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꿈의 고향은 서울이다. 내가 처음 서울을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 이학년 수학여행을 갔을 때이다. 거의 70년대 초반이다. 한창 10월유신으로 경제부흥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절이었던 듯하다. 말로만 들었던 남대문을 보게 되었고 현판도 남대문이 아닌 숭례문으로 되어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국립박물관도 신축 중에 있었던 듯하다. 그 앞에서 도열해 기념촬영을 한 기억도 난다. 창경궁 등도 둘러본 것으로 추억이 된다. 서울지하철도 건설되고 있는 와중에 있었다 멋모르고 철도 없었던 어린시절의 서울 방문이었다. 시중에 떠도는 말 가운데 이런 얘기들이 있었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하고 말이 나면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 서울 사람의 옷은 다듬이의 힘으로 입고 시골사람의 옷은 풀힘으로 입는다. 서울이 무섭다니까 남태령에서 긴다. 서울 까투리가 시골의 의뭉이에게 속는다. 서울 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 서울사람은 돔배젓은 알아도 홍어 맛은 모른다. 모로가나 기어가나 서울 남대문만 가면 그만이다. 서울에 가면 눈뜨고 코를 베어간다. 서울 가본 사람과 안가본 사람이 우기면 서울 안가본 사람이 이긴다. 이런 서울에 관련된 속담은 거의 70개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 사람이 한 번 가 보고 와서 설명하기에는 하도 넓고 복잡하다 보니, 안 가 본 사람이 가본 것처럼 허풍을 떨어 말해도 반박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돔배젓은 전어의 내장 중에서 위로 담근 젓으로 속젓, 돔배젓, 밤젓이라고도 한다
다음으로 서울을 올라오게 된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시험을 치룬다고 몇 번 오르락내리락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군 복무중에 7주정도의 교육을 거여동 교육사령부에서 받은 적이 있었다. 본격적인 서울살이가 시작된 것은 80년대 말 무렵이었다. 88올림픽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때에 인사발령에 의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결혼을 한지가 1년여가 지났지만 주말부부로 생활하고 있던 시기였다. 서울을 잘아는 직원이 있었다. 서울의 맛집 명소를 소개해 주었다. 종각의 이문 설렁탕, 조흥은행 본점앞의 하동관, 명동의 냉면집, 오장동 냉면집, 삼청동 칼국수집 등이었다. 곳곳의 맛집을 다녀보며 서울의 다양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서울사람들이 서울이외의 곳은 다 시골이라고 칭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하기도 했었다. 집사람은 시골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자취를 해본적도 없어 하는 수 없이 하숙을 구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이렇게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달여가 지나고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하숙집에서 들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었다. 소식을 접하고 바로 시골로 내려가 몸조리의 뒷바라지를 했다. 이삼일간 몸조리를 돕다가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야할 당위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된 코스를 밟아가려면 서울에서의 생활이 필수조건이었다. 모든정보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다. 동기들도 대부분 서울로 올라왔다. 물론 시골에 정착해 있던 이들도 있었고 아직까지 시골에 생활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승진시험을 대비해야 했었다. 앞으로의 직장생활에 있어서 승진시험은 거쳐야할 한 과정이었다. 모두들 집을 나와 여관에 생활을 하면서 준비를 하기도 했었고 상당한 기간이 요구되기도 했었다. 통상 초봄에 시험이 있었다. 10여년이 지나도록 통과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평생을 해서도 않되는 경우도 있었다.
