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5105 새와 실존 새와 실존 / 최민자 산비둘기 한 마리가 베란다 난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땅콩 몇 알을 접시에 놓아두었던 것인데 다른 놈들은 오지 않고 이 녀석만 온다. '새대가리'가 사람 머리보다 기억력이 나은 건지 내가 깜박 준비를 못했을 때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난간을 서성댄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새가 브런치를 즐기는 동안 나도 천천히 차 한잔을 들이켠다. 새들에게는 역사가 없다. 물고기도 그렇다. 새나 물고기가 종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부리나 주둥이로 길을 내며 다니기 때문이다. 목구멍을 전방에 배치하고 온몸으로 밀고 다니는 것들은 대체로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앞장서 달리는 입의 궤적을 지느러미나 깃털이 흐트려 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새들을 .. 2022. 12. 18. 방탄소년단을 보며 방탄소년단(BTS)을 보며 / 김상영 자식에게 한 달 수입이 얼마냐고 묻기는 쉽지 않다. 밥은 먹고 살 형편인지 확인하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인천 사는 딸네 부부가 오자 살만하냐고 에둘러 물었다. 둘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부모 앞에서 경박하게 입을 놀리지 말자고 약속이나 한듯했다. 딸내미가 학원 선생을 그만둔 지 제법 되었다. 대신 권투도장에서 근력운동을 하고 수영도 즐기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엔 비싼 요가복을, 그것도 여러 벌 샀다는 소문이 들렸다. 사위와 미주알고주알 터놓고 사는 아내가 흘려준 말이다. 손주가 들어서지 않아 사돈댁에 미안하긴 하지만 잘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결혼 전엔 사위를 변변찮게 여겼다. 연예기획사에 다니면서 허드렛일을 하는 정도로만 알았다. 딸내미조차 저.. 2022. 12. 16. 말하고 싶은 눈 말하고 싶은 눈/반숙자 우리집 파수꾼 미세스 짜루는 해마다 한번씩 출산(出産)을 한다. 정월 대보름쯤이면 휘영청 찬 달빛 아래 연인을 찾아온 미스터 견(犬)공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앉아서 사랑의 세세나데를 부른다. 이상스러운 것은 이 외딴 터에 있는 암캐가 발정한 것을 동네 개들이 어떻게 아느냐 하는 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후각이 고도로 발달되어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니 희한한 일이다. 한 두 마리는 으레 침식을 같이 하다시피 와 살기도 하고 어쩐 날에는 대여섯 마리까지 원정을 와서 서로 싸우고 어울리고 야단들이다. 세상에는 못된 사람을 욕을 할 때 개 같은 *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말이 별로 맞는 말이 아닌 성 싶다. 개를 욕에 쓰는 이유는 개방된 섹스 때문인 듯 싶은데 장소와 때를 .. 2022. 12. 16. 늙음에 관한 보고서 늙음에 관한 보고서/ 장미숙 툭, 툭, 소리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소리는 허공에 깊은 파열음을 내고 주위로 퍼진다. 헐거워진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집요하게 고요를 흔든다. 수도관이며 수도꼭지도 처음에는 흐름과 차단이 완벽했을 테지만 세월은 느슨함을 용인했나 보다. 시간의 흐름이 가져온 느닷없는 반란이다. 샤워기도 마찬가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이음새 아래 방울방울 물이 맺혀 있다. 청각과 시각에서 먼, 문을 닫아 버리면 그만인 곳이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어딘가 틈이 생긴 게 분명하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것들은 불편함과 성가심을 낳는다.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멈춤의 기능과 멈추지 못함의 혼란 같은 것일까. 흘러야 할 때와 흐르지 말아야 할 때의 경계가 사라지면 심연.. 2022. 12. 16. 이전 1 2 3 4 5 6 7 8 ··· 2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