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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203

42. 청포도의 사상 - 청포도의 사상 - 이효석 육로로 수천 리를 돌아온 시절의 선물 송이의 향기가 한꺼번에 가을을 실어 왔다. 보낸 이의 마을을 갸륵히 여기고 먼 강산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눈앞의 가을에 눈을 옮긴다. 남창으로 난 서탁이 차고 투명하고 푸르다. 갈릴리 바다의 빛도 그렇게 푸를까? 벚나무 가지에 병든 잎새가 늘었고 단물이 고일 대로 고인 능금 송이가 잎 드문 가지의 젖꼭지같이 처졌다. 외포기의 야국(들국화)이 만발하고 그 찬란하던 채송화와 클로버도 시든 빛을 보여간다. 그렇건만 새삼스럽게 가을을 생각하지 낳은 것은 시렁 아래 드레드레 드리운 청포도의 사연인 듯싶다. 언제든지 푸른 포도는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를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까닭이다. 익은 푸른 포도알이란 방울 방울의 지혜와 같이도 맑.. 2022. 1. 5.
41. 메모광 메모광 이하윤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수첩도, 일정한 메모 용지(用紙)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종이이거나 ―원고지도 좋고, 공책의 여백도 가릴 바 아니다.― 닥치는 대로 메모가 되어, 안팎으로, 상하 종횡 (上下縱橫)으로 쓰고 지워서, 일변 닳고 해지는 동안에 정리를 당하고 마는지라, 만일 수첩을 메모지와 겸용한다면, 한 달이 못 가서 잉크투성이로 변할 것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시문(詩文),.. 2022. 1. 5.
40. 잡초처럼 잡초처럼 이영도 내가 산다는 것! 곱게 산다는 것! 그리고 곱게 죽는다는 것! 이 앞으로의 남은 삶과 죽음에 임할 마지막 나의 자세의 다스림이 오늘날 애틋한 내 생애의 오직 하나의 진실일 것이며 또 내 목숨을 가치할 엄연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마루에 나 앉으면 뜨락 가득 덮는 감나무 그늘 - 그 윤택이 질질 흐르는 푸른 잎들이며 무화과 열매의 소담한 모양이며 수국, 나리꽃! 모두가 싱싱하면 싱싱한 대로 초졸한 대로 저마다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여실히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 다투어 자랑하는 꽃 그늘 아래 뽑혀도 한결같이 돋아나고 엉켜붙어 스스로 비단결 같은 초록을 이룬 잡초의 생리는 자칫하면 고독의 골짜기로 떨어지려는 오늘 나의 의지를 지탱하여 주는 하나의 힘의 표현이다. 형형색색의 모양과 생태! 아무.. 2022. 1. 5.
39. 조그만 기쁨 조그만 기쁨 이양하 와우산에 첫눈이 왔다. 하늘에는 달이 있고 엷은 구름이 있다. 촌설도 못되는 적은 눈이지만 눈이 몹시 부시다. 강 건너 시장위에도 눈이요 멀리 흐미하게 보이는 관악에도 눈이다. 하늘을 반나마 차지한 엷은 구름도 달빛을 받아 눈같이 희다. 온 하늘에 눈이 오고 온 땅에 눈이 왔다. 라라라트랄 라라라.... 기다란, 흰 수염을 휘날리는 와우산 소나무를 올려다 보고, 달리는 달과 구름을 쳐다 보고, 달이 숨으면 멀리 관악산을 바라보고, 라라라트랄 라라라.... 나는 허둥지둥, 내 걸음은 바쁘고 내 마음은 기쁨에 뛰논다. 초라한 내 집이 오늘은 조금도 욕되지 아니하다. 산허리에 외롭게 서 있는 일간 두옥. 아니 내 집도 이렇게 아담하고 아름다웠던가. 여기도 눈이 쌓이고 달빛이 찼다. 문은 으.. 2022.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