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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5105

대청, 골목을 모으다. 대청, 골목을 모으다 / 이춘희 - [2022년 경북문화체험 입선] 짱짱한 여름 햇살이 마을 구석구석에 내려앉는다. 성안숲의 소나무는 강렬한 빛의 기운을 받아 기개에 날개를 달았다.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양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을 뿌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길게 이어진 돌담길이 굽은 나무줄기 같다. 뿌리가 준 양분을 곁가지로 배달하는 줄기처럼 골목길은 이 집 저 집으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날랐으리라. 돌담을 이루는 돌의 모습이 가지가지다. 길쭉한 돌과 납작한 돌, 둥근 것과 모난 것, 머리보다 큰 돌과 주먹보다 작은 돌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을 붙잡고 있다. 이런저런 사람이 만나 서로 보듬고 감싸며 살아가는 한밤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까.. 2022. 12. 4.
겨울 이야기 겨울 이야기 / 김애자 산촌의 겨울은 길고 지루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은 적막하고, 들은 허허로우며 거멀장처럼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햇살조차 궁핍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춥고 쓸쓸지 않은 게 없다. 이래서 눈 내리는 날을 기다리게 된다. 진종일 눈이 오다가 그치고 다시 흩날리는 날이면 마른 잡목들이 눈꽃을 피우고, 그만그만한 집들도 자욱하게 퍼붓는 눈발에 묻힌다.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저녁연기마저 잠포록한 기압의 무게에 눌려 추녀 밑으로 스멀스멀 내리깔린다. 이런 저녁 답엔 검둥이란 놈만 신바람이 난다. 공연히 눈 속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혀를 내밀어 맛을 보기도 한다. 그도 심심하면 집 앞과 장독대로 길을 내는 주인에게 따라붙어 말썽을 부린다.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 2022. 12. 4.
책상 책상 - 박소현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에 책상 하나가 버려져 있다. 가죽 상판에 곡선으로 된 다리에는 섬세한 조각이 새겨진 고급의 앤티크다. 몇 군데 미세한 흠집은 있으나 조금만 손질하면 한참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가 이 멋진 책상을 버린 것일까? “쓸 사람이 없어 내 놓으니 필요하신 분은 가지고 가세요.” 쓸 사람이 없다니? 책상 형태로 보아 학식이 깊은 학자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썼을 것 같은데, 책상 주인이 어디 멀리로 가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새로 입주한 아파트라 새집에 어울리지 않아 버려진 것일까? 일주일 동안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면 폐기처분 하겠다며 단정한 손 글씨로 메모까지 붙여 놓았다. 삶의 현장에서 퇴출된 노동자처럼 책상의 품새가 애처롭다. 저 책상도 한때는 성공한.. 2022. 10. 13.
팔자를 생각하다 팔자를 생각하다 - 정성화 가져가야 할 짐들을 거실 가득히 늘어놓은 채, 남편은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있다.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다시 떠난다는 게 실감 난다.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는지 닫히지 않는다고 남편이 말한다. 그를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이 염력을 부린 듯하다. 남편은 파도치는 바다로 고생하러 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다. 뭘 사다 주면 좋겠느냐고 자꾸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드는데 눈물이 또 주책을 부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낮에 사 온 고등어를 꺼낸다. 마음이 허둥댈 때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게 낫다. 고등어 배를 갈라 내장을 훒어내고 소금을 치면서, 내 속에도 누가 이렇게 소금을 쳐주었으면 좋겠다 싶다. 속이 상하지 않게 한 움큼 뿌려주었으면. 그가 떠난 지 .. 2022.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