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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673

여의도 서정 여의도 서정 / 이종화 한강은 수만 년의 세월을 잇고 이어 느릿느릿 유유히 흘러간다. 시원(始原)에서 달려왔을 물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강바닥을 핥으며 지나는 이곳, 바로 여기가 섬 아닌 섬, 여의도다. 강은 아름답다. 흘러가기에 아름답다. 강을 보면 흘러가는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다. 잠시 내 손에 쥐어졌다 날아간 모든 것을, 순간과 그 순간들이 모여 이룬 세월. 사랑과 미움 그리고 이젠 그 어느 쪽도 아닐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 가끔씩 찾아왔던 기회란 이름의 위기와 위기로 불렸던 진정한 기회, 그리고 이제는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는 모든 것마저 너그럽게 인정하는 내가 된다.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강, 그건 그저 ‘흐름’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 강가에 서면 흐름과 다른 ‘흘러감’의 뉘앙.. 2023. 6. 10.
구름 위의 산책 구름 위의 산책 / 김미원 온갖 꽃들이 아우성치며 피어나고, 꽃이 진 자리에는 연둣빛 새순이 제 살을 키워가던 화창한 봄날. 지인의 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려고 성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봄기운이 내 몸까지 전해져 다소 높을 것 같은 7cm 하이힐을 신고 발걸음도 경쾌하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었다. 조금 지나자 오랜만에 신은 높은 구두 때문인지 무릎이 시큰거리는 듯했다. 이제 이런 신발도 못 신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지하철역 하행 에스컬레이터 틈에 뾰족한 구두굽이 끼어 헛발질을 하다가 그만 넘어져 버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지만 나는 창피한 느낌보다는 이제 멋스러운 신발과는 안녕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팠다. 집에 돌아와 신발장을 열어보니 굽 높이가 거의 다 5cm가 넘는 것들이었.. 2023. 6. 10.
감실부처, 제행무상을 역설하다 감실부처, 제행무상을 역설하다 /신홍락 (제13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금상 수상) 시큰둥한 첫 만남이다. 왕방울 눈을 지닌 감실부처를 건성으로 일별하고 돌아 나오는 뒤통수가 간지럽다. 향토 사학자 수준으로 설명하는 친구의 유식에 주눅 들어 딴청 부린 것이 부끄러워 발길을 멈춘다. 뒤돌아서 두 손을 모은다. 감실 안을 비추는 햇빛에 반사된 희미한 미소가 찌뿌둥한 마음 근육을 풀어준다. 민망한 여운이 오래 머문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전각 안쪽을 삐끔삐끔 들여다보고는 뜨락만 어슬렁거렸다. 찰나를 견디지 못하는 삿된 생각이 들락거리니 낯부끄러운 염치에 법당 주위만 맴돌았다. 남의 손에 이끌려 까치발로 들어가서도 지은 업의 무게에 눌려 조아린 육신을 일으킬 힘이 없음을 핑계 삼았다. .. 2023. 6. 10.
식리 식리(植履) / 김지희 뒤축 닳은 시간들이 가지런하다. 오십 년은 족히 되었을 신발들이 늙은 병사들처럼 사열해 있다. 발목이 긴 군화도 있고 경찰 단화도 여러 켤레다. 그중에서도 신문지를 푸지게 먹고 배가 볼록한 검정 구두가 제일 상석이다. 마지막 외출이 언제 적이었던가. 먼지에 거미줄까지 잔뜩 뒤집어쓰고 식리처럼 다락에 박제되어 있다. 식리(植履)는 장례에 쓰는 장식용 신발이다. 삼국시대 고분인 왕릉에서 주로 출토된다. 경주 대릉원 천마총은 신라시대 왕릉으로 추정되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금관, 금제관모, 금제과대 등 국보급 유물이 발굴되었다. 석담을 돌려 시신을 안치한 목관과 상면 공간에 부장품인 껴묻거리가 진열되어있다. 생전에 쓰던 물건을 고인의 시신과 함께 수장했는데 그중에는 금동판에 정교하게 무늬가.. 2023.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