2년후에 집사람이 서울 중구의 장충여중으로 전근이 되었다. 하숙을 청산하고 친구랑 구로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차였다. 친구 중에 한녀석은 발령이 지방으로 나자 회사를 관두기도 했었다. 워낙 탄탄한 경력과 스펙을 갖고 있었기에 금방 취직이 되었고 적응해나기도 했었다. 한친구는 평택쪽으로 발령이 나서 한동안 그곳에서 지내기도 했었다. 또 한선배는 아예 영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었다. 단칸방이었고 부엌이 딸려 있었다. 어느만큼 간단한 취사가 가능할 정도였었다. 평소에는 매식을 했었고 휴일에는 간단한 라면 정도로 해결하는 편이었다. 언젠가 한번 여의도 순복음 교회 앞을 지나는 때였다. 때국물이 줄줄이 흐르는 고등학생정도의 아이가 있었다. 하도 불쌍해 보여서 집으로 데리고 갔다.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목욕을 시켜주었고 잠도 재워주기도 했다. 저녁도 사먹였다. 그리고 보냈었다. 집사람이 올라옴에 따라 용산구청 뒤 원효로에 방을 구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려 있는 곳이었고 화장실은 공동화장실이었다. 이곳에서 얼마간 지냈었다. 그리고 91년도에 신림동에 신축빌라를 구해 들어갔다. 작은 아이도 태어났고 식구가 넷이 되었다. 집사람은 육아휴직을 3년간 하게 된 터라 그런대로 사람사는 것 같은 삶을 처음으로 살게 되었다. 2년정도 지나고 나니 집사람은 소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방송국 리포터로 활동을 좀 하게 되었다 그런 덕에 TV에 출연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5년여를 그렇게 아등바등 복적거리는 속에서 살았던 듯 하다.
다음으로 살게된 곳은 조그만 아파트였다. 소규모의 아파트였다. 120가구의 서민아파트였다. 집사람은 집근처의 학교로 전근을 오게 되었고 큰아들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작은녀석은 여전히 어린이집 신세였다. 3년정도 지나고 나니 집주인의 퇴거 요청에 의해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으로 이사를 갔다. 한번은 비가 새듯이 물이 새는 바람에 공사를 일주일동안 하는 바람에 일주일간을 인근 여관에서 지내기도 했었다. 차도 중고로 구입해서 타고 다녔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처제네도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처제내외는 집사람과 마찬가지로 교직에 있었다. 같은 아파트 옆동으로 이사를 왔다. 혈육이 부근에 살게되니 한결 의지가 되었고 여러 가지 이로운 점이 많았다. 처제네는 5년여가 흐른 후 동서 공주쪽으로 가게되어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다. 한참동안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살림을 불려나갔다. 그래서 좀 더 넓고 큰 아파트로의 이사를 시도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무리가 뒤따랐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큰 맘먹고 과감하게 도전을 한셈이 되었다. 그제서야 제대로된 일정규모의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26평형정도 된 듯 했다. 거실은 협소했다. 큰 아들은 중학생이 되었고 작은 녀석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3년정도를 살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보다더 나은 교육여건을 가진 곳으로의 이주가 필요해졌다. 큰아들의 학원은 서초동에 있었다. 다시 한번 과감하게도 무리를 해가며 이사를 했다. 길거리에 소비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서초동쪽으로 가야 했었다. 큰녀석은 번거로울 듯해서 그대로 학교를 다녔다. 작은 녀석은 중학교 이학년이었는데 아예 학교를 옮기기로 하였다. 교장선생님과의 면담도 있었다. 상당히 의아해하고 경원시하는 분위기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었다. 역시 강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달랐다. 작은 녀석의 성적으로 강남의 명문중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반의 삼분의 일이 영어를 만점을 받는 학교였다. 초반의 적응에 상당한 애로를 겪는 듯 했었지만 차츰 나아졌고 적응도 해나갔다. 아이들의 대부분이 명문가의 자제들이었고 외국도 많이 다녀온 듯 했었다. 문화나 생활패턴의 차이 등으로 인해 보통의 재력 또는 경력을 가지고 살기가 만만치 않은 곳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재산이 10억이 없는 상태로 강남에 사는 것은 간큰 남자라는 것이 절감(切感)되었다. 무늬만 강남에 사는 것이었다. 최소의 비용으로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여겼다. 6년동안을 지냈다. 삶의 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다. 친척누님네가 10여년 전에 이곳에 살다가 지금은 신도시쪽으로 가 살고 있었다. 지금도 자녀들은 그 서초동 시절의 생활에 대한 향수(鄕愁)를 갖고 있고 그쪽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는 것에 공감이 되었다. 친척 누님도 서울에 와서는 처음에는 빌라에서 사시다가 개인주택에 살다가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살고 계셨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전철을 밟아가는 듯 하다. 후세에게는 반드시 아파트로 시작하기를 권고해주고 싶다. 물론 여력이 된다면 단독주택이 좋기는 할 것이다. 언젠가 오랫동안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오게된 분의 넋두리가 있었다. 