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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글(수필, 여행기, 편지글, 일기 등)

자동차

by 자한형 2021.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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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 경유 등을 연료로 하는 기관을 장치하고 그 동력에 의해 바퀴를 회전시켜 도로 위를 달리는 차. 가솔린 엔진 자동차가 발명된 것은 1885년의 일이다. 독일의 칼 벤츠가 3륜 자동차를 제작한 것은 앞바퀴가 좌우에 있으면 바퀴의 방향을 바꾸는 얼개가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다음해에 역시 독일의 트리드리히 다임러가 4륜 자동차를 제작했다. 자동차의 대량생산이 시작된 것은 1913년의 일인데 미국의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해 포드 T승용차를 생산해 내었다.

컨베이어 시스템이란 예컨대 엔진 조립의 경우 실린더 블록이 컨베이어로 운반되어 오면 한 사람은 피스톤과 커넥팅 로드를 연결하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실린더 블록 속에 끼워 넣는다. 크랭크샤프트와 결합하고 다음은 거기에 플라이휠을 끼운다는 식으로 엔진의 조립작업을 분해해 제각기 맡은 단순한 작업을 하는 시스템을 말하는 것으로 대량생산의 원류에 해당된다. 대량생산에 힘입어 1대의 자동차가 완성되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어 자동차의 값이 점점 내려가 포드 T의 가격이 260달러까지나 내려갔을 정도로 노동자도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1929년의 보급률이 적어도 5명당 1대꼴이 되었다. 유럽에서 미국에서와 같이 승용차가 활발하게 보급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대부분의 가정에 자동차가 보급이 되어 있어 마이카시대가 절정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최초로 자동차를 갖게 된 것은 95S동의 한아파트에 살 때였다. 자재부 A과에서 B과로 옮겨 근무 중이었는데 광주에 살던 처형이 소개를 해주었다. 차종은 프라이드 베타였고 주행거리는 5만키로미터를 뛴 중고차였다. 여름에 휴가를 설악산 쪽으로 가는데 최초로 장거리 여행을 하기도 했다. 최초의 사고는 사당역 쪽에서 신호대기 중이었던 포텐샤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브레이크를 꽉 밟았어야 했는데 느슨하게 밟는 바람에 추돌하게 되었다. 범퍼가 내려앉았다고 해 현금으로 꽤나 물어주었다. 2000년까지 5년을 타서 13만키로미터 를 탔는데 막판에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자동차를 끌고 문상 가는 길이었다. 직장동료 두 사람을 태우고 봉화를 가는 길이었는데 기차를 타고 가겠다는 동료를 억지 춘향으로 같이 가게 된 상태였었다. 소백산을 못 미쳐서 차가 갑자기 서버렸다. 다시 시동을 켜고는 조심조심 거북이걸음으로 운행해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상을 마치고 눈이 올 듯해서 일찌감치 출발을 하였는데 소백산을 겨우 겨우 넘었는데 다시 또 차가 섰다. 시동을 걸고 뒤에서 두 사람이 밀고 해서 조금씩 전진을 했다. 급기야 정비소에 가서 일차 수리를 했음에도 결국 말썽이 일어나고 말았다. 레카차를 불러 제천에 있는 정비소에 가서 살펴보니 제네레이터가 잘못됐다고 해서는 자정까지 수리를 했다. 그리고 차를 끌고 밤새달려 서울로 왔는데 새벽3시 가량이 되었다. 밤새 눈이 내렸었다. 다음날 그 구간에서 연쇄 추돌사고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십년감수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일주일 후에 다른 사람에게 10만원을 받아 팔고는 아반테로 바꿨다. 베이지 색으로 근사해 보였다. 큰아들이 자전거를 타는 녹색소년단이라는 모임단체엘 들어가는 바람에 매주 야외 휴일 행사가 끊이질 않았다. 강화도를 처음 갔고 팔을 다쳤던 아들친구를 차에 태워 데리고 다녔다. 박수부대 노릇이었고 전국일주를 하는 행사에도 따라 다녔다. 서울에서 고창까지 갔다가 올라오고 다음부터는 장인어른이 뒷바라지를 했고 한라산까지 갔다.

