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소설390 52.금당벽화 금당벽화 -정한숙 목탁 소리가, 비늘진 금빛 낙조 속에 여운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구릉의 기복을 따라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무성한 숲과 숲, 스며드는 습기로 바위의 이끼는 변함없이 푸른데, 암수 서로 짝지어 어르는 사슴의 울음은, 남국적인 정서로 이국의 애수를 돕는 듯했다. 담징은 바위에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질 않았다. 서녘 하늘은 젖빛 구름 속에 붉은 빛을 머금는가 하면, 자줏빛 구름이 솟구쳐 흐르고, 그것이 퍼져 다시 푸른 바탕으로 변하면, 하늘은 자기 재주에 겨워 회색빛으로 아련히 어두워 갔다. 바위에 기대앉은 담징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동광은 하늘 빛을 닮은 듯, 담뿍 부풀어올랐던 희열의 빛이 잦아들며, 몽롱한 꿈 속에 잠기듯이 흐려졌다. 조용히 자리를.. 2022. 5. 20. 51. 궤도회전 궤도회전(軌道回轉) -조세희 세째 해를 윤호는 조용히 보냈다. 두번째 해의 십이 월과 다음의 일 월을 괴롭게 보냈을 뿐이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그 두 달도 조용히 보냈을 것이다. 아버지는 윤호가 예비고사에서 떨어진 이유를 밝혀내려고 했다. 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해의 예비고사 성적이 이백 육십 칠 점이었다. 그해의 커트라인은 백 구십 육 점이었다. 칠십 일 점이나 더 받고 합격했던 윤호가 다음해에 떨어진 이유를 아버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고 파랗게 질렸다. 아들의 낙방을 반항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한 아버지를 윤호는 불쌍하게 생각했다. 아버지의 매를 피하지 않았다. 화가 난 아버지는 철사로 아들을 때렸다. 아버지는 지난 몇 달 동안 남의 나라의 묵은 법을 꺼내 밑줄을 그었다, .. 2022. 5. 20. 50. 고압선 고압선(高壓線) -조선작 월급장이 십 일 년만에 내 집을 하나 장만하게 된 감격스러움이야 어찌 필설로 다 이르겠는가. 내 집 갖기 작전의 순 자기자본 일금 일백 삼십만 원의 거금을 만들기까지 겪어 온 파란곡절은, 아내 말마따나 참말 치사하고 더러워서 돌이켜보고 싶지도 않다. “이러면서도 살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사는 것도 산다고 할 수 있어요?” 하고 말하며 아내는 곧잘 무참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말은 그랬지만 그래도 아내는 기를 썼다. 심지어는 시장을 보아 올 때 물건을 담아 온 허름한 봉투까지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강냉이나 번데기랑 바꾸어서 아이들의 간식비를 절약했을 정도니까, 아내의 그 냉혹스러우리만치 야박한 규모에는 나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욕탕엘 가도 비누를 가지.. 2022. 5. 20. 49. 고고 고고 (孤高) -정비석 -春坡先生 末年記- 책 몇 권과 원고용지 몇 첩을 마련해 가지고 절간으로 찾아들어온 그 날 저녁 저녁상을 물린 뒤에 산보차로 법당(法堂)뜰 앞에 썩 나서자 산들바람이 대령이나 했던 것처럼 후유 가슴에 안겨 들어서 나는 제물에 얼굴을 번쩍 들며 뜻하지 않고 『가을!』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팔월 가위를 지낸 지도 이미 열흘――음력은 구월 머리로 접어들려는 시절이 시절이라 수목은 벌서 단풍에 물들어 산 전체로가 크낙하고 다부지게 핀 꽃송아리처럼 불그레하다. 어디서 불려오는지 나뭇잎 한 조각이 뱅글뱅글 바람에 따라 허공에서 맴을 돌며 법당 뜰 앞에 내려 앉는다. 맞은 산 봉우리에는 상기 노을이 찬연한데 이 용흥사(龍興寺)에는 이미 구석구석에 모색(暮色)이 창연하다. 일 년을 두루 가.. 2022. 5. 20.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 2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