집을 팔아서 왔음에도 강남집의 전세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에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시골집 10채를 팔아야 강남집하나 살까말까한다고 했었다. 어찌되었지간에 아무튼 아파트부터 시작해야 할것이고 가급적이면 강남삼구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한번은 전세금을 올려준 적이 있었는데 그 부담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서민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던 것을 마련하느라 고생했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기준이나 원칙, 최소한의 기본 등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집사람은 자기발전을 이루어 교직에서 전문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자격증도 땄다. 공부도 불철주야로 매달려서 어려운 경쟁의 관문을 뚫고 원하던 바를 이룬 셈이 되었다. 는 직장에서 승진이 되었다. 큰녀석은 대학을 입학하였고 군복무까지 마치게 되었다. 군복무는 신병훈련을 거쳐 1포병여단에서 포병으로 근무를 했다. 위치는 파주 법원리쪽이었다. 책임감있게 임무수행을 잘 해낸 덕에 무난하게 군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어느만큼 자신의 원하는 바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워온 듯 하다 작은 녀석도 대학에 입학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아직까지 작은 녀석은 천방지축이고 천지를 모르고 헤메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빠른시일내에 입영을 해야할 듯 하다. 작은녀석에게 교육을 했었다. 이과를 가서는 서울생활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려면 좋은 대학을 제대로 가도 쉽지 않은게 세상형편이다. 열심히 공부해야 경쟁에서 이겨나갈 수 있다. 그렇게 교육을 하고 세뇌를 시킨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였었다. 녀석은 결코 서울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는 식이었다. 조용히 시골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지 굳이 서울의 복잡함속에 북적거리며살 이유가 없다는 식이다.
세상을 살면서 이룰 수 있을 만큼의 대부분을 이집에서 이루었다. 주택은 분양되는 것에 청약을 해서 당첨을 받게 되었다. 서초동의 집이 서향이었고 저층이었기에 햇볕도 잘 들지 않아 화초를 키우는 데에도 상당한 애로(隘路)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에서 제대로의 서울살이를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회복했고 성취를 어느만큼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의 10여년을 지냈던 신림동쪽으로 시장을 봐오기도 하고 그곳을 자주 왔다갔다 했었던 듯 하다. 물가등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천양지차가 있었다. 고급이었고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차츰 살면서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가기는 했지만 신림동 사람들만큼 정감있게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지는 못했던 듯 했다. 물가가 보통 비싼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예민해 했고 신앙생활이나 가족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에 역점을 두는 듯했다.
이제는 서울생활의 마무리 되어야 할 곳으로 이사를 한 곳은 신대방동의 신축아파트였다. 살림도 거의 다를 바꾸는 수준의 변환이 이루어졌다. 차도 그럴듯한 것으로 바꾸었다. 주거환경이나 조건은 신축아파트인 만큼 잘 갖추어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나 주민생활 측면 등에 있어서는 강남삼구에 비할 바가 못되는 듯하다. 인근에 보라매 공원이나 병원 등도 있지만 예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격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런 얘기들을 하는 것같다. 시골사람들의 꿈의 고향은 서울이겠지만 서울사람들의 꿈의 고향은 외국의 멋진 곳이 아닌가 한다. 이제는 서울에서 생활한지도 20여년이 지난 듯하다. 서울사람이 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를일이다. 아직도 시골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다. 시골사람들은 서울을 쳐다보고 사는 것 같고 서울사람은 유수한 외국의 멋진 도시를 꿈꾸며 지향하는 듯 하다. 서울이 국제적인 도시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지향하며 롤모델로 해서 삶의 행복지수를 높여가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얼마전 수해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 서울의 핵심이었던 곳이었다. 더 이상 이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노랫말에도 있듯이 서울은 아름다운 곳이고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는 우리의 수도다. 무엇보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로 삶의 질을 향상시켜나가는 살고싶어하는 곳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 서울시민의 사명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