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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90

27. 아버지의 땅 아버지의 땅 -임철우 쫓겨가는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트럭은 저만치 들판 가운데로 난 황톳길을 따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노면에서 바퀴가 튀어오를 때마다 덜컹대는 쇳소리가 들려왔고 꽁무니로 부옇게 마른 먼지가 피어올랐다. 덮개 없는 트럭의 뒤칸에 홀로 쭈그려 앉은 채 실려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유난히도 자그맣게 오므라들어 있어 보였다. 뒤칸에 적재된 알루미늄 식깡들이 이따금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금속성의 광선을 되쏘곤 했다. 풀잎들이 저마다 윤기를 잃어가고 있는 들녘과 차츰 잿빛으로 퇴색해가기 시작하는 야산의 정지된 풍경 속에서 그것은 안간힘을 쓰며 집요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단 하나의 운동체였다. "더럽게 운도 없는 녀석이군 전입해온 지 보름만에 초상을 치르다니." 바지를 까내리고 오줌발.. 2022. 5. 18.
26. 시간의 문 시간(時間)의 문(門)- 이청준 ―一 柳宗悅 遺作寫眞展 80년 9월 19일부터 23일까지 신문회관 전시실 퇴근 준비를 끝내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전시회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본다. 며칠동안 기다리고 별러온 일이다. 하면서도 벌써 사흘째나 참관을 미뤄온 전시회다. 오늘이 21일이니까 전시회는 이틀 전서부터 시작되고 있을 터. 아니 오늘을 넘기고 나면 종람일을 이틀밖에 남기지 않는다. ―― 오늘쯤은 가 봐야지. 하지만 마음을 작정하고 나서도 나는 얼핏 자리를 일어서지 못한다. 물러앉았던 걸상을 다시 끌어 붙이고는 잠시 뒤 전시장에서 보게 될 유종열 선배의 사진들에 대한 나의 기대를 한번 더 가눠본다. 개장 첫날 참관을 미룬 것은 전시회의 소식이 내겐 그만큼 뜻밖이고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유선배의 갑작스런.. 2022. 5. 18.
25. 선학동 나그네 선학동 나그네 -이청준 남도 땅 장홍에서도 버스는 다시 비좁은 해안 도로를 한 시간 남짓 달린 끝에, 늦가을 해가 설핏해진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종점지인 회진으로 들어섰다. 차가 정류소에 멎어 서자, 막판까지 넓은 차칸을 지키고 있던 칠팔 명 손님이 서둘러 자리를 일어섰다. 젊은 운전 기사 녀석은 그새 운전석 옆 비상구로 차를 빠져나가 머리와 옷자락에 뒤집어쓴 흙먼지를 길가에서 훌훌 털어 대고 있었다. 사내는 맨 마지막으로 차를 내려섰다. 차를 내린 다른 손님들은 방금 완도 연락을 대기하고 있는 여객선의 뱃고동 소리에 발걸음들이 갑자기 바빠지고 있었다. 사내는 발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배를 탈 일이 없었다. 발길을 서두르는 대신 그는 이제 전혀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한동안, 밀물이 차 오르는 .. 2022. 5. 18.
24.서편제 서편제-이청준 여인은 초저녁부터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줄창 소리를 뽑아대고, 사 내는 그 여인의 소리로 하여 끊임없이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견디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북장단을 잡고 있었다. 소리를 쉬지 않는 여인이나, 묵묵히 장단 가락만 잡고 있는 사내나 양쪽 다 이마에 힘든 땀방울이 솟고 있었다.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 한적한 길목 주막. 왼쪽으로는 멀리 읍내 마을들을 내려다보면서 오른쪽으로는 해묵은 묘지들이 길가까지 바싹바싹 다가앉은 가파른 공동 묘지-그 공동 묘지 사이를 뚫어 나가고 있는 한적한 고갯길목을 인근 사람들은 흔히 소릿재라 말하였다. 그리고 그 소릿재 공동 묘지 길의 초입께에 조개 껍질을 엎어놓은 듯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들앉아 있는 한 작은 초가 주막을 사람들은 또 너나없이 소릿재 .. 2022.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