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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203

46.양잠설 양잠설(養蠶說) -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어려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 이 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여 엿빛을 띠게 된다. 그 때부터 식욕이 감퇴한다. 이것을 최면기 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은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 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 2022. 1. 6.
45. 아내의 수술 아내의 수술 / 박목월 아내의 수술날이다. 일찍 어린것들을 깨워 아침을 먹이기로 했다. 어린것들도 몹시 긴장한 얼굴이다. 어린것들 아침이나 먹여 놓고 나는 병원에 갈 예정이었다. “엄마, 오늘 수술하지?” 국민학교 2학년 꼬마와 중·고등학교 큰것들도 이상스럽게 행동이 정숙하고 옆방에 어머니가 누운 것처럼 말소리가 조용하다. 7시 벨이 울렸다. 병원에서 아내가 건 전화다. 고등학교 다니던 맏딸이 받았다. “동생들 잘 간수하라.” 는 부탁이다. 그리고는 남규, 문규, 신규 한 사람씩 전화 앞에 불러내어 그들 하나하나에 당부를 한다. 가슴이 선뜩하다. 수술하기 전에 자기로서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아이들의 음성을 들으려는 뜻이다. “당신예요? 곧 와요. 벌써 몽혼 주사를 놨어요. 여덟시 반에 수술실로 들어간대.. 2022. 1. 6.
44. 심춘순례 서 심춘순례 서(尋春巡禮 序) 최남선 ​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문학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서 어떠한 풍우(風雨)라도 마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한 작은 학도(學徒)요, 우리 정신의 한 어설픈 탐구자(探究者)로서, 진실로 남다른 애모(哀慕)와 탄미(歎美)와 함께 무한한 궁금스러움을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에 가지는 것입니다. 자갯돌 하나와 마른 나무 한 밑동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흥미(興味)와 또 연상(聯想)을 자아냅니다. 이것을 조금씩 색독(色讀)이나마 하게 된 뒤부터 우리 나라가 위대한 시의 나라, 철학의 나라임을 알게.. 2022. 1. 6.
43. 설 설 전숙희 ​ 설이 가까워 오면, 어머니는 가족들의 새 옷을 준비하고 정초 음식을 차리기를 서두르셨다. 가으내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매만진 명주로 안을 받쳐 아버님의 옷을 지으시고, 색깔 고운 인조견을 떠다가는 우리들의 설빔을 지으셨다. 우리는 그 옆에서, 마름질하다 남은 헝겊 조각을 얻어가지는 것이 또한 큰 기쁨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살림에 지친 어머니는 그래도 밤늦게까지 가는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새 옷을 지으셨다. 우리는 눈을 비비며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 홀로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잠든 아기는 어머니가 꿰매주신 바지를 입고 산줄기를 타며 고함도 지를 것이다.우리는 설빔을 입고 널 뛰는 꿈도 꾸었다. 설빔이 .. 2022.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