 

2001년 하반기에 A교육원으로 발령을 받아갔다. 2002년경에 교육원을 나오는 삼거리 길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트럭이 와서 받아 버렸다. 신호가 바뀌어서 출발을 했는데 신호가 바뀐 것을 그냥 지나치려했던 트럭이 제동을 못함으로 인해 발생된 사고였다. 운전석 뒷자석의 문짝이 찌그러졌었다. 견적이 백만원 정도 나왔는데 전부 피해보상을 다 받았다. 20023월경에는 세 번째로 레저용 카니발로 바꿨다. 기름값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 휘발유에서 경유차로 바꾼 것이었다. 녹색소년단에서는 1호차로 선도 차량 역할을 했다. 선루프가 장착되어 있어 뒤어 따라오는 자전거행렬을 지휘통솔하는데 적격이었다. 한번은 겨울철에 아이들을 잔뜩 태우고 스키를 타러 양평스키장에 갔다.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니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질 않는 것이었다. 봉고차를 수배해서는 스키장으로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는 정비소로 갔다. 벨트가 잘못됐다고 해서 갔는데 다시 또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레카차에 의해 정비소를 다시 갔다. 그쪽에서도 정비가 되질 않아서 강릉의 큰수리업소까지 갔다. 수리비만 2백여만원이 든다고 했다. 주행거리가 서비스 한도거리인 1만키로미터를 넘었지만 양해를 구해 애프터서비스 처리로 해서는 수리를 받았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미션이었다. 교육원에 있었던 2004년 초까지 3년 동안 7만 킬로를 탔다. 언젠가 고속도로를 통해 귀경길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한참 신나게 달리고 있던 터인데 갑자기 위급상황이 느껴질 정도로 급박해 보이는 일이 있었다. 한여자가 급하게 맨발인 채로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도 안타깝게 여겨져 무슨일인가 하고 갓길로 차를 정차했다. 상황인즉 스페어 타이어가 없는 상황에서 차타이어가 펑크가 나 있었다. 노인네분들도 몇 명이 보였고 다급하게 여겨졌다. 하는 수 없이 울며겨자먹기로 스페어타이어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부 돈을 쥐어 주었다.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지만 위급한 상황하에서의 최선을 다한 모습이었다, 연락처를 주고 돌아왔다. 전화가 한번 오기는 했는데 그 후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적선을 한셈으로 치고 야박한 세상인심에 안타까워 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때가 어떻게 다른가를 느끼게 해주는 한 일면이었다.

 

지금 9년 정도가 지났는데 주행거리는 21만키로미터에 달하고 있다. 주로 집사람이 출퇴근용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에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는 보험회사를 불러서는 타이어를 교체하기도 했다. 자전거를 탔던 녹색소년단의 학부모 모임인 신록사 단체모임에서 놀러갈 때 주로 많이 이용되었다. 인천공항 끝자락 무의도에도 갔고 강화도도 갔고 복분자를 따러 고창까지 가기도 했다. 주로 정비는 Y정비소에서 했고 때로는 H정비소를 이용하기도 했다. 고장이 크다고 생각되면 시흥동 애프터서비스센터에 가서 정비를 받기도 하였다. 아반테를 처분할 때에는 처제한테 인계를 하였는데 곧바로 처분하고서는 처제네도 카니발을 샀는데 벌써 30만 킬로를 탔다고 했다. 대전에서 공주를 왔다 갔다 해야 했고 안동과 광주를 왔다 갔다 해야 했으니 거리가 보통이 아니긴 했다. 이제 또다시 차를 바꿀 시기가 된 듯하다. 차량을 운전한지가 16년에 접어들고 있다. 잔고장이 자주 일어나고 있고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김모라는 자동차 딜러가 있는데 최근까지도 안내장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보험만은 고등학교 동기생이 하는 것에 견적을 받아 들고 있다.

 

운전면허에 관하여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군시절에도 배울 기회가 많았는데 괜히 필요하지도 않을 듯해서 놔뒀는데 참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것 같았다. 직장생활 3년차 정도 되었는데 운전학원에서 버스로 데리러오고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교습을 받게 되었다. 11월 정도였다고 기억이 된다. 일과를 마치고 가서 교습을 받고 다시 사무실로 와서 퇴근하는 식이었다. 보름정도 지났을 쯤에 벌써 면허 신청을 했던 직원도 있었고 학원을 마치자마자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이도 있었다. 내심 참 부러웠다. 시험을 응시하러 갔는데 필기와 코스는 한꺼번에 합격을 했는데 주행이 영 시원치를 않았다. 갈 때마다 조금씩 부족했다. 너댓 번을 그렇게 하고 나니 시험이 엄청 두려워졌다. 면허를 따는데 6개월이 걸린 셈이다. 늘어나던 수입인지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연후에 장롱면허로 오륙년을 보낸 후에 도로주행 교습을 받고는 본격적인 운전에 들어간 것이었는데 잦은 실수가 있었고 오류가 있었다. 속도를 빠르게만 하려는 욕심에 과속은 부지기수였고 마음이 급해 빨리 달려야 하는 조급증을 가진 것처럼 안달을 냈다. 이제는 좀 차분히 여유를 갖고 안전하게 방어운전을 하면서 주행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때라 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젊은 후배 녀석이 3차선으로만 달리는 느긋함을 보여주는 데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참으로 대단한 배짱이고 여유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진정한 운전자의 정도가 아닌가 한다. 빨리만 가려하고 급하게 가서 좋은 점도 있겠지만 언제든지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안전이 최우선인 점을 명념(銘念)해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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