전 학교동창들과 함께 시골의 한 펜션에서 회합을 가진 적이 있었다. 부부동반으로 초대는 되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홀로 가게 되었다. 몇몇은 부부동반이었고 몇몇은 홀로 왔고 또 어떤 이는 늦둥이까지 데려오기도 했다. 오전에는 근처에서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인근 마트에서 시장을 봐오기도 하였다. 주최측에서는 동해까지 가서 오징어와 꽁치 등 싱싱한 해산물을 사가지고와 준비해 놓았다. 마당 한켠에 불을 피워놓고서는 오징어에 꽁치를 구워 안주로 해서는 약주도 한잔씩 했다. 섹스폰을 부는 친구 덕에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고 더 화기애애(和氣靄靄)해졌으며 무르익는 분위기를 더욱 고조 시키기 위해 실내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진 자정 무렵이었던 듯하다. 거실에는 탁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냥 나무판자를 각목 몇 개 위에 어설프게 올려놓았던 상태의 허술한 것을 아무도 몰랐었다. 별 생각 없이 탁자를 치워 자리를 넓히려고 탁자를 미는 순간 각목은 빠져버리고 판자는 사정없이 내 손가락을 누르며 찍어버렸다, 오른손 가운데 중지의 끝부분이 으스러져 버린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고 모두 황망해져 있었다. 자리가 거의 마무리되는 찰나에 사고가 발생 되었고 급히 119를 불렀다, 자체적으로 지혈을 한 채로 말이다, 10여분이 흐른 후 곧바로 구급차가 도착을 했고 응급처치 후 인근 의료원으로 후송되었다. 다시 간단한 응급처치가 이뤄졌고 손가락 수술은 이곳에서 할 수 없으니 빨리 서울로 가야한다고 설명했다. 다들 제법 약주가 얼큰한 상태라 이 돌발 상황에 대해 대처가 쉽지 않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큰 어려움이나 혼란은 없었다. X-레이를 찍고 간단한 지혈과 응급처치를 받고 개구리몸통 같은 모양의 스탠레스 비슷한 부목을 대고는 펜션으로 돌아왔다. 새벽녘 동트자마자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제대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선생의 처방 때문에 잠도 조금 눈을 붙이는 정도에 그쳤다. 다음날 새벽녘에 일행을 남겨둔 채로 혼자 어스름한 새벽공기를 맡으며 출발했다. 길은 뻥 뚫려 있어 순조롭게 갈 수 있을 만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 9시경에 서울에 도착했다. 집으로 와서는 짐을 풀고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서 일요일에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았다. 일반병원은 대부분 휴일인 탓에 수술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겨우 수술이 되는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술준비를 하고나서야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손이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졌는 줄을 그때 처음 알았다. 각 손가락마디 마다의 감각이 다르고 촉감이 틀리다는 것도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입원가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사무실 직원에게 연락해서는 입원사실을 통보하고 휴가 처리를 부탁했다. 3일은 족히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4인실에 입원을 했다. 팔은 그나마 약과였다. 같은 병실에 다리를 다친 젊은 친구가 있었다. 그는 오토바이사고로 다리를 치료하고 있었다. 다리는 참으로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어 보였다. 제대로 된 운신(運身)은 휠체어에 의존해야했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치료기간도 훨씬 길다고 했었다. 손이야 다른 손으로 다소 불편해도 어떻게든 해결이 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발이나 다리는 사정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갑자기 식사를 할 때마다 안 쓰던 왼손으로 하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퇴원을 하고 난 후 재활은 더욱 상그러웠다. 일주일 후에야 실밥도 뽑고 정상을 되찾은 듯 보였으나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수월하게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재활치료가 있어야 했고 그건 거의 오랜 시간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해야하는 것이었다.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내를 요하는 물리치료가 있어야 했다. 물리치료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손 전체를 파라핀으로 된 뜨거운 곳에 넣고는 15초 정도씩 5번을 담갔다 빼는 방식으로 치료를 했고 그 다음은 상처부위를 레이저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X-레이 사진촬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7개월여 동안 통원치료를 하며 겨우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사람의 신체, 그 일부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정교하게 만들어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또한 소중하게 간수하고 유지관리해야 함을 절감(切感)할 수 밖에 없었다. 늘 습관적으로 다루며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손가락도 이렇게 한번 다쳐보니 그 소중함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동창들도 그때 그 일로 만날 때마다 손가락 안부를 묻는 통에 곤욕스러울 때도 있었다. 경험이라는 것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제대로 실감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주위에서 이런 일들은 늘 다반사로 일어났었다. 그렇지만 그런 부분은 남의 일이었고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심하게 넘겨버린 것이 화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년시절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가 화상으로 평생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술시간에 쓰던 조각도로 엄지와 중지사이를 구두칼 같은 것으로 잘못 찔러 근육의 손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는 이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결의를 다지기 위해 무명지의 일부를 단지(斷指)하는 것으로 애국애족의 의지를 불사기도 했다. 또한 어느 영화 속에서는 약지의 끝을 자르는 장면이 마치 실제처럼 끔찍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이 실제 경험해보지 못한 이에게는 건성으로 치부되겠지만 실제로 당해보면 그 체험의 강도는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온전한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시키고자 노력하므로써 삶의 의의와 보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인생은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던 한 철학자의 말씀이 떠오른다 손가락의 훼손됨으로 인하의 몸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일깨워준 것이 아니었던가. 항상 건강관리에 힘쓰며 정상 상태를 유지시켜 나가는데 지극한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