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390 40. 패강랭 패강랭(浿江冷)- 이태준 다락에는 제일 강산이라, 부벽루라, 빛 낡은 편액들이 걸려 있을 뿐. 새 한 마리 앉아 있지 않았다. 고요한 그 속을 들어서기가 그림이나 찢는 것 같아, 현은 축대 아래로만 어정거리며 다락을 우러러본다. 질퍽하게 굵은 기둥들, 힘 내닫는 대로 밀어 던진 첨차와 촛가지의 깎음새들, 이조의 문물다운 우직한 순정이 군데군데서 구수하게 풍겨 나온다. 다락에 비겨 대동강은 너무나 차다. 물이 아니라 유리 같은 것이 부벽루에서도 한 뼘처럼 들여다보인다. 푸르기는 하면서도 마름의 포기포기 흐늘거리는 것, 조약돌 사이사이가 미꾸리라도 한 마리 엎디었기만 하면 숨쉬는 것까지 보일 듯싶다. 물은 흐르나 소리도 없다. 수도국 다리를 빠져, 청류벽을 돌아서는 비단필이 훨쩍 펼쳐진 듯 질펀하게 깔려 나.. 2022. 5. 19. 39. 판문점 판문점(板門店)-이호철 새벽녘에는 빗방울이 돋았으나 어느새 구름으로 곽 덮였던 하늘의 이 구석 저 구석이 뚫리며 비도 멎고 스름스름 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쨍하게 맑은 날씨로 개어오른 것은 아니고 적당히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며 꾸물거리는 변덕스러운 날씨로 변했다. 해가 떠오르자 비 갠 끝의 습기를 바람이 몰아가고 거무튀튀한 떼 구름이 온 하늘을 와당탕 소리를 내듯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햇덩이는 그 희고 짙은 모습을 잠시 나타냈다가는. 검은 구름 속에 묻혀 눈이 시지 않고도 바라볼 수 있게 귀여운 모습의 또렷한 윤곽이 되기도 하고 육중한 떼 구름에 휩싸여 소용돌이를 치기도 했다. 양철지붕들이 새말갛게 반짝이는가 하면 어느새 그늘에 덮여 우울해지기도 하였다. 볕과 그늘이 뒤바뀌고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 .. 2022. 5. 18. 37. 침몰선 침몰선 -이청준 어느 가을날 오후, 진 소년은 처음으로 마을 앞 바다의 침몰선을 보았다. 아니 침몰선은 훨씬 전부터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을 마음에 두어 본 일이 없었다. 소년은 그가 태어난 일을 전혀 기억할 수 없듯이 그 침몰선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것은 그냥 바다의 한 부분으로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침몰선에 대한 소년의 가장 오랜 기억은 그 날 오후의 일이었다, 뜰 앞 감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잎들 사이로 한나절 바다를 내다보던 소년의 생각 속으로 문득 그 침몰선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 때 침몰선은 차 오르는 밀물을 타고 금방이라도 닻을 올리고 떠나갈 듯이 출렁거리며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 날부터 진 소년에게 침몰선은.. 2022. 5. 18. 36.줄 줄 - 이청준 1 "여 봐." - "여 봐, 자?,, - 나는 여자를 버려 두고 담배에다 새로 불을 붙였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는 여자가 먼저 약속을 어겨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 한결 더 조용해진 것 같다. -빨리 불 끄고 자요. 아까 여자는 슈미즈 바람이 되자마자 재촉을 해 댔다. -이봐, 난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돈주고 사온 게 아니야. 여자는 이불깃을 턱으로 끌어올리더니 한참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혼자 있기가 뭣해서 부른 것뿐이니까 여기서 밤을 지내 주기만 하면 돼. 여자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당신은 좀 이상한 분이군요. -대신 나보다 먼저 자서는 안 돼. 여자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눈을 감아 버렸다. 삼백 원이면 싸다고 생각했다. 몇 번 여자.. 2022. 5. 18.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