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봉을 찾아서
휴일이면 언제나 집 뒤의 국사봉을 찾았다. 조그마하고 야트막한 뒷산이 국사봉이다. 어느 휴일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곳에 올랐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곳에서 기상천외한 장면을 목격했다. 정상 주변으로 여러 운동기구들이 놓여있었고 수목들도 즐비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의 수목에서 탐스럽게 생긴 이름 모를 꽃을 발견했다. 손으로 닿기 힘든 위치에 있었지만 핸드폰으로 그 모습을 찍을 수는 있었다. 참 예쁜 꽃이었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도 충분해보였다. 그렇게 꽃을 보며 기뻐했고 흐뭇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국사봉을 찾았다. 그런데 그 꽃이 있어야 할 위치에 꽃은 사라져 버렸다. 꽃이 질 때가 된 것이리라 지레 짐작하고 체념하는 순간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꽃은 인근의 다른 수목에 한송이씩 흩어져 꼽혀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때 보았던 꽃은 생화가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조화였던 것이다. 참으로 인간의 장난스러움에 혀가 내둘려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고 황당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허망한 느낌이 들도록 꽃을 가지고 장난을 칠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희롱을 당한 듯해서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예전에 오랫동안 살았던 곳에는 장군봉이란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정상부근에 드넓은 공터가 있어 아이들과 공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 국사봉은 오로지 봉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을 만한 공간 밖에 없었다. 주변에 의자도 몇 개 있어 등산객을 위한 쉼터로써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간단히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들도 설치되어있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가볍게 운동을 할 수도 있었다. 국사봉의 중간 능선 길로는 능선을 따라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쭉 이어져 있었다. 비닐로 가려진 곳의 공간에서는 어르신들이 바둑 등을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간혹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이들도 만날 수 있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주말에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대부분 상도동 또는 신대방동 주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얘기도 전해져온다. 국사봉의 국사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된다. 하나는 국사(國事)로서 나라의 일을 의미한다. 이것이 양녕대군이 국사봉에 올라 나라 일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국사(國師)로서 조선 초 국사였던 무학 대사께서 이곳 국사봉에 올라 한양을 바라다보며 수도 서울의 행태를 구상한데서 국사봉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무학 대사는 태조와 인연이 깊었다. 태조가 어느 날 꿈 이야기를 했다. 그 꿈은 이런 내용이었다. 집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서까래를 짊어지고 나오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꽃들이 무수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이 깨지고 있었다. 이런 꿈을 꾸고 그 꿈 얘기를 무학 대사에게 하고 꿈풀이를 의뢰했다. 그러자 무학 대사가 그랬다. 새로운 왕조를 일으킬 꿈이니 그대로 될 터인즉 소중한 꿈을 잘 간직하라고 했다. 그리고 후에 왕이 된 태조와 무학 대사가 앉아서 얘기를 하던 중에 그렇게 물었다. “나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이는구려. 대사께서는 짐이 어떻게 보이시오” 그러자 무학 대사가 답했다. “저의 눈에 왕은 부처처럼 보입니다. 본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이지요” 참으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태종의 장자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그러나 부친의 마음이 충녕을 보위에 앉히려 한다는 것을 알고 효령도 설득하고 자신도 세자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그로 인해 그는 여러 가지로 불미스러운 일들도 일으키게 되고 유유자적하게 대군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양녕대군의 세자를 폐하는 것에 대하여 황희 정승이 강력하게 반대를 하게 되고 그는 이 일로 인해 미움을 사 한동안 공직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다. 시, 서화에도 능했다고 해서 남대문에 걸려있는 숭례문의 제자도 양녕의 글씨라는 설도 있다. 이후 그는 세조의 계유정난 등에 대해서도 세조를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비운의 대군으로 그의 묘가 지덕사 부묘소에 있고 국사봉 아래 자락에 위치해 있다. 효령대군의 묘는 방배동에 위치해 있다. 세종의 묘는 여주에 있다. 국사봉을 오르는 데는 입구에서 본격적으로 오르막만을 오르면 30분이면 족히 오를 수 있을 만큼 높지 않은 산이다. 주변 곳곳에 암자들이 산재해 있고 역사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도 있다. 수목이 우거져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어쨌든 국사봉은 주변의 서민들의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러 곳에서 국사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많이 마련돼 있다. 산자락 아래쪽으로는 주변에 아파트들이 산재해 있고 곳곳에는 다세대주택들로 밀집되어져 있는 편이다. 산 중턱 부근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들도 있고 배드민턴장들도 마련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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