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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119

7. 게 게 김용준 정소남이란 사람이 난초를 그리는데 반드시 그 뿌리를 흙에 묻지 아니하니 타족에게 짓밟힌 땅에 개결(慨潔)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함이란다. 붓에 먹을 찍어 종이에 환을 친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노릇이리오마는 사물의 형용을 방불케 하는 것만으로 장기(長技)로 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빌어 작가의 청고(淸高)한 심경을 호소하는 한 방편으로 삼는다는 데서 비로소 환이 예술로 등장할 수 있고 예술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사람이 일생을 거의 3분의 2나 살아온 처지에 아직까지 나 자신이 환장인지 예술가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딱하고도 슬픈 내 개인 사정이거니와 되 든 안 되든 그래도 예술가답게 살아 보다가 죽자고 내 딴엔 굳은 결심을 한 지도 이미 오래다... 2021. 12. 10.
6. 거리의 악사 거리의 악사 박경리 작년과 금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의 악사다. 전주에 갔을 때, 아코디언을 켜고 북을 치면서 약 광고를 하고 다니는 풍경에 마음이 끌렸고, 작년 가을 대구에 갔을 때, 잡화를 가득 실은 수레 위에 구식 축음기를 올려놓고 묵은 유행가 판을 돌리며 길모퉁이로 지나가는 행상의 모습이 하도 시적이어서 작품에서 써먹은 일이 있지만, 역시 작년 여름, 진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는 새로 착수한 작품을 위해 자료 수집과 초고를 만들기 위해 여행을 떠났었다. 일 없이 갔었으면 참 재미나고 마음 편한 혼자 여행일 테지만, 일을 잔뜩 안고 와서 그것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하루하루 날만 잡아먹는다고 초조히 생각하다가 답답하면 지갑 하나, 손수건 하나 들고 시장.. 2021. 12. 10.
5. 거룩한 본능 거룩한 본능 김규련 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이쩌면,.. 2021. 12. 10.
4. 거꾸로 보기 거꾸로 보기 법정 침묵의 숲(겨울의 숲)이 잔기침을 하면서 한 꺼풀씩 깨어나고 있다(봄을 맞은 숲에 조금씩 새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의인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함). 뒤꼍 고목나무에서 먹이를 찾느라고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자주 들리고, 산비둘기들의 구우구우거리는 소리가 서럽게 서럽게 들려오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숲을 찾아오는 저 휘파람새. 할미새가 뜰에 내려와 까불까불 가벼운 몸짓으로 인사를 한다. 저 아래 골짝에서부터 안개처럼 보얗게 새 움이 터서 밀물처럼 산허리로 올라오고 있다. 머지않아 숲에는 수런수런 신록(新綠)의 문이 열리리라. 그때는 나도 숲에 들어가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들처럼 새 움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면서 연둣빛 물감을 풀어 내고 싶다. 가리워 둔 속 뜰을 꽃.. 2021.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