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119

57. 산촌여정 山村餘情 · 成川 기행 중의 몇절 · 이상(1935)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지도 20여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안오고 체신부(夫)는 이따름 '하도롱'(연두)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오서 가제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만 느낌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 2021. 12. 24.
56. 산정무한 산정무한(山情無限) 정비석 산길 걷기에 알맞도록 간편히만 차리고 떠난다는 옷치장이 정작 푸른 하늘 아래에 떨치고 나서니 멋은 제대로 들었다. 스타킹과 낙카아팬트와 잠바로 몸을 거뿐히 단속한 후, 등산모 젖혀 쓰고 바랑을 걸머지고 고개를 드니, 장차 우리의 발 밑에 밟혀야 할 만이천 봉이 천리로 트인 창공에 뚜렷이 솟아 보이는 듯하다. 그립던 금강으로, 그리운 금강산으로! 떨치고 나선 산장에서는 어느 새 산의 향기가 서리서리 풍긴다. 산뜻한 마음으로 활개쳐 가며 산으로 떠나는 지완과 나는 이미 진고개에 방황하던 창백한 인텔리가 아니라 역발산 기개세의 기개를 가진 갈데없는 야인 문 서방이요, 정 생원이었다. 경원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 무슨 홀게 빠진 체모란 말이냐? 우리 조상들의 본을 떠서 우리.. 2021. 12. 22.
55. 사치의 바벨탑 사치의 바벨탑 전혜린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의 의존하는 것에서 얻은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게 하고 있다." 여성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간의 사회적 차이와 대립이 완전히 제거된 곳은 없으며 앞으로도 사회 구조의 전적인 변화가 없는 한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몹시 느린 속도로 향상되어 가는 과정에 있고 아직도 .. 2021. 12. 15.
54. 부끄러움 부끄러움 윤오영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가 몸매며 옷매무새는 열 살만 되면 벌서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 2021.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