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누비아
이것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찾아올지도 모르는 그 '확실한 어떤 감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는 평생을 찾아 헤매도 못 찾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아예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그런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이오와 주의 한 시골 마을 매디슨 카운티의 낡은 목조 다리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품은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시점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태어난 시간과 공간들의 향기와 온도, 사연들을 모두 은밀히 품고 있습니다. 특이한 빨간색 지붕을 가진 낡은 목조 다리와 남자가 고마움의 표시로 여자에게 건넨 작은 독초? 한 다발, 그리고 그날의 우연이 만든 '영원'에 대한 이야기. 이때 남자가 자신과 동행해준 여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전한 그 문제의 독초는 사실 진짜 독초가 아니라 남자가 건넨 작은 풀꽃 다발을 본 여자가 건넨 지극히 가벼운 농담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빨간색 특이한 지붕을 가진 매디슨 카운티의 낡은 목조 다리와 농담 하나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빈말은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유독 더위에 시들어 말라버린 옥수수 잎새가 눈에 띄는 것은 이 곳의 기후 조건이 옥수수 재배에 적합한 전형적인 콘벨트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바로 단 나흘간의 우연이 만든 '영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사랑은 그것이 태어나 자라는 시간의 길이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단 며칠 간의 사랑이 영원으로 남을 수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한없이 빈약하고 초라한 경우도 있으니까요. 사랑의 영속성을 결정하는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결국 서로에게 보낸 감정의 깊이에 달려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가장 깊이있고도 아름답게 그려낸 멜로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이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꼽겠습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작은 다리 위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은 '불륜'이라는 틀로 가두기엔 너무나 미안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빚어낸 단 나흘간의 숙명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에게 '선택'이라는 숙제를 남기며 우리의 삶은 여전히 한 방향을 향해서만 흘러갑니다. 그 선택을 되돌아 과거의 그 순간, 그 장소로 돌아갈 수 없는 숙명적 존재. 현재라는 오늘과 미래라는 내일을 향해서만 나아갈 수 있는 이런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은 이들이 낡은 목조 다리 위에 놓고 온 그 나흘간의 사연에 제3자라 해도 절절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허락합니다. 여기엔 세상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 선택 앞에서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 들어있는 까닭입니다.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생에서 단 한 번도 선택이라는 중압감에 떠밀려보지 않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자들뿐입니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라는 천양희 시인의 시가 오버랩됩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영화는 메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를 지니며 클린트 이스트 우드의 연출 또한 정적이면서도 단 한 번도 지루한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속의 사진작가인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잡지에 실릴 다리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프란체스카가 살고 있는 아이오와 주의 매디슨 카운티라는 한 시골 마을을 방문합니다. 길도 낯설고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는 곳에서 로버트는 길을 잃습니다. 우리의 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한 번도 당도해보지 않은 세계 속에서 길을 잃는 건 비단 로버트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하나의 우연이 운명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우연과 상대의 우연이 겹치는 지점에서 운명은 탄생하고 그 운명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 또 하나의 운명을 낳습니다. 로버트가 길을 잃고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의 집 언저리를 헤매던 그 순간, 프란체스카의 나머지 가족들인 남편과 두 아이는 하필 다른 주에서 개최되던 품평회의 참가 차, 집을 비운 상태였습니다. 딸아이 캐롤라인의 한 살 반짜리 어린 송아지를 그 품평회에 출품했기 때문입니다. 프란체스카의 이런 우연과 로버트의 우연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이들의 첫 이야기가 태어났습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위치를 로버트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온갖 언어를 동원하지만 이 길이 처음인 로버트에게 프란체스카가 설명하는 '어디 누구네 농장'하는 식의 설명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로버트는 그 누구네 농장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프란체스카는 설명 대신 자신이 로버트와 동행하는 길을 택합니다. 어쩌면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프란체스카의 첫 번째 이 결정으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와의 '동행'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어느 날 스친 찰나의 마주침 정도에서 머물렀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의 선택은 하나의 결과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우리 인생을 뒤흔들어놓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로버트의 차로 다리까지 이동하는 길에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이 영화가 얼마나 그 플롯이 충실하게 짜인 영화인지는 이미 그들이 처음 로버트의 차량에서 함께 있는 그 좁은 공간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프란체스카가 미국의 중서부에 자리한 아이오와 주의 매디슨 카운티까지 흘러들어온 이야기. 워싱턴 태생의 로버트가 시카고에서 생활하다가 이혼 후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온 이야기 등 사실 첫 만남에서 주고받기 어려울 수 있는 속 깊은 사적 영역의 이야기까지 로버트의 차량 안에서 모두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희한한 것은 서로를 알고 난 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동안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는 그 순서의 도치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에게 나흘은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일 수도 있으나 로버트와 프란체스카가 서로의 사적 영역까지 공유함으로써 감정적으로 가까워지기엔 오히려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앎 없이 곧바로 사랑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상대를 쟁취하기 위해 달려드는 자유연애주의자나 쾌락주의자들과는 그 결 자체가 다른 점이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갔고 서로의 사연을 공유했으며 짧은 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차별성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인상적인 것은 비단 일생에 단 한 번만 찾아올지도 모를 그 감정에 대한 가장 납득할 만한 서사를 제공하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서도 세련된 방식을 구사합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은 프란체스카나 로버트가 아니라 바로 프란체스카의 아들과 딸, 그리고 그들의 엄마인 프란체스카의 유언 내용을 들고 그들을 찾아온 변호사와 또 한 명의 여성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유언과 엄마가 남긴 유품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딸 캐롤라인은 뜻밖의 중요한? 편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엄마가 생전 남긴 편지였습니다. 사는 동안 남편과 자식에게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을 엄마 프란체스카의 이 사연은 캐롤라인이 발견한 편지 몇 장 속에서 그 나흘간의 내막이 드러납니다. 아들 마이클은 엄마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성을 상대로 펼친 이 기막힌 외도의 진실에 분개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을 겁니다. 그건 비단 마이클뿐만 아니라 그 위치에 놓인다면 우리 누구도 비슷한 감정일 겁니다. 그러나 아들 마이클에 비해 딸 캐롤라인은 조금 더 차분하고 이성적인 편이었습니다. 마이클과 캐롤라인은 엄마가 남긴 의문의 비밀 열쇠가 숨긴 엄마의 유품 속에서 엄마의 지난 시간을 마주합니다. 로버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남긴 세 대의 카메라, 4DAYS라는 제목이 적힌 작은 사진첩 한 권, 그리고 그가 프란체스카에게 남긴 그의 편지, 무엇보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건넨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까지...
프란체스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로버트는 자신의 전 재산 역시 프란체스카에게 상속하는 유언장을 남깁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죽음과 함께 개시되는 그들 두 사람의 공통된 유언.
어쩌면 이 영화의 모든 것은 바로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남긴 바로 그 공통의 유언 내용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죽은 후 화장을 해서 그 두 사람이 처음 동행했던 그 로즈먼 다리 위에서 뿌려달라는 내용. 이들의 사랑이 불륜이라는 단 하나의 명쾌한 단어로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서로를 향해 보인 바로 이 진심 때문입니다. 프란체스카는 죽기 전 자신이 가장 자신다울 수 있는 선택을 위해 굳이 자식들에게 밝히지 않았어도 좋을 로버트와의 이 비밀을 털어놓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진심과 선택이 진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영화는 주로 캐롤라인이 엄마가 남긴 로버트와의 사연을 읽어내려가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프란체스카 역의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 이후의 일입니다. 자식들의 현재 시점에서 소환되는 엄마 프란체스카와 그 엄마가 진실로 사랑했던 한 사람 로버트에 대한 이야기. 영화 내내 화장기 없는 메릴 스트립의 민낯은 화장으로 가려질 수 없는 그녀의 삶에 대한 지극히 원초적인 단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성이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런 케이스를 그녀가 속한 세계와 그 주변인들 혹은 당사자 탓으로 돌리는 그 일차원적인 시선입니다. 프란체스카가 처한 상황은 그 어떤 여성들의 삶보다 오히려 더 평범하고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뭔가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않다거나 소속감이 결여되어 있어서일 거라는 그 예단을 보류해도 좋은 것은 실상 프란체스카의 남편 리처드는 깔끔하고 자상하며 누구보다 착하고 그들은 여느 가정 속 남편과 아내처럼 별 탈 없이 지극히 평범하고도 별 문제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17살, 16살이 된 마이클과 캐롤라인이 이제는 머리가 굵어져 엄마와의 유대 관계가 예전 같진 않다는 점 뭐 그 정도입니다. 로버트 역시 전처와 이혼을 했지만 그는 프란체스카의 아들인 마이클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나쁜 남자의 전형성에서 저만치 비켜나 있습니다. 그는 젠틀하고 따뜻하며 한곳에 정착하지 않은 채 사진작가로서 떠도는 그의 삶에 별 불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이 어느 날 매디슨 카운티의 목조 다리 위에서 남긴 사연은 돌발적인 우연과 우연이 빚어낸 교통사고 같은 우연이 낳은 결과물입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우연에 흔들렸다는 점. 프란체스카의 내면 아래에 잠든 굳어있던 어떤 설렘을 깨웠다는 점. 큰 불만은 없지만 그럼에도 놓쳐버린 그 어느 날의 꿈을 상기시켰다는 점.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런 설렘이 단지 원 나이트 같은 엔조이로서의 무엇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틀어 유일하게 확실한 어떤 감정에 더 다가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로버트를 만나고 이틀째 되던 날 밤, 낮에 프란체스카가 구입했던 원피스는 그녀의 감정이 어떤 지점에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온해 보이는 인간의 내면 아래에는 쉴 새 없이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강물은 그 강을 건너온 자가 깨뜨린 실금 같은 작은 균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인생에서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라는 그런 절대적인 확신은 그 확실한 감정을 알아보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프란체스카나 로버트와 같은 운명적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같은 운명적 결과에 대한 동의와 인정 아래서 운명은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같은 재료를 인풋 해도 나오는 아웃풋의 색깔이나 양상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것은 동일한 상황 아래서 서로 다르게 인지하는 결과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그 어긋남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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