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안나 까레니나
얼마 전이었다.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석영중교수의 안나 까레니나 강의를 들었다. 그냥 스쳐지나가고 그저 불륜을 저지른 한 여자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알았던 안나 까레니나를 새롭게 보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강의를 들었고 급기야 소설을 사서 읽어보게 되었다. 1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전체 8부로 구성되어져 있고 1권이 1,2부 2권 3,4,5부 3권이 6,7,8부로 되어 있다. 마지막 8부는 톨스토이의 자비로 출판을 하기도 했단다. 그 속에서 특이한 점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부분은 러시아가 동경의 대상은 프랑스였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이 품위 있는 것으로 여겼고 그곳에의 취향과 취미 또는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도 그렇게 프랑스식으로 따라 하고자 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다음은 영화를 보았다. 소피마르소가 안나로 열연했던 것과 최신작으로 2012년 작을 보았다. 2시간 정도의 영화 속에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단편적인 부분이었고 피상적으로 표현되어 원작의 본의를 훼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작가의 의도와 목적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 것처럼 여겨졌다. 세계최고의 문학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했다. 석교수의 시각과 얘기는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 주었다. 정말 레빈의 풀베기 장면이 있었다. 정말 성장하는 삶을 산 레빈이 톨스토이의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를 투영 시킨 것으로 여겨졌다. 못생기고 시골에서의 생활을 하는 귀족으로서 어떻게 성장하는 삶을 살았을까. 성장이라는 것의 해석에 석교수가 얘기하는 바를 옮기면 그렇다. 성장이란 인간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학습을 통해서 자기완성에 도달하는 그 과정이란다. 그 완성된 결정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자기완성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써나가는 것이 본래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이고 삶의 본체라는 것이다. 석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 가지에 집중해야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단다. 첫째는 몰입이라고 한다. 풀베기를 하면서 그는 일에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그것에 동화되어 물아일체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식사도 본래는 집으로 가서 해야 하는데 농부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주인과 소작농이라는 상하관계를 떠나 수평적으로 그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생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둘째는 소통이었다. 그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독백을 통해서 소통하고자 했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다. 또한 농부들과도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므로 써 그들의 애로를 해소하면서 수확량을 늘려가고 일의 효율성을 높여갈 수 있도록 역할을 다했다. 세 번째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사람은 죽는다. 필연적으로 사람인 이상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항시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삶을 살아가진 않는다. 그럼으로 인해 삶에 대해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번뇌하고 고뇌하는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죽음에 대한 기억에 충실해질 때 삶에 긍정적일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그것에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블론스키 백작과 안나의 삶은 그렇게 성장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서로 집착하고자 했고 의존하고자 했고 소유하고자 했다. 서로간의 사랑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인 양 그것에 매몰되어져 버렸다. 그리고 결국은 그런 그 확신이 허물어지자 안나는 스스로 묘혈을 팠던 것이다. 처음 시작이 기차역이었다. 그리고 종말도 안나는 그렇게 기차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후 블론스키는 스스로 자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쟁에 참가하므로 더욱 피폐해진 삶을 살게 된다. 그의 자식은 결국 카레린이 키우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톨스토이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잃게 됨으로써 죽음에 대해 경험을 일찍 쌓게 된다. 그리고 또 나이든 상태에서 형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자신도 마차사고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회생하는 경험도 하게 된다. 그로인해 그는 죽음에 대해 그것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항상 기억하므로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을 깨치게 된다. 자신은 결국 50세에 이르러 회한에 빠지게 되고 참회의 나날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참회록을 저술한다. 그 순간에 50평생의 삶을 다시 재조명하고 그동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고백한다. 그 이후 더욱 성숙된 자세로 진지하게 생에 임하게 되고 충실하고 성장하는 삶을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간에 반목하고 갈등하고 분쟁을 일삼는 속에서도 관계를 유지해 가고 가정을 지켜나간다. 그는 언제나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천착하고자 했고 그것에 해법을 찾고자 했으며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문학을 통해서 인생의 제반 문제의 해법을 구했으나 제대로 만족할만한 해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결국은 종교에의 귀의를 통해서 답을 구했으며 또한 신에 의지하므로 길을 찾았다. 그의 인류애적인 철학과 사상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면서 인류애적인 정신을 가지고 선을 지향하는 삶을 추구하기를 권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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