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관 30주년 기념식장에서
얼마 전 휴일에 임관 3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서울 양재동에 소재해 있는 K 호텔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1983년6월11일에 임관을 했으니 30여 성상(星霜)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제는 다 중늙은이가 되어 머리도 희끗희끗해졌고 체중도 많이 불었으며 세월이 흐른 것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변모된 모습이었다. 한 시간여의 기념행사를 치렀고 조금 후에는 저녁만찬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순서는 메기병장으로 유명한 개그맨 이상운의 진행으로 여흥이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버스로 올라온 사람들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듯했다. 부산에서 올라온 이들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순천에서 올라오기도 했고 멀리 해외에서 오기도 했었다. 600여명이 되었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이제는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의 경륜(經綸)이 쌓인 것으로 보였다. 대상자는 30년 전에 임관했던 학사장교 3기들이었다. 보병 900여명 그리고 특과병과도 500명 정도였다. 대상자들 천4백 명 중에 30%수준이 참여를 한 것이었다. 식장에서 등록을 하고 명찰을 받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동기들을 만났다. 박지점장도 동부인해서 왔다. 차부장은 오지 않았다. 이본부장도 오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만날 줄 알았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부산에서 김창범이 동부인해서 왔다. 충남에서는 천규와 은인, 병규가 왔다. 강원에서는 건영이가 왔다. 부산에서 박성일이라는 이가 왔다. 특과병과였다. 인사를 나누었다. 농협직원 출신끼리 모여서 사진을 한 장 찍기도 했다. 전북 고창에서 교장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이재천도 왔다. 서울시 장학사로 있는 송군도 왔다. 이교장은 30주년 작품집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후보생 시절의 중대별로 모였다. 중대별로 테이블이 두 개씩 배정되었다. 자리가 모자라 의자를 가져다 앉기도 했다. 6시부터 시작된 기념행사는 7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고 식사를 하고 다시 또 여흥시간이 이어졌다. 가수도 나왔고 소프라노도 있었다. 동기생들의 장기자랑도 있었다. 내가 쓴 책들을 나눠주기도 했다. 금방 바닥이 났다. 임사장은 안동소주를 엄청나게 풀었고 찬조했다. 다행히 독한 것이 아니고 소주 수준의 알콜 도수였다.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편도 아니었다. 아들 며느리가 학사출신인 가족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외국인 사위를 동반하기도 했다. 축사는 행자부장관과 국회의원 등이 했다. 축사가 이어지고 동영상으로 임관 당시의 모습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단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같은 시기에 임관이라고 볼 수 있는 ROTC22기 동기회회장의 축하영상 메시지도 있었다. 현역으로 스타가 된 이는 보병에서 1명 또 특과병과에서 1명이 있어 두 명이 있었다. 보병인 정준장은 하얀색 정복을 입고 참석했다. 선배들이 못 이룬 장성의 꿈을 이룬 자랑스러운 3기이기도 했다. 사진을 여러 장 찍기도 했다. 여흥 행사 중간에는 군번의 대결도 있었다. 제일 빠른 군번의 해당자도 있었고 제일 늦은 군번의 동기생도 있었다. 모두들 30여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어렵고 힘들게 살아왔던 세상살이를 회상하며 깊은 감회에 빠져들기도 했다. 어떤 이는 23년을 군 생활을 한 동기생도 있었다. 이제 사회에 나온 지 7년 정도였다. 아직 손자를 본 정도까지는 없었지만 이제 10년만 지나면 거의 다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군 생활을 처음 같이 시작했던 702특공연대 동기생도 셋이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모두 6명이었는데 50%수준의 참여였다. 고등학교 동기생 등은 넷이었는데 셋이 참석을 했다. 유력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이들도 있었고 성공과 부를 거머쥔 이들도 즐비했다. 대부분은 월급생활자로 지내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공직에 있는 이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 동기회 회장은 우스갯소리로 치사를 했다. 4곱하기 7은 27이라는 똑똑한 이와 20이라고 했던 멍청한 이가 사또 앞에 가서 서로 주장을 했단다. 그러자 사또는 27이라고 주장한 똑똑한 이를 곤장을 쳤다고 한다. 왜냐하면 멍청한 이와 그런 것을 가지고 다투면 같이 멍청해진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했다. 사회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이로 다 성장 발전해 있는 듯 보였다. 교육계로는 장학사도 있었고 교장도 더러 있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이도 있었다. 대학교수로 있는 이도 있었고 세계 곳곳에서 주름을 잡고 있는 이도 있었다. 동기생들의 찬조도 엄청났고 행운권 추첨에서는 상당한 것들이 선사(善事)되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았던 박지점장은 골프백에 당첨되어 횡재(橫財)를 하기도 했다. 동기생 모두가 흥분의 도가니였고 감격의 순간을 보내는 듯 여겨졌다. 7개월여 동안 교육을 받으며 동고동락했고 40개월 정도의 군 생활을 통해서 진정한 젊은 사관으로 거듭났던 때를 반추하며 이제는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린 그날들을 추억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고교졸업 30주년 기념 홈카밍데이가 생각이 났다. 600여명의 동기동창들 중에서 200여명이 1박2일간의 행사를 같이 했던 때와 대동소이한 느낌이 들었다. 향후 10년이 지난 후에는 40주년 행사가 개최될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개최가 된다면 훨씬 원숙한 모습으로 예전을 추억하며 회상하는 날이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마지막에는 ‘학사여 영원하라’ 라는 학사가를 부르며 식이 끝났다. 얼굴의 피부가 세 번 벗겨질 때까지 뛰고 달리고 훈련받았던 아득한 시절이 아스라이 새롭게 다가와 가슴에 안기는 듯했다. 문집도 책으로 되어 나와 있었다. 회상록 58편이 실려 있다고 했다. 임관 30주년 기념모자도 주어졌다. 모두들 못다 푼 회포를 뒤로 각자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국제신사로 불렸고 5만촉광의 다이아몬드를 달기위해 불굴의 투지와 사명감으로 불탔던 30년 전의 그 초심으로 되돌아가 다시 한 번 생의 용광로를 용솟음치게 하는 그 원석의 무한 에너지를 체득한 날이기도 했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으나 그 때의 그 기백과 포부는 그대로 가슴속에 숨쉬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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