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끌었고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어머니가 태몽(胎夢)으로 용이 승천(昇天)하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현룡(見龍)이라고 아명(兒名)을 지었다. 일설(一說)에는 아버지가 태몽을 꾸고 강릉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주막에 묵게 되었다. 주모가 유혹(誘惑)의 손길을 뻗쳤으나 이양반이 꿈을 생각하고 그 유혹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강릉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주막에 묵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주모의 의사를 물어보니 주모가 이제는 때가 지났으니 소용이 없다고 일화(逸話)가 있다. 과거에 시험을 9번 장원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3세의 서울에서 예안에 퇴계(退溪)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러자 퇴계가 그를 깍듯이 예우했고 제자들에게 큰절을 올리게 했다. 제자들이 의아해하자 장차 해동의 성인이 될 인물이라고 했다. 이틀을 묶고 갔는데 퇴계는 그를 매우 정중하게 예우하고 가르침을 내리기도 했다. 향후에도 서신 등을 통해 교유(交遊)했다고 한다. 그는 선조시대에 임금을 보좌했다. 그가 건의했던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격군심(格群心)이었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것이 있는 데 비슷한 뜻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 제대로 정사(政事)를 펼쳐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을 의미했으리라. 둘째는 청조정(淸朝廷)이다. 조정을 맑게 한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고 정사를 돌보게 한다. 셋째는 입관기(立官紀) 관료의 기강(紀綱)을 바로 세운다. 또는 군기를 바로 잡는다. 넷째는 고번병(固藩屛) 국경을 견고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한다. 다섯째는 고민생(顧民生) 일반 백성의 경제생활을 윤택하게 만든다. 오늘날로 얘기하자면 경제, 국방, 행정을 두루 살펴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해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유지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의 경영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창업(創業)이고 둘째는 수성이(守成)고 셋째는 경장(更張)이다. 경장은 요즘으로 치면 개혁(改革)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송나라시대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 왕안석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 사람이 모셨던 왕이 신종이었다. 어느 날 신종이 물었다고 한다. “100여년을 송나라 왕조가 무사하게 잘 지내왔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라고 말이다. 그러자 왕안석이 “며칠 말미를 주시면 제가 그것에 대한 답변을 올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올리게 된 글이 본조백년무사차(本朝百年無事箚)란 글이라고 한다. 그 속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태조(太祖)이래로 많은 성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조, 태종, 헌종 등 성군이 줄지어 나왔고 그러므로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둘째는 왕조를 멸망시킬만한 강력한 외적(外敵)이 없었다. 조선(朝鮮)도 그런 것이 그대로 합당(合當)하다 할 만큼 큰 외적의 침입(侵入)이 없었다. 물론 1636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있었지만 청조도 더 이상 조선을 건드리지 않았고 왜구도 더 이상의 노략질이 없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조선에 간여(干與)할 겨를이 없었다. 또한 나라를 세운 후에도 내 · 외침에 대한 방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본의 경우는 막부정권에서 유교(儒敎)를 정치적 이념으로 삼았고 이웃나라를 괴롭히는 일 또는 외국과의 왕래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를 ‘사코쿠’ 라고 했다. 이율곡이 섬겼던 임금 선조는 자신을 용군(庸君)이라고 했다. 그는 율곡의 건의를 잘 듣고 수긍했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길만한 결단력을 갖지 못했다. 지도자(指導者)란 무엇보다도 과감한 결단력을 가져야 했는데 선조는 그렇지 못했다. 10만양병설을 주장해서 팔도에 만 명씩 그리고 중앙에 2만의 정예군을 육성해야 한다고 했지만 공염불(空念佛)이 되었다. 율곡은 임진강가에 정자를 지었다. 화석정이라고 이름지었다. 기름걸레로 청소를 하게 하고 봉투를 하나 비치시켜놓고 먼 훗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읽어보라고 했다. 그 속에 있었던 것은 그 정자를 불태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선조가 난을 피해 몽진을 감행하던 때였다. 어두컴컴한 강가에서 뱃길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던 상태였는데 정자가 불타는 동안 환한 불빛을 등대삼아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침략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적 흐름 임금의 몽진 등까지도 예상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전해지는 얘기는 이항복과 관련된 것이다.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을 때에는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준비하라는 말을 남겼다” 라고 한다. 이항복이 임란을 당해 명나라의 원군이 오게 되자 사절로 나가 접견을 하는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 슬펐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 때 이이의 말이 생각이 났단다. 그래서 고춧가루 수건으로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게 되었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율곡은 구사(九思)와 구용(九容)이라는 것을 남겼다. 구사는 시사필명, 청사필총, 모사필공, 색사필온, 언사필충, 사사필경, 의사필문, 분사필란이 그것이다. 그 뜻은 볼 때는 환히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진실 될 것을 생각하고, 길할 때는 조심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날 때는 물어볼 것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곤란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이 생기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용은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고 손은 공손하게 가지며, 눈은 바르게 뜨며, 입은 다물고 있으며, 말소리는 조용히 하며, 머리는 곧게 들며, 숨소리는 정숙하게 하며, 서있는 모습은 의젓해야하며, 얼굴빛은 위엄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은 격몽요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죽자 3년을 시묘하였다. 그리고 불문에 귀의해서 1년동안 불법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환속해서 정치를 하게 되었다. 숱한 건의를 했고 개혁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가 불문에 귀의 했던 부분이 반대정파들에 의해 공격의 표적으로 화했고 그것이 그의 약점으로 작용되기도 했다. 그는 이순신과도 친척관계에 있었으나 서로 간에 알지는 못했던 듯하다. 고약한 서모를 만나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지극정성이었다고 한다. 그가 죽고 나자 선조는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그렇게 슬퍼했다고 전해한다. 그가 죽고난 후에 그의 아내와 종이 왜란을 겪으면서 겁탈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자결하는 일이 일어났다. 누가 율곡의 아내이고 시종인지를 구분할 수 없어 같이 합장(合葬)을 하게 되었다. 저서도 여럿 남기고 후학들의 표상이 되었던 유학의 거두였다. 자경문(自敬文)을 남기기도 했다. 자신을 흠모한 어린 몸종에 대해서도 군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천재로 태어나 사색당파(四色黨派)를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서인으로 몰렸다. 너무나 훌륭했고 보배로운 존재였으나 그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남았다.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픔을 견디며 격동기를 겪었